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락행 완행열차에서
지난 11월 9일, 나는 극락행 완행열차에 타고 있었다. 그것도 특실에. 극락문이 바로 눈앞에 보이는 첫 줄에 앉아 극락 가는 일이란 무엇일까, 곰곰이 고민하면서. <산오구: 극락행 완행열차>를 예매하면서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든 것도 사실이다. 도대체 왜 내가 극락행 열차를 ‘내돈내산’으로, 그것도 얼리버드로 예매하고 있는가? 물론 대단히 좋은 어떤 순간에 ‘정말이지 극락 같다…’는 말을 하기도 하지만 내가 정말로 극락이라 불리는 저세상의 어느 한 세계로 가고 싶은 것은 아닌데 말이다.
<산오구: 극락행 완행열차>는 방지원이 성수동 한복판에서 연 굿판이었다. 오구굿 중에서도 ‘산오구굿’을 서울에서 해 볼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오구굿이란, 동해안 지역에서 망자를 극락세계로 천도하기 위한 굿이다. 한편 산오구굿은 망자가 아니라 산 사람을 위한 것으로, 방지원에 의하면 “도래하지 않은 자신의 죽음을 예비하고 아울러 굿판에 함께 모인 모두와 복과 공덕을 나누는 축제와도 같은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산오구굿은 연행 사례가 거의 드물어, 대중에게는 다소 생소하게 여겨지는 것이 현실이다.”
ⓒ국립민속박물관
아마도 오늘날 성수동에 찾아올 관객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방지원이 택한 전략은, 이것이 오랜 전통을 지닌 굿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동시대 예술계에서 쓰이는 여러 요소와 그 연행의 일부가 맞닿아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관객 참여형(이머시브) 퍼포먼스라는 설명과 관객이 구경꾼이 아니라 완행열차의 승객이 되게 하기 위한 여러 포인트는 물론, 전시장처럼 세팅된 제사상이 그런 경우였다.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줄을 서서 내 이름이 적힌 위패를 받아 들고, 그 위패를 꽂으러 제사상으로 향했다. 이건 ‘관객 참여형 퍼포먼스’고 ‘전시장’이라고 생각했지만, 살짝은 진심으로 이 모든 것을 믿기도 했다. 오자마자 나를 혼령으로 만들어버리는 이곳에서 일단은 살아 나가야 한다, 재밌는 거 보러 가자고 해서 따라온 내 친구를 저승길 동무로 만들 수는 없다, 이건 오구가 아니라 산오구굿이다, 이 사람들을 다시 개똥밭에 굴러도 좋다고 하는 그 이승으로 다시 데려가는 순서가 분명히 마련돼 있을 것이다, 그걸 확인할 때까지는 이 굿판을 떠날 수 없다, 고 속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완행열차에 타고 있는 동안에는 정말이지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그건 죽은 넋들을 위로하는 시간이기도 했지만, 이 자리에 모인 우리 ‘산 망자들’의 삶에 얼마나 죽음이 가까이 있는지를 돌아보는 시간이기도 했다. 이곳에 ‘산 망자’라는 명목 아래 올 수 없었던 이들. 어쩌면 ‘망자’의 자리에서 이 굿을 함께 보고 있을 서울의 어떤 넋들이 떠올랐다. 어떤 예기치 못한 죽음, 피할 수 없던 죽음이 떠오를 때는 가늠하기 어려운 상실감을 느꼈다. 그래도 ‘굿이 너무 울기만 하면 안 된다’고 말하며 쉼 없이 복을 빌어주는 무녀들의 이야기와 노래를 들으면서는 특별한 충만감을 느끼기도 했다. ‘산오구굿 정말 굿good이다’라는 농담을 들을 때는 어쩔 수 없이 헛웃음이 나와버리기도 했다. 그렇게 울다가도 웃는 시간이었다.
‘이것은 진짜 굿이다’, ‘동시에 관객 참여형 퍼포먼스다’ 두 생각이 굿을 보는 내내 맴돌았다. 물론 이 ‘극락행 완행열차’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지탱하고 있는 건 굿의 전통이었다. 하지만 굿과 멀리 떨어진 현실에 사는 우리가 그 굿의 세계에 참여하게 하는 방식은 다분히 지금 우리의 감각과 맞닿아 있었다. 저승사자들이 큰 호랑이를 데리고 와서 극중극 형식으로 보여준 그 재담들, 투명한 유리 창문을 사이에 두고 젊은 시절의 무녀와 현재의 무녀가 만나던 순간, 사람들의 이름이 적힌 위패 앞에 따로 모여 있던 반려동물의 위패, 아무도 현금을 들고 다니지 않아 ‘돈 꽂기’를 할 수 없어 가짜 돈(극락전)을 미리 마련해준 주최 측의 세팅 등. 그건 진짜 굿을 경험하는 시간이기도 했지만 ‘굿’이라 불리던 전통이 어떤 모습이었고 지금 우리가 그 전통을 어떤 방식으로 바꿔내고 있는지를 느끼게 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새삼스럽지만 이 칼럼 코너의 이름은 ‘현대음악에 주파수를 맞추면’이다. 주로 서양음악을 다루거나 그 전통에 기반한 것을 다뤄왔다. 하지만 내가 이해하는 ‘현대음악’은 어느 전통에 기반한 것이라기보다는, 그것이 어떤 전통으로부터 이어진 것이든 거기서 오늘날의 관점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 기대되는 음악, 우리 시대의 흐름과 함께 변화한다는 것을 그 자연스러운 속성으로 삼는 가변적인 음악이다.
언젠가 나는 현대음악의 ‘최상의 정의’를 고민하며 이렇게 썼다. “망망대해 속에서 스스로의 선택에 기대와 운을 걸어보는 여정, 혹은 무형의 것들을 상대하며 현재 속에 새로운 자리를 만드는 것.” 내게 더 중요하게 다가오는 건 혁신을 위한 혁신이나 실험을 위한 실험이 아니라, 깜깜한 곳으로 나아가며 조금 다른 것을 만들어보고자 하는 힘이다. 전통에서 비롯한 어떤 것을 지금 우리의 감각으로 다시 만들어나가는 시간, 오랜 형식이 생생한 언어들로 바꾸어 살아나는 과정 같은 것들. <산오구: 극락행 완행열차>에서 내가 경험한 것은 아마도 그 정의가 현실의 장면으로 펼쳐지는 순간인 것 같다.
글 신예슬 음악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