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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8월호

“제가 햄릿이 될 수 있을까요?”

1989년 전미 아시아계 미국인 극단National Asian American Theatre Company이 유럽과 미국의 고전 희곡을 아시아계 배우만으로 공연하겠다고 창단했을 때, 미국의 연극평론가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비백인 배우들의 출연을 정당화할 수 있는 그 어떠한 아시아적 요소의 첨가도 없이 아시아계 배우들이 (백인의) 고전을 공연하는 것을 쉬이 납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은가? 연기란 본디 타자가 되는 일일진대, 배우와 배역 사이에 가로놓인 무수히 많은 차이 중 어떤 것은 쉬이 용인되고, 어떤 것은 끝내 극복할 수 없다고 여겨진단 말인가? 어떤 몸에게 고전을 연기할 자격이 주어지며, 그것은 누가 결정하는가?

한 사회가 정한 ‘보통’의 자리에서 빗겨 서 있는 존재들이 고전을 무대화한다는 것은 이처럼 첨예하게 정치적인 질의에 미학적으로 답하는 기획이곤 했다. 이를테면, ‘햄릿’이 끊임없이 공연되고 각색되는 것은 고뇌하는 햄릿에게 시대와 문화를 뛰어넘는 어떤 인류 보편의 물음이 담겨있다는 믿음 때문일 터, 햄릿을 연기한다는 것은 설령 자신의 몸이—장애학자 로즈메리 갈런드 톰슨의 용어를 빌리자면—‘보통이 아닌 몸extraordinary bodies’으로 여겨진다고 할지라도 그 모습 그대로 ‘보편’을 품을 수 있다고 선언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지난 5월 모두예술극장에서 여덟 명의 다운증후군을 가진 배우들이 무대화한 페루 극단 테아트로 라 플라사Teatro La Plaza의 <햄릿>은 바로 이러한 맥락의 정치적 기획인 동시에 햄릿의 낡은 질문을 다시금 이 시대의 살아 있는 물음으로 되살린 미학적 실천이었다.

라 플라사의 <햄릿>은 압도적이었다. 공연 직후 예술가와의 대화에서 한 관객이 고백한 것처럼, 이번 <햄릿>은 나에게도 “내가 본 <햄릿> 중 최고”였다. 다운증후군 배우들의 연기에 대한 경험이 많지 않기 때문에 배우 각각의 연기에 대해 세세하게 논할 수는 없겠지만, 그러니까 오롯이 나의 부족함 때문에 이렇게 일견 과장되게 느껴지는 문장밖에는 떠올리지 못하지만, 주저함을 이기는 여전한 감격에 기어코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나는 라 플라사 배우들에게 설복되었다! 그리고 강조하건대, 그것은 이 배우들이 ‘다운증후군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연기를 선보였기 때문이 아니다. 굳이 다운증후군과 연기를 연결 짓자면, 오히려 이들의 성취는 다소나마 다운증후군 덕분이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1966년, 21번 염색체가 두 개가 아니라 세 개인 ‘특별한 상태’를 발견하고 자신의 이름을 따 다운증후군이라고 명명한 의사 존 랭던 다운에 따르면, 다운증후군을 가진 사람들은 “흉내쟁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모방 능력이 꽤 뛰어나다”고 하니 말이다.

허나 다운 박사가 일찍이 남긴 관찰의 기록들은 조심스럽게 독해될 필요가 있다. 장애인으로 불리기 이전에 우선 사람으로 존재하기를 원한다는 의미를 담은 ‘사람 중심 언어people-first language’가 상기하듯, 다운증후군은 ‘다운증후군을 가진 사람people with Down syndrome’을 이루는 수많은 특성 중 하나일 뿐이다. 게다가 라 플라사의 <햄릿>은 결코 ‘모방’의 시도가 아니며, 그 점은 극 중 반복적으로 강조된다. 먼저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로 시작되는 햄릿의 그 유명한 독백을 리허설하던 순간을 재현하는 장면을 살펴보자. 배우 하이메 크루스는 이 독백을 연습하던 중, 리허설 과정에서 배우들이 흔히 겪는 불안과 초조 속에서 영국의 노장 배우, 이언 매켈런과 짧은 대화를 나눈다. 아마도 하이메의 상상일 이 대화는 그가 모르지는 않으나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제가 햄릿이 될 수 있을까요?”라는 하이메의 물음에 매켈런은 “직접 해 봐야 안다”고 답하나, 세부적인 연기 조언을 구하는 질문에는 ‘햄릿 연기의 정전’이라고 불리는 로런스 올리비에를 언급하니 말이다. 대화 직후, 하이메는 올리비에의 영화 속 독백 장면을 틀어놓고 올리비에의 연기를 따라 하는데, 하이메의 흉내내기가 우스꽝스럽게 이어지자 배우 알바로 톨레도가 하이메를 중단시킨다. “연기는 흉내 내는 게 아니”라고, “우리는 우리만의 프로젝트가 있다”고.

