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피는 봄날이여,
영원하라
LG아트센터 서울로 향하는 길, 지하철
9호선 마곡나루역에 내려 안내판을 따라
전용 출입구로 들어서면 꽃이 사람보다
먼저 나와 반긴다. 애틋하고 아련한
봄꽃을 영원토록 묶어둔 곳. 지하 2층에서
극장 1층 로비까지 이어지는 계단 ‘스텝
아트리움’이다. ‘환승 계단’이라 불러도
좋을 곳이다. 부대끼던 일상을 벗어나
여기서부터 예술의 공간이 시작되니까.
자유롭게 핀 야생화처럼, 3층 객석까지
탁 트인 층고 24미터의 공간을 차지한
스무 송이의 꽃은 네덜란드의 작가 듀오
스튜디오 드리프트Studio DRIFT의 작품
<메도우Meadow>다.
꽃이 스르르 벌어졌다 이내 오므라든다.
피고 지는 꽃은 저마다의 속도를 가진다.
얼른 피어 빨리 저무는 꽃이 있는가 하면,
조금 더디 피어 오래 버티는 꽃도 있다.
여수 오동도, 거제 지심도에 동백꽃 필
무렵이 한반도 봄의 시작이다. 남풍이
매화를 터뜨리고, 금가루를 뿌려놓은
듯한 산수유가 피기 시작하면 벌써 3월
중순이다. 왕족처럼 고고한 목련은 크고
화려하게 피지만 권력자의 뒷모습인 양
처절하게 떨어진다. 재잘대는 개나리,
고운 진달래가 아쉬워질 때쯤 벚꽃이
흐드러지고 그렇게 봄날은 간다. 붙잡을 수
없는 봄이 이곳 LG아트센터 서울에서만은
영원하다.
스튜디오 드리프트, <메도우>, 사진 조상인
거꾸로 매달린 꽃이 사람들의 움직임에
반응해 움직인다. 작가들이 꽃의 수면
운동에서 착안했다. 꽃은 밤낮의 길이와
주변의 온습도에 반응해 동물의 호흡처럼
스스로 개폐 활동을 한다. 움직임이
미세하고 느릿한 데다 주로 광합성을 하지
않는 밤에 일어나는 일이라 맨눈으로
확인하기 어려운 현상이다.
‘드리프트’는 로네커 호르데인과 랄프
나우타가 네덜란드 명문 예술학교인
에인트호번 디자인 아카데미에서 만나
2007년 결성한 팀이다. 이들은 자연에서
영감을 얻고, 공학적 설계를 더해, 움직이는
조각인 키네틱 아트를 만들어낸다.
작가들이 꽃의 움직임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메도우>를 처음 구상한 것은
2006년이지만 팀을 결성하고
기술적 완성을 이루기까지 꼬박 8년이
걸렸다고 한다.
하늘거리는 스커트를 입고 깡충
뛰어다니다 폴짝 내려앉을 때의
펄럭임처럼 꽃이 옷을 닮았다. 실크로
꽃잎 형태를 만드는 데 100회 넘는
레이저 절단과 40시간 이상의 손바느질이
필요했으니, 흙이 꽃을 피우는 것만큼이나
묵묵한 과정이라 할 것이다. 어떤 꽃은 다른
꽃의 움직임에 따라 피고, 어떤 꽃은 남들이
움직이지 않을 때만 속살을 드러낸다.
그 움직임을 감상하며 자신의 호흡과
심장 박동을 느껴봐도 좋겠다. 자연에서
온 속도감이라 희한하게 맞아떨어진다.
몰입감 높은 작품이라 이른바 ‘꽃멍’ 하기도
좋다.
<메도우>는 전 세계 여러 미술관에서
다양하게 전시된 적 있지만 이곳
LG아트센터 서울의 작품에는 특별함이
추가됐다. LG상록재단이 운영하는
생태수목원 화담숲에서 자라는 우리
토종 꽃 7종의 색을 작품에 반영한
것. 미선나무와 남산제비꽃의 흰 빛,
탐라산수국의 백자색, 섬기린초의
연노랑과 진달래의 분홍, 꽃창포의
보라색과 두메부추의 자주색이 은은한
색감의 원천이다.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하지 않고 계단을 걸어 오른다면
꽃잎이 활짝 벌어졌을 때 그 안의 빛이
햇살처럼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LG아트센터 서울은 강남에서의 22년
역사를 접고 2022년 10월 지금의
강서구 마곡동에서 재개관했다. 공연장
건물은 세계적 건축 거장 안도 다다오가
설계했다. 노출 콘크리트와 투명 유리로
이뤄진 건물은 안도의 시그니처다.
화려하지 않지만, 묵직한 힘이 느껴지는
외관이다. 매달린 꽃 작품이 매혹적인 스텝
아트리움이 건물 아래위를 수직적으로
연결한다면, 1층 로비를 관통하는 80미터
길이의 터널 ‘튜브’는 남북을 수평으로
잇는 개념이다.
LG아트센터 서울 ‘튜브’, 사진 제공 배지훈/LG아트센터 서울
건축가는 콘크리트로 건물을 지으면서
튜브 공간만 나무로 조성했다. 폭이 어른
엄지손가락 길이만 한 나무를 15도 정도
기울여서, 13.8미터 높이의 길쭉한 타원형
단면을 촘촘히 채웠다. 큰 고래의 갈비뼈가
느껴지는 뱃속에 들어앉은 듯, 신비로운
분위기와 엄마 뱃속 같은 안온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나무가 흡음재처럼 주변 소음을
쫙 빨아들여 비현실적인 고요를 느낄 수
있다. 내 발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멀어지는
남의 발소리가 남긴 여운이 길게 늘어진다.
끝나버린 공연의 아쉬움을 오래 붙들 수
있는 묘한 공간이다.
LG아트센터 서울의 설계자 안도 다다오는
처음 마곡 땅을 방문했을 때 방대한 대지와
자연에 감탄했다고 한다. 자연에서 얻은
영감을 고스란히 담았기에 고층 빌딩
직선 사이에 나지막이 곡선이 살아 있는
건축으로 이어졌다. 자연 안에 예술이,
그 안에 사람이 머무르는 곳이 됐다.
글 조상인 백상미술정책연구소장, 『살아남은 그림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