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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8월호

푸른 계절의 추억

서울국제도서전에 갔다가 『여름어 사전』2025(아침달)이라는 책을 샀다. 여름이면 떠오르는 단어를 골라 기존의 뜻을 넘어 자기만의 이야기로 풀어낸 책이다. 이 책의 ‘뭉게구름’이라는 항목은 뜻밖에도 이렇게 시작한다. “앞날이 깜깜할 때 하늘을 올려다본다. 꿈이 가슴을 뚫고 솟구친들 생활보다 커다래질 수는 없구나.” 글을 읽다가, 어쩐지 막막한 기분이 드는 비가 쏟아지는 7월의 하늘을 바라본다.

여름이 되기 전에는 여름이 그리웠다. ‘쨍한 햇살, 부서지는 파도, 높고 푸른 하늘에 떠가는 뭉게구름의 계절’이라는 기억으로 겨울을 보냈는데. 온몸이 끈적거리고, 기운은 안 나고 뭘 해도 재미가 없다. 그래서 여름에는 여름이 더 간절해진다, 그리워진다. 여름이 힘든 여름에는 영화 속에 존재하는 관념적 여름에 흠뻑 취해보기로 한다. 맥주 한 캔이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여름철 영화 플레이리스트를 틀어본다. 일본 드라마 <롱 베케이션>이나 영화 <녹색광선> 또는 <리틀 포레스트>나 애니메이션 <시간을 달리는 소녀> 같은 작품들이 떠오른다. 이번에는 <애프터 양>2021이 가장 좋겠다.

코고나다Kogonada 감독의 <애프터 양>은 사방이 푸른 계절을 배경으로 한다. 푸르른 계절에 일어나는 결정적 상실의 경험을 둘러싼 이야기가 <애프터 양>을 가득 채우는데, 그 중심에는 안드로이드인 ‘양’이 있다. 제이크와 키라 부부는 중국인 딸 미카를 입양했다. 미카가 자신의 문화적 배경을 자연스럽게 익혔으면 하는 마음에, 아시아인의 외양에 중국 문화와 역사에 대한 지식이 내장된 안드로이드를 구매해 ‘양’이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영화가 시작하면 가족과 잘 지내던 양의 작동이 곧 멈춘다. 양을 수리하려는 가족의 노력이 시작되지만 여의치 않다. 수리 과정에서 제이크는 양의 기억장치에 접근하게 되고, 이미지와 사운드로 이루어진 양의 기억을 들여다보게 된다.

안드로이드인 양의 기억은 신비하다. 인간이 설계하지 않은 기억이 남고, 기억을 통해 감정이라고 부를 수 있는 무언가가 생겼음을 알 수 있다. 가족사진을 찍는 장면은 양의 시선을 통해 다시 한번 보이는데, 어쩌면 인간보다도 더 기억의 가치를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감각을 통해 기억이 자리잡게 되는 방식, 푸른 계절의 추억이 소중하게 여겨지는 과정을 경험하며 뭉클함을 느끼게 된다.

우리가 여름을 기억하는 방식을 떠올려보자. 있는 그대로를 경험하고 경험한 그대로를 기억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단일한 경험조차 기억 속에서는 떠올리는 순간의 감정 상태에 따라 다른 뉘앙스로 다가온다. 경험할 땐 지긋지긋한 순간들조차 기억 속에서는 순하게 다정하고 아름다워진다. 별 의미 없던 행동이나 말이 때로는 그 순간 스친 청량한 바람 때문에 산뜻하고 선명하게 기억되기도 한다. 있는 그대로를 기록하는 것보다 어쩌면 기록되지 않은 것들을 마음속에서 되새기는 동안 더 아름답거나 더 슬프거나 혹은 더 애틋해지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이제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아 없던 무언가를 만들어내거나 찍어놓은 기록을 보정하는 방식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기록 속의 여름은 한없이 청량하거나 맑을 뿐인, 생명력으로 가득한 무언가가 되는지도 모른다. 거기에 그리움이 싹튼다.

<애프터 양>이 가진 특유의 여름 인상에는 이와이 슌지 감독의 <릴리 슈슈의 모든 것>에 쓰인 곡 ‘Glide’를 사용한 것 역시 한몫한다. 십 대 아이들의 푸르르고 잔혹한 시간을 담아낸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의 음악이 흐를 때, 세상의 일부가 된다는 것에 대한 저마다의 불균질한 답을 경험으로 알아갈 때, 외로움은 깊은 우물을 만들어낸다. 함께한 시간조차 기억 속에서 혼자됨의 경험이 될 수 있다. 우리는 타자를 온전히 알 수 없고 더 솔직하게는 자기 자신조차 제대로 알기 어렵다. 그러한 ‘거리’가 양의 기억을 살피는 우리의 시선을 잡아끈다.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들을 사실 우리는 제대로 알지 못했다. 기억은 존재의 고유한 증명 방법이 된다. 양은 한 번에 오직 3초만을 녹화할 수 있다. 그러한 한계 때문에 우리는 양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무엇인지 알게 된다. 양이 사실은 작은 것에 집중하고 있음을 알게 될 때 당신의 안에 있는 무언가가 울림을 경험했을까.

<애프터 양>에서 제이크는 양의 의식과 목소리를 백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것은 양을 복원하는 하나의 방법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제이크는 그를 보내주기로 한다. 코고나다 감독은 인터뷰를 통해 “제이크가 자신의 삶에서 의미를 찾아내기 위해 조용히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양은 고장났고, 그 무엇도 다시 되돌릴 수 없게 되었지만, 양의 기억은 제이크를 조금은 바꾸어놓는다. 그는 보이지 않던 것들의 아름다움을 알아차리고, 딸과 가족이 있는 풍경이 주는 일상적 비범함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 추구할 만한 것, 기억하고 기릴 만한 경이는 멀리 있지 않다는 깨달음을, 비인간을 통해 체험해나간다. SF 장르의 매혹 중 하나는 거기 있을 것이다. 인간됨의 지긋지긋함, 반복되는 일상 속 어느새 빛바랜 (한때 특별했던) 경험들을 새롭게 다시 경험하는 일은 비인간의 몸을 통한 기억을 통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다시, 여름으로 돌아가자.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애프터 양>에서 계절은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는다. 다만 사방이 푸르르고, 기억 속 풍경도 언제나 푸르르다. 미카는 한창 자라고 있고, 아직 상실이 무엇인지 모른다. 양의 기억 속 가족의 모습이 그러했듯이 미카의 기억 속 양이 있는 풍경은 언제나 녹음이 짙은 여름 모습 그대로일 것이다. 기억 속에서는 모든 게 한창이어서, 세상을 떠난 존재로 언제까지고 살아있을 수 있고, 슬픔도 괴로움도 고통도 언제나 현재 진행형이다. 양에게 저장된 기억은 이제 제이크의 것이 되었고, 제이크의 삶만큼 조금은 더 연장될 것이다. 양을 복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억의 수명은 이제 제이크의 그것만큼으로 한도를 부여받았다. 삶의 한복판에서 죽음을 생각하기. 여름에 가장 하기 좋은 일은 그것일지도 모른다. 아직은 그 모든 소멸이 아주 멀게 느껴지니까. 푸르른 녹음 속에서.

이다혜 작가·씨네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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