ⓒAurora Nova

기실 라 플라사의 <햄릿>은 배우들의 고유한 특성으로서 다운증후군은 한순간도 생략될 수 없다고 유쾌하지만 단호하게 선언하는 프로젝트다. 이를테면 극중극인 ‘쥐덫’ 장면. 나무와 달과 뱀 연기를 위해 객석에서 자원자를 받아 이어간 이 장면에서조차 라 플라사의 배우들은 “우리”가 빠지면 안 된다며 참여 관객들에게 “다운증후군이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법을 안내한다. 더 나아가 공연 전반, 배우들의 다운증후군은 <햄릿>에 의해 감춰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햄릿>의 이야기와 중첩되며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극을 열며 하이메는 자신을 ‘햄릿을 연기하는 하이메’, 즉 ‘하이멜릿’이라고 소개하는데, 이는 무대 위 그가 지금—공연예술학자 리처드 셰크너가 배우의 배역 되기 과정을 ‘not-not-me’라는 용어로 설명했듯—‘하이메 자신’이면서, 동시에 ‘하이메가 아닌 햄릿’, 그러면서도 ‘하이메가 아닌 것도 아닌 존재’라는 뜻일 터다. 하이메의 삶은 햄릿의 숙부 클로디어스처럼 자신을 “멍청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때문에 힘겹지만, 오필리아처럼 “부모님 말씀을 너무 잘 듣는 것”만 제외하면 “결함이 전혀 없는 연인”이 있어 행복하다. 하이메의 삶은 햄릿의 이야기에 침투하고, 햄릿의 이야기는 하이메의 삶을 환기하는 것이다.

오필리아와 오필리아 역의 배우(들)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원작에서 오필리아의 아버지 폴로니어스가 오필리아를 마냥 철부지 아이처럼 대하는 장면이 배우들에게 부모와의 관계를 떠올리게 하듯, 폴로니어스 역의 마누엘 가르시아는 오필리아 역의 시메나 로드리게스에게 말한다. “넌 정말 아이 같구나. 넌 남들과 달라. 내가 널 늘 돌봐야 하잖아. 넌 남들과 다르니까.” 다운증후군을 가진 이들을 “영영 자라지 않는 아이”처럼 바라보는 사회의 편견 어린 시선 그대로, 아버지가 딸에게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누구나 그러하듯—각자 다른 속도와 다른 방향으로 자라왔고, 계속 그렇게 변화하며 존재하길 원한다. 극의 말미, 세 명의 여자 배우가 오필리아를 경유하여 ‘사랑’, ‘독립’, ‘아이’라는 각자의 꿈에 대해 들려주는데, 이는 마치 그리 일찍 죽지 않았다면 오필리아가 읊조렸을 법한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독백처럼 들린다.

그렇다. 이 프로젝트의 시작이 되었다는 햄릿의 독백은 더 이상 햄릿만의 것이 아니다. “이 연극의 모든 배우는 햄릿이다”라는 대사가 함축하듯, “죽느냐, 사느냐”는 모든 배역의 토로이며, 모든 배우의 고백이다. 라 플라사의 배우들이 햄릿의 이야기와 자신의 삶을 중첩해 무대 위에 새긴 물음이다. ‘보통이 아닌 몸’이라고 간주되어온 몸들이 인류 보편의 물음을 그렇게 품었다. 자, 어떠한가? 당신은 햄릿의 물음과 무관한 삶을 살아왔는가? 그렇게 예외적인 몸이 있을 수 있을까? 보편을 품을 수 없는 몸이? 라 플라사의 배우들은 <햄릿>을 읽고, 자신들은 예외가 아니라고 말했다. 이제, ‘하이멜릿’의 독백을 읽고, 당신이 답할 차례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내면의 고통을 견디는 것과 고난에 맞서 싸우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고결한가? … 죽음 이후를 생각하면 그저 두려울 뿐. 우린 죽음보단 차라리 고통을 택하지. … 우린 왜 견디는 걸까? 세상의 폭력을, 사랑의 모욕을, 기본권의 부재를. 우리가 익숙한 악을 견디는 건 미지의 세계가 두려워서일까?”

전영지 공연 칼럼니스트·드라마터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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