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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9월호

제목으로 장난치다 여기까지 ‘와’버렸다

며칠 전, 기대되는 연극 하나를 접했다. 제목이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다. 설정 자체가 재밌다. 무대는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공연장의 허름한 분장실이다. 주인공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의 언더스터디인 에스터와 밸은 언제 무대에 설 수 있을지 모른 채 한없이 기다리기만 한다. ‘언더스터디’는 갑작스러운 사고에 대비해 주인공과 똑같은 배역을 연습해놓는 사람이다.

기다림의 시간은 초조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초조하지도 않다. 언제 어떻게 투입될지 모를 그들의 기다림에는 주인공이 오지 않는다면 무대에 주역으로 데뷔할 수 있는 흥분이 녹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상하다. 공연 홍보 문구에 “무대에 오르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두 사람의 하루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데…”라고 적혀 있는 것처럼, 기다림과 초조함은 뜻밖의 사건과 맞물려 흘러간다. 스포일러를 해선 안 되니 여기까지만.

제목은 작품의 반도체

예술가들과 인터뷰해보면 제목은 가장 나중에 만들어지는 결정체다. 구상과 기획, 줄거리 짜기와 배역 선정, 작품 창작과 실행 등의 순서를 거쳐 가장 마지막에 떠오르는 그 한 줄이 제목이다. 그래서 곧 선보일 작품에 대해 한참 이야기를 듣고 “제목이 무엇인가요?”라고 물으면 “아직 제목은 못 정했다”라는 답변이 일반적이다. 작은 반도체에 수십만 개의 기능이 집적된 것처럼, 제목은 작품을 대변하는 한 줄의 반도체와 같은 것이다.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가 어떤 구상을 거쳐 만들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제목부터 비틀며 만들어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원작 <고도를 기다리며> 뒤에 붙인 ‘기다리며’라는 작은 단어가 상상력에 불씨가 된 것이 아닐까?

재밌게 보았던 연극 중 <웃음의 대학>에서도 이러한 ‘제목 놀이’가 등장한다. 전쟁기에 극작가와 검열관의 대립을 다룬 작품이다. 검열관은 전쟁기에 사랑 타령이나 하는 대본을 썼다고 나무라지만 작가는 말한다. “제목을 똑바로 보세요. ‘로미오와 줄리엣’이 아니라, 전쟁 시국을 반영해 ‘로미오 대 줄리엣’으로 했습니다.” 글자 하나 바꿨는데 상상력이 열리고 극 중 상황을 웃음과 함께 비틀어버린다.

나는 그날부터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중간에 ‘와’가 들어간 제목들을 바꿔 보았다. (왠지 미녀가 이길 것 같은) ‘미녀 대 야수’, (왠지 거지가 이겼으면 하는) ‘왕자 대 거지’, (공연 후에 진행되는) ‘관객과의 대결’ 등등. 작품 구상과 정리 뒤에 잡히는 제목을 창작의 가장 첫 번째에 놓으면 뭔지 모를 상상력의 불이 지펴지는 것 같다.

여러 편의 판소리를 한데 구성한 국립극장 마당놀이 ⓒ국립극장

별주부와 이몽룡은 왜 그랬을까?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처럼 국악에도 잘 알려진 명작이 있다. 판소리로 접할 수 있는 수궁가·흥보가·춘향가·심청가·적벽가다. 주인공에 대해 주절주절 이야기하지 않아도 누구나 알고 있는 개성 강한 캐릭터들이다.

그들을 새롭게 엮는 제목들을 떠올려보니 줄거리가 자연스레 나온다. 흥보가를 비틀어 ‘흥보 대 놀보’라는 제목으로 형제간에 싸움을 ‘박 터지게’ 진행시킨다. ‘춘향 대 몽룡’으로 남녀의 성격 차이를 극대화해보고, ‘심청이 대 심봉사’로 하여 부녀 간의 싸움을 부추겨본다.

서로 만난 적 없는 캐릭터들도 엮어 본다. ‘별주부와 몽룡이’는 각각 수궁가와 춘향가에 나오는 인물들이다. 토끼가 어떻게 생겼는지 수궁의 화공이 별주부에게 그 모습을 그려준다. 별주부는 물 밖으로 나오려 수면에 있는데, 인당수로 뛰어든 심청이와 부딪혀 기억상실증에 걸린다. 그러고 나와 만난 이는 한양에서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몽룡인데, 토끼의 얼굴이 가물가물한 별주부는 그와 토끼를 착각해 간을 주면, 용궁에 거나한 자리를 선사하겠다고 감언이설로 꼬득인다. 시험 공부에 지친 몽룡이는 그런 토끼를 따라 용궁으로 가고, 몽룡이가 도망간 것을 안 춘향이는 몽룡이를 찾기 위해 화가 난 채 인당수로 풍덩 뛰어든다. 하지만 춘향이는 심청이 대신 황후가 되어 나타난다. 별주부와 몽룡이의 잘못된 선택과 실수로 인해 판소리 수궁가·춘향가·심청가가 꼬여버리는 설정이다.

상상력이 떨어지면 제목으로 SOS

수궁가와 적벽가도 엮어 본다. 수궁가의 별주부와 토끼는 서로 대립 관계를 보여준다. 하지만 ‘별주부 ‘와’ 토끼’로 엮으니 둘이 합세하고, 이렇게 사는 게 지긋지긋하다며 용궁의 권력을 탈취하기 위한 무장 집단으로 변한다. 그렇게 둘은 용궁으로 향하는데, 때마침 적벽대전에서 패한 전쟁의 신 조조를 만나 ‘별주부와 토끼와 조조’전이 펼쳐진다. 결국 별주부와 토끼는 조조의 힘을 빌려 용궁을 탈취하지만, 다시 ‘수궁가 대 적벽가’가 되어 조조가 모든 권력을 거머쥔다는 설정이다.

(이렇게 적어보니 이 칼럼의 연재 제목 ‘국악 칼럼이라기엔 쑥스럽지만’처럼 조금 쑥스러운 나만의 상상력인 것 같기도 하지만…) 제목을 비틀면 보이지 않던 이면이 보이는 것 같다. 패러디 작품의 시작도 이와 같은 것이다. 중국 소설 중 『금병매』도 원래 『수호전』의 일부로 등장하는 세 여인 금연·이병·춘매의 이야기를 전면에 드러낸 패러디 작품이고, 그들 이름의 하나씩 따서 ‘금병매’라 지은 것이다.

상상력이 떨어졌다면 제목을 적은 작은 종이들을 허공에 던져보자. 놀보 마누라‘와’ 심봉사의 불륜 로맨스, 심청이‘와’ 몽룡이의 이상한 만남, 조조‘와’ 토끼가 만나 펼치는 꾀의 대결, 흥보에게 박씨 물고가야 할 강남 제비가 진짜 강남으로 가서 뺑덕어멈과 만나는 제비‘와’ 뺑덕어멈 등등. 우리가 몰랐던, 하지만 엉뚱해서 어디 가서 적당히 욕먹을, 그러면서도 나름 재밌는 이야기들이 작가의 노트 속에서 펼쳐질지!

글 송현민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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