왕자님이라는, 터무니없는 환상일지라도
<호두까기 인형>의 계절이다. 이른 어둠이 내려앉은 극장 앞, 거대한 크리스마스 트리와 반짝이는 조명, 기대를 가득 안고 극장으로 들어서는 사람들의 걸음걸음마다 깃든 설렘.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어리둥절한 아이들도, 자신의 우상인 발레리나처럼 머리를 틀어올리고 예쁜 스커트를 입은 어린이도, 그 모든 풍경이 사랑스러워 보이니 정말 <호두까기 인형> 시즌이 틀림 없다.
연말 클래식 음악계의 연례 행사가 인류의 화합을 노래하는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이라면, 오페라로는 가난한 연인의 절절한 사랑 이야기를 다룬 <라 보엠>을 언급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발레 <호두까기 인형>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을 터. 차이콥스키의 아름답고 환상적인 음악을 바탕올 고전발레의 정수를 그려낸 이 작품은, 한 해를 정리하는 계절이 오면 공연을 올리지 않는 곳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세계 발레단이 공통으로 선보이는 레퍼토리다. 시즌이 시즌이니 만큼 연말이면 으레 이 공연을 찾는 이들이 많기 때문일 테지만, 무엇보다 시대를 넘어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 작품이 사랑받는 데는 그 이유가 있다.
동화책의 첫 장을 펼치는 듯한 서곡이 연주되면, 크리스마스 파티가 열리는 대저택으로 향하는 여러 가족들의 모습이 나타난다. 비슷비슷하지만 포근해 보이는 옷을 갖춰 입고, 각기 선물을 챙겨 한데 모인 대가족의 풍경은 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풍요로워진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보기 드문 이러한 풍경은, 가족이란 이렇게 따뜻한 것이라고 시각적으로 강조해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어린이는 장난감에 호기심을 띤 채 작은 것에도 놀라며, 어른들은 그런 아이들을 보며 화목한 가족의 정서를 만끽한다. 이야기의 큰 줄거리가 되는 상황도 그렇다. 주인공 소녀 클라라(버전에 따라 마리로도 불린다)는 드로셀마이어 삼촌이 선물해준 호두까기 인형에 뛸 듯이 기뻐하고, 이 인형은 동화적 상상을 발현하는 매개가 된다. 어린이의 때묻지 않은 풍부한 상상력은 인형을 왕자로 만들어낸다. 그것도 자신을 위기에서 구해준 운명의 왕자님으로.
ⓒAlexander Iziliaev/Philadelphia Ballet
합창 선율과 어우러져 관객에게 전율을 일으키는 눈의 왈츠, 남녀의 춤이 화려하게 펼쳐지는 꽃의 왈츠, 왕자님과 함께 떠난 크리스마스 랜드(혹은 과자 나라)에서 만난 여러 나라의 인형들까지 모두 다 어린이의 무궁무진한 상상력이 도달하는 곳일 터. 그렇게 펼쳐진 무대를 바라보는 어른은 공연이 진행되는 2시간여 동안 현실은 잠시 잊고 상징의 세계에 안착한다. 언젠가, 어린 시절의 내가 한번은 꿈꿨을 그 순간으로. 그러나 우리는 내심 명확하게 알고 있다. 지금 눈앞에 펼쳐진 발레 무대가 단지 꿈이라는 것을.
그러니 사실 <호두까기 인형>은 ‘환상’이라는 이데올로기에 갇혀버린 무대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연말이면 공연장을 찾는 건, 척박한 일상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예술이 우리를 꿈꾸게 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언젠가 한번은 품었을, 나만의 ‘호두까기 인형’을 살포시 꺼내게 하는 순간 말이다. 풍요로운 가정의 모습, 설레게 하는 선물, 각자의 마음속에 있었을 나의 왕자님 혹은 공주님까지. 그 모든 환상이 가장 환상적인 방법으로 펼쳐지는 순간. 기꺼이 그것이 ‘환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환상에 취해보는 건, 단연 예술만이 펼쳐낼 수 있고 그 현장에서만 감응할 수 있는 아름다운 경험이기 때문이다.
1892년 러시아에서 초연돼 130여 년 역사를 훌쩍 넘긴 만큼, 발레 <호두까기 인형>은 각지에서 서로 다른 스타일로 꾸준히 새롭게 발표되고 있다. 크게는 아기자기한 무대 구성과 동화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마린스키 상트페테르부르크 버전(바실리 바이노넨 재안무), 웅장한 세트로 하여금 모험심을 자아내고 서사성을 강조하는 볼쇼이 버전(유리 그리고로비치 재안무)으로 나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유니버설발레단과 국립발레단이 두 버전을 각각 선보이고 있다. 뉴욕 시티 발레가 공연하는 조지 발란신 버전은 아주 많은 어린이 무용수가 무대에 등장하는 덕분에 좀 더 가족발레에 가까운 풍경을 보여준다.
꿈의 세계를 빌려 현실을 잠시 유예한, 이 아름다운 환상의 순간을 경험한 우리는 극장을 벗어나며 다시금 현실을 되돌아본다. 발레 무대를 감상하는 동안 잠시 자신을 잊고 현실의 무게를 벗어던진 것처럼, 아름다움과 기쁨이 온전하게 펼쳐지던 꿈을 벗어나 현실로 회복하는 것이다. 또 누군가는 그 환상에 취하기보다 무대에 몰입하고 거리두기를 반복하며 꿈과 현실의 경계를 오히려 또렷하게 인식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한낱의 꿈이었다 여기지 않고, 이 예술적 순간을 또 다른 원동력으로 삼아 오늘을 충실하게 살아가는 우리 아닐까. 그리하여 이번 일 년도 잘 살아냈다고, 아름다운 예술을 보며 다독여본다.
글 김태희 무용평론가
올 연말 발레와 함께하고 싶다면
12월 13일부터 25일까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유니버설발레단 <호두까기 인형>
12월 17일부터 28일까지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