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 메뉴로 바로가기 본문으로 바로가기
서울문화재단

문화+서울 seoul foundation for arts and culture

검색 창

서울시 동대문구 청계천로 517

Tel 02-3290-7000

Fax 02-6008-7347

문화+서울

  • 지난호 보기
  • 검색창 열기
  • 메뉴 열기

COLUMN

5월호

대한민국 평균 독서량을 높이는
판소리

이자람 판소리 <눈, 눈, 눈> ⓒLG아트센터 서울

소리꾼 이자람이 무대의 막을 올렸고, 관객은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었다. 판소리 공연 한 편을 봤는데, 유명 단편 소설 하나를 뚝딱 읽은 셈이었다. 톨스토이의 단편 ‘주인과 하인’을 각색한 <눈, 눈, 눈>(4월 7일부터 13일까지 LG아트센터 서울)이었다.

공연장에서 읽은, 러시아 문학

아마도 공연장을 찾은 관객들에게 원작 소설을 주고 읽으라고 한다면 완독하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자람이 펼쳐내는 소리 길을 따라 러시아의 시골로, 영하 28도의 추위가 펼쳐지는 이야기 속으로 들어갔다. 이자람이 들려주는 노래와 이야기가 어찌나 재밌던지, 관객들은 톨스토이의 문장에 마음의 연필을 꾹꾹 눌러가며 한 편의 소설을 완독한 셈이다.

러시아 문학이 고전 중의 고전이라 할지라도, 막상 책장을 펼치면 고전을 면치 못하는 경우가 많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가 유명하더라도 1권을 읽고, 2권으로 넘어가는 사람을 보면 놀랍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도 그렇다. 등장인물도 너무 많은 데다가, 이름도 어렵다. 주연의 이름을 명확히 외워 읽을 만하다 싶으면 또 다른 복병이 등장한다. 하여, 주인공 이름을 머릿속에 새겨 넣는 집요한 암기력, 여러 등장인물이 저지르는 사건을 정리해나가는 명료한 정리벽, 한 권을 돌파하고 다른 권으로 들어가는 의지력이 결합해야 비로소 러시아 문학의 ‘위대한 독자’가 탄생한다.

이자람은 이러한 난제를 파악했다. 러시아 문학 이야기를 들려주는 영업 방식(?)도 명료하다. “이름이 어려우니 간단히 ‘바실리’라 하겠소!” 소설을 읽어가며 주인공의 캐릭터와 성격을 잡아가야 하는 독자의 수고도 덜어준다. “하인 니키타는 이러이러한 생김새에, 이러저러한 일들이 있어 요러 저러한 성격의 소유자요!” 톨스토이의 문장과 행간을 구워삶은 이자람 덕분에 공연장 ‘관객’들은 책을 펼친 ‘독자’가 됐다. 대한민국이 해마다 통계 내는 평균 독서량이 올라간 순간이었다.

소리 내어 읽어주는, 소리꾼

흔히 판소리 예술가를 소리꾼이라 부른다. 전통 성악가라고 하는데, 소리꾼이나 성악가나 노래를 부르는 음악가로 분류할 때 쓰는 말이다. 하지만 그들의 역사적 계보를 따라가면 조선 시대에 ‘전기수’라는 직업이 있다. 전기수란 재밌는 이야기책을 기묘한 솜씨로 읽어주는 이였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소설을 낭독하고 돈을 받는 이들이었으니, 조선판 버스커라고도 할 수 있겠다.

조선 후기 문인 조수삼의 글을 엮은 문집 『추재집秋齋集1939에는 전기수에 관한 기록이 전하는데, 이야기를 ‘파는’ 그들의 영업 방식은 지금 보아도 놀랍다. 당시에는 소설이 수적으로 증가하며 소비자가 늘었다. 너도나도 그 소설, 더 정확하게는 그 ‘이야기’ 들어봤냐는 유행이 퍼졌을 것이다. 지금으로 따지면 그 드라마 봤냐 못 봤냐는 것과 동일하다. 그러면 어느 날 전기수가 그 지역에 뜬다. 지금으로 따지면 OTT 플랫폼을 구독할 기회다. 목 좋은 곳에 앉은 그는 하나의 소설을 골라 읽는데, 조수삼은 그 광경을 이렇게 기록했다.

“월초 1일은 첫째 다리 밑에 앉고, 2일은 둘째 다리 밑에 앉고, 3일은 배오개에 앉고, 4일은 교동 입구에 앉고, 5일은 대사동 입구에 앉고, 6일은 종루 앞에 앉는다. 이렇게 거슬러 올라갔다가 7일째부터는 그 길을 따라 내려온다. 내려왔다가는 다시 올라가고,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와 그달을 마친다. 다음 달도 또 그렇게 하는데 재미있게 읽어주기 때문에 주위에 구경하는 사람들이 빙 둘러싼다. 전기수는 책을 읽다가 아주 긴요하여 꼭 들어야 할 대목에 이르러서는 문득 읽기를 멈춘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다음 대목을 듣고 싶어서 다투어 돈을 던진다. 이것을 요전법(돈벌이 하는 방법)이라고 한다.”

이야기를 얼마만큼 재밌게 펼쳐내느냐도 중요했지만, 중요한 순간에 어떻게 끊느냐도 중요했다. 과거 신문의 연재소설이나 공중파 드라마는 늘 중요한 순간에 끊어져, 다음 화를 기대하게 했다. 가판대에서 구매한 신문을 구입하자마자 연재 소설란을 제일 먼저 펼치는 사람은 이러한 상술에 기분 좋게 속은 사람들이었다.

전기電氣가 흐르는 곳마다, 전기수傳奇?가 있다

오늘날의 소리꾼들은 전기수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조선의 전기수가 대본을 잘 골라야 했듯, 현재의 소리꾼도 재미난 이야기를 담은 소설을 골라야 한다. 루리 작가가 2021년 펴낸 소설 『긴긴밤』도 2022년 판소리 <긴긴밤>으로 나와 독자를 관객으로 변신시켰다. 현대의 전기수 덕분에 문학사에서 잠을 털고 나온 소설도 있었다. 이자람이 연출한 주요섭의 단편 1925년 작 ‘살인’과 1936년 작 ‘추물’이었다. 이 외에 소리꾼 이승희는 김애란의 단편 ‘여보세요’, 판소리공장 바닥소리는 김탁환의 역사소설 ‘가시리’, 지기학은 황선미의 대표 동화 ‘마당을 나온 암탉’, 안이호는 임채묵의 단편 ‘야드’를 판소리로 만들어 소리꾼과 전기수의 계보를 맞닿게 했다.

현대판 전기수는 공연장에만 있는 게 아니다. 전기수는 ‘전기’가 흐르는 스마트폰, PC와 웹에도 존재한다. 책 한 권을 낭독해주는 콘텐츠 말이다. 현대인의 책 읽기 귀찮음과 교양에 대한 갈망이 만들어낸 현대판 전기수들이다. 잠들면서 들으라고 고전 문학을 낭독하는 유튜버도 있고, 맨날 잠이 드는 바람에 앞부분만 10번 이상 들었다는 청취자와 댓글도 있다.

이처럼 독자들이 ‘묵독’으로 소비한 국내외 문학이 낭송자들의 ‘낭독’을 통해 다가온다. 책장을 펼치지 않아도, 단순히 보면 국내 평균 독서량이 꾸준히 오르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판소리-ASMR’도 일조하고 있다.

글 송현민 음악평론가

위로 가기

문화+서울

서울시 동대문구 청계천로 517
Tel 02-3290-7000
Fax 02-6008-73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