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상은 완벽한 희망이다
이젠 거의 인터넷 밈이 된 “그 여자 미친 여자 아닙니다. 슬픈 여자죠.”라는 문장은 후안 마요르가의 희곡 ‘비평가’에 나오는 대사다.* ‘비평가’는 10년 만에 다시 만난 극작가 스카르파와 비평가 볼로디아의 2인극이다. 10년 전, 비평가 볼로디아는 신인 극작가인 볼로디아의 작품을 혹평했지만 이제 두 사람의 사회적 위치는 역전됐다. ‘연극이란 무엇인가(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해 두 사람은 링 위의 복서처럼 공격하고 방어한다. 여성 캐릭터가 재현된 방식을 두고 두 사람이 격론을 벌이다가 ‘미친’과 ‘슬픈’의 해석을 두고 나오는 스카르파의 대사가 바로 “그 여자 미친 여자 아닙니다. 슬픈 여자죠”다. 이 둘 사이의 구분이 너무 자주 혼란스럽다는 사실은 수많은 예술 작품이 광기에 집착하는 이유가 된다. 슬픔이 극에 달할 땐 광기로 전이되는 것 말고는 탈출구를 찾기 어려워지니까. 스티븐 킹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캐리>1976와 <미저리>1990부터 길리언 플린의 소설을 영화화한 <나를 찾아줘>2014까지 미친 여자의 계보는 그 자체로 탐구할 만한 긴 목록을 가지고 있지만, 장준환 감독의 한국 영화 <지구를 지켜라!>2003를 리메이크한 요르고스 란티모스Yorgos Lanthimos 감독의 <부고니아>2025는 미친/슬픈 아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계보에서 언급될 만한 작품이다.
<지구를 지켜라!>는 2003년에 개봉한 이후 가장 과소평가된 영화로도, 가장 과대평가된 영화로도 일컬어진다. 외계인의 지구 침공이 이미 시작됐다고 믿는 병구(신하균 분)는 인류 최후의 날이 며칠 뒤의 개기 월식 날임을 분석한 뒤 애인 순이(황정민 분)와 함께 강사장(백윤식 분)을 납치한다. 누가 봐도 억울해 보이는 강사장과 누가 봐도 미친 사람처럼 보이는 병구의 진실이 드러나는 후반부가 되기 전까지 영화는 진지하다가 웃기다가를 오간다. 멈추지 않는 소변 줄기, 언제나 딱할 정도로 중요한 ‘날 사랑해?’라는 질문, 장난감 총과 형사 등. <더 랍스터>2015, <킬링 디어>2017,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2018, <가여운 것들>2023 등을 연출해 자기만의 작품 세계를 확고하게 다진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이 <지구를 지켜라!>의 할리우드 리메이크를 선택했다는 건 뜻밖의 소식이었다. 장준환 영화에서 백윤식이 연기한 배역을 에마 스톤이 맡는다는 소식 이후에야 이 작품이 요르고스 란티모스 유니버스의 연장에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요르고스 란티모스-에마 스톤은 <부고니아>로 다섯 번째 협업했다. (덧붙이자면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은 <지구를 지켜라!>를 보고 리메이크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애초에 감독으로 논의됐던 아리 애스터 감독이 참여하고 윌 트레이시가 주로 작업한 대본을 받고 참여를 결정했다.)
