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창, 슬프기보다 비장한
음악사에는 ‘비창’이라는 제목이 붙은 유명한 작품이 두 곡 있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8번 C단조 ‘비창’1798과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 B단조 ‘비창’1893이다.
먼저 ‘비창’이라는 말에 대해 알아보고 싶다. 슬플 비悲 슬플 창愴. 매우 슬프다는 뜻은 대략 느껴진다. 그렇지만 음악 작품의 제목으로 쓰는 경우를 제외하고 한국어에서 ‘비창한 기분을 느낀다’라거나 ‘비창하게 흐느꼈다’라는 식으로 이 말을 사용하는 일은 없다. 추측하건대 우리는 거의 쓰지 않는 말인 일본어 비창悲愴(히소오ひそう)을 직역했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에서도 이 말을 자주 사용하지는 않는다. ‘비통한 최후悲愴な最期’, ‘비장한 결의悲愴な決意’라는 식으로 문어체에서는 사용하지만, 일상에서는 거의 쓰지 않는 말이다.
이 두 작품에 일본인이 사용한 제목 ‘비창悲愴’은 무엇을 번역한 것일까? 베토벤은 자신의 피아노 소나타 8번에 직접 ‘pathetique’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 단어는 프랑스어다. 프랑스어 사전을 찾아보면 ‘비장한’, ‘감동적인’, ‘감격스러운’이라는 뜻이 나온다.
한편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6번에 제목을 붙인 사람은 작가인 동생 모데스트 일리치 차이콥스키로 알려진다. 그의 회상은 이렇다.
“형의 지휘로 이 교향곡이 초연된 다음 날, 형은 출판사로 악보를 보내기에 앞서 제목을 붙이기 위해 고민에 빠졌다. 나는 ‘비극적’이라는 제목을 제안했지만, 형은 마뜩잖아 했다. 나는 방을 나왔다가 갑자기 ‘비창’이라는 제목이 떠올라 다시 방으로 되돌아가 형에게 말했다. 형은 ‘브라보, 모디(모데스트의 애칭), 바로 그거다. 비창이다’라고 외치고는 악보 표지에 이 제목을 썼다.”
차이콥스키가 악보 표지에 쓴 제목은 ‘Патетическая (pateticheskaya)’다. 로마자 표기에서 알 수 있듯이 어원은 프랑스어 ‘pathetique’와 같다. 차이콥스키가 속한 유르겐손 출판사는 국외로 악보를 보낼 때 프랑스어 제목을 사용했다. 러시아어-한국어 사전에서 ‘Патетическая’를 찾아보면 ‘강렬한 감흥을 일으키는’, ‘강한 감동을 주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감상적인’, ‘애절한’이라는 뜻이 나와 있다. 프랑스어 ‘pathetique’보다는 한결 슬픈 느낌이다.
나는 모데스트가 이 곡의 이름을 붙였다는 주장에 대해 강한 의심을 품어왔다. 다른 사람 아닌 차이콥스키 자신이 이 제목을 생각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두 작품의 시작 부분을 들어보면 두 곡 모두 음계상 ‘라-시-도-시’로 한 음씩 움직이는 선율로 시작한다. 느낌은 사뭇 다르다.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시작 부분은 강렬하고 비장하다. 차이콥스키의 교향곡은 비통하고 애절한 느낌으로 시작한다. 베토벤이 세상을 움직이려는 포지티브positive(양)의 느낌이라면, 차이콥스키는 세상을 외면하고 싶은 네거티브negative(음)의 느낌이다. 얼마간은, 두 단어의 프랑스어-러시아어 버전이 주는 느낌과도 통한다.