백윤식이 에마 스톤이 되면서 납치된 이의 성별이 바뀐 것 말고도 <부고니아>는 여러 면에서 원작의 이야기를 수정했다. 포스터만 봐도 그렇다. <지구를 지켜라!>의 포스터는 병구를 내세웠다. (다소 코믹한 풍으로 사진과 카피를 뽑았는데, 아마 영화의 어둡고 잔인하고 슬픈 분위기를 상상하지 못하게 하려는 마케팅 시도였던 듯하다.) <부고니아>의 포스터 주인공은 에마 스톤이 연기하는 미셸이다. <지구를 지켜라!>의 강사장이 그런 것보다 <부고니아>의 미셸은 슬픔 없이 미친 사람이다. 미셸은 점점 거대해지는 자본을 가진 극소수의 사람에 대한 보통 사람들의 분노를 반영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에마 스톤은 평소보다 훨씬 낮은 목소리로 연기하는데, 한때 ‘제2의 스티브 잡스’로 불리기도 한 사업가 엘리자베스 홈스를 연상시킨다. 엘리자베스 홈스는 의료 스타트업 테라노스를 창업했는데, 극소량의 혈액으로 250여 가지 질병을 진단할 수 있다는 혁신적인 기술이 모두 거짓으로 밝혀지며 실리콘 밸리 역사상 최악의 사기꾼으로 불리게 된다. 홈스가 신뢰를 산 방법 중 하나는 원래 목소리와 다른 낮은 톤의 목소리였다고 알려져 있는데, <부고니아>의 미셸 또한 그렇다.
자기 계발 성공 신화의 현현 같은 아름답고 부유한 여자. 미셸은 모든 문제에 말로 대응하는 사람이다. <부고니아>에서 미셸은 테디에게 계속 이야기하자고 말을 건다. 테디처럼 불리한 상황에 처한 사람에게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이러한 대화는 거의 학대에 가깝다. 미셸이 보여주는 언어와 행동의 괴리는 자신이 온전히 주도권을 쥔 회사에서부터 두드러지며, 심지어 자신을 납치한 사람이 보여주는 불안정에 냉정하게 대처하는 태도는 무서울 정도다. 여기에 테디는 원작에서처럼 트라우마만으로 이야기하기에는 2020년대의 미국과 음모론이 결합된 신념 체계를 가진 사람으로 보이며, 그의 곁에는 테디를 따르는 사촌동생 돈이 있다. 돈을 연기하는 에이든 델버스는 전문 배우가 아니며 자폐 스펙트럼인데, 돈이라는 캐릭터가 지닌 특유의 슬픔과 희망을 표현해낸다. 외계인을 따라 지구를 떠날 수 있다는 허무맹랑한 희망을 확신한 순간 그가 하는 행동이 그렇다.
<부고니아>에는 슬프기 때문에 미칠 수밖에 없었던 테디를 환상적인 방식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과거, 테디는 미셸을 만나 식물인간이 된 어머니의 치료와 관련해 협상했다. 실제로는 다른 장소에서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졌을 공산이 커 보이는 대화지만, 영화는 마치 테디의 머릿속을 보여주듯 기묘하게 이 신을 찍어냈다. 두 사람은 미셸의 회사 밖에서 마주서서 대화를 진행한다. 대화를 주도하는 쪽은 당연히 미셸이며, 미셸의 뒤에는 높은 직급의 직원들이 무리 지어 서 있다. 이때 테디는 마치 풍선을 들고 서 있는 것처럼, 공중에 뜬 어머니를 붙들고 있다. 손을 놓으면 어머니는 하늘로 날아갈 것만 같다. 의식이 없는 어머니가 언젠가 깨어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놓지 않는 테디의 절박함. 원작에는 없는 장면이며, 지극히 란티모스적인 순간이다. 마지막 장면 역시 그렇다. <지구를 지켜라!>에서 ‘Over the Rainbow’가 망상으로 희망을 쌓아 올리는 병구의 사운드트랙이라면, <부고니아>에서 ‘Where Have All The Flowers Gone?’은 인류세에 마침표를 찍은 미셸의 사운드트랙으로 느껴진다. 전자에서 망상은 완벽한 희망이다. 온전히 자기의 것. 후자에 이르면 온도 낮은 응시는 슬프기보다 서늘하다. 안타까움 없는 관조.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또 하나의 인간 군상 표본 작업이 이렇게 마무리된다.
* 한국에서 지만지드라마를 통해 출간된 『비평가/눈송이의 유언』(김재선 역)에서 이 대사는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 “미친 여자가 아니에요, 슬픈 여자인 거예요.”
글 이다혜 작가·씨네21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