차이콥스키는 동생이 이 제목을 지었다는 주장에 대해 확인도 부정도 할 수 없었다. 이 곡을 초연하고 9일 뒤, 악보에 제목을 써놓고는 콜레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대체로 거의 모든 교향곡이 빠르고 자신감 있는 분위기로 끝나는 것과 달리 그의 이 마지막 교향곡은 슬픔의 극한을 달리며 사라지듯이 끝난다. 그 때문에 이 교향곡은 ‘차이콥스키의 음악적 유서’라는 해석을 불러일으켰다. 심지어 그가 콜레라로 위장하기 위해 비소를 마시고(콜레라와 비슷한 구토와 설사 증상을 일으킨다) 자살했다는 설도 제기됐다.
동시대 사람들도 베토벤과 차이콥스키의 ‘비창’ 시작 부분이 비슷하다고 인식했다. 모데스트도 이 때문에 제목을 지었다는 자신의 입장을 방어하면서 ‘사람들은 이 곡이 베토벤의 비창을 연상시킨다고 말하지만, 형은 그런 사실을 깨닫지도 못했다’고 강조했다. 이것 역시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모데스트가 진실을 말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 역시 형 차이콥스키의 마음속에 들어가보지는 못했으므로, 작곡가가 “브라보, 모디”를 외쳤을 때 ‘내가 생각한 것도 바로 그거야!’라는 뜻이었을 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두 곡은 발표된 시대도 한 세기나 차이 나고 연주 형태도 한 사람이 연주하는 피아노곡과 수십 명이 굉음을 쏟아내는 교향곡으로 서로 다르다. 그렇지만 두 곡 모두 해당 장르의 최고 인기곡 중 하나로 꼽힌다.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8번 ‘비창’은 끓어오르는 듯한 격렬한 표현으로 인해 당대 음악계에 도전장을 내미는 작품으로 여겨졌다. 보수적인 피아노 교사들이 제자들에게 ‘이 당돌한 곡을 절대 연주하거나 흉내도 내지 말라’고 강요한 사실이 자주 발견된다.
베토벤의 이 소나타는 유독 대중문화에 자주 인용된 곡이기도 하다. 2악장 주선율은 루이스 터커의 1982년 히트송 ‘미드나이트 블루’와 빌리 조엘의 1983년 ‘디스 나이트’에 인용된 것을 비롯해 수많은 가요에 전용됐다. 1악장과 3악장의 주요 선율도 댄스 댄스 레볼루션DDR을 포함한 수많은 게임에 사용됐다.
차이콥스키 교향곡 ‘비창’의 인기도 이에 못지않다. 3악장의 주선율은 RPG 게임 ‘데스티니’ 등에서 흥분을 일으키는 데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4악장의 무너지는듯한 구슬픈 선율은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 <에비에이터> 등에서 주인공의 절망스러운 상황을 처절히 표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오늘날 콘서트 무대에서 베토벤 못잖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 구스타프 말러도 이 교향곡에서 영향을 받았다. 그가 완성한 마지막 교향곡인 교향곡 9번1909의 3악장이 빠르고 격렬한 스케르초이며, 이어지는 4악장이 무너지듯이 사라져가는 비통하고 느린 악장이란 점 등은 ‘비창’ 교향곡의 구조와 매우 유사하다. 말러가 이 점에 대해 언급한 바는 없다. 그러나 차이콥스키의 마지막 교향곡을 자주 지휘한 그가 이를 의식하지 않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비창 교향곡 자체에 대해 말러는 ‘피상적인 곡’이라는 부정적인 생각을 나타낸 것으로 알려졌다. 만약 그에게 직접 물어보았다면, ‘구조 자체는 마음에 들었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래서 내 마음에 드는 나만의 버전으로 이 구조를 응용하고 싶었다’고 답하지 않았을까.
글 유윤종 음악평론가, 전 동아일보 문화전문기자
두 ‘비창’에 대해 더 깊이 알고 싶다면
9월 17일 오후 7시 30분 |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베르디 ‘운명의 힘’ 서곡,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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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5일 오후 7시 30분 | 금호아트홀 연세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8번 ‘비창’, 19번, 23번 ‘열정’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