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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12월호

한껏 낭비해야
닿게 되는 세계

폴란드 연출가 예지 그로토프스키Jerzy Grotowski는 한 인터뷰에서 “연출가란 연출 이외의 분야에서 실패한 뒤 연극인이 된 사람”이라고 말한 바 있다. 물론 이 말은—여느 연극 대사들이 그러하듯—사실을 기술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위해 동원된 그럴듯한 수사修辭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기실 연출가뿐 아니라 거의 모든 분야의 연극 작업자들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그 직업을 가지게 되었는지 종종 질문받고, 그런 까닭으로 자기 나름의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두곤 하는 듯하다. 특히 프로덕션의 내부 비평가, ‘드라마터그dramaturg’는 연출가나 배우·극작가보다 훨씬 생소한 명칭인지라 더욱 많은 질문에 노출되는 편. 그럴싸한 이야기를 해 보겠다고 거창한 수사를 동원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대충 얼버무려 ‘드라마터그’를 시시하게 만들 수는 없는 일인지라 오래도록 생각해본 결과, 과시도 겸양도 없이 이렇게 말하고 싶다. 연극을 보는 것만큼 연극을 만드는 과정을 즐거워하는 연구자가 ‘드라마터그’가 된다고.

프로덕션이 주는 기쁨이 무엇인고 하면, 이 또한 한 가지는 아니겠지만 나는 무엇보다 ‘발견의 희열’을 꼽고 싶다. 관련 자료를 찾아 읽고, 프로덕션 구성원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청취하는 과정에서 축적되는 질문과 해석을 경유하여 희곡을 되짚어 읽는 일을 반복하다 보면, 꽤 잘 알고 있다고 믿었던 작품에서조차 예상치 못한 발견이 일어나곤 하는데, 그 순간의 짜릿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제아무리 큰 기쁨이라 해도 금세 잊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네의 일. 손턴 와일더Thornton Wilder의 ‘우리 읍내Our Town’가 돌아보게 하는 것이 바로 이처럼 너무도 빨리 지나가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마는 일상의 경이인바, 최근 경기도극단의 <우리 읍내>(11월 16일부터 24일까지)에 참여하며 경험한 발견의 기쁨은 휘발되기 전 서둘러 붙잡아 이 지면에 담아 볼까 한다.

‘우리 읍내’는 1938년 초연 이후 전 세계 무대에서 꾸준하게 공연되고 있는 ‘현대의 고전’ 중 하나로, 연극 전공자라면 모르기 어려운 작품이다. 간단하게 소개하자면, 그로버스 코너스Grover’s Corners라는 가상의 마을을 배경으로 20세기 초 그 마을 사람들의 소박한 일상이 펼쳐진다. 아침이면 신문과 우유를 배달하는 사람들이 오가고, 등하교 시간이면 아이들 소리로 온 마을이 소란해지며, 저녁이면 교회 성가대 연습을 하거나 책을 읽고, 밤이 되면 함께 산책하거나 까닭 없이 설레는 마음에 늦도록 달구경을 하는, 그런 특별할 게 없는 일상이 ‘우리 읍내’가 그리는 생의 풍경이다. 변화라면, 1막에 함께 등교하고 함께 숙제하던 에밀리와 조지가 그로부터 3년 후인 2막에선 결혼을 하고, 다시 9년 후인 3막에선 그중 한 명이 이른 죽음을 맞이한다는 정도뿐. 하여 ‘우리 읍내’를 소개하는 글에는 으레 ‘평범한 삶과 일상’이라거나 ‘보편적인 삶의 진리’라는 표현이 등장하곤 한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평범’이나 ‘보편’은 묘사가 아니라 평가와 배제의 언어다. 무엇을 ‘평범’이나 ‘보편’이라고 말하는 순간, 그와 다른 모든 것들은 다소 이상하거나 부족한 존재로 낙인되고 마는 것. ‘우리 읍내’의 한 대목을 예로 들면, 가장 비중 있는 등장인물로서 시공간의 경계를 넘나들며 이야기를 지휘하는 ‘무대감독’은 “결혼이야 대부분 하는 거지만, 우리 읍내에선 정말 예외가 없다”며 “거의 모든 사람이 기혼자로 임종을 맞이한다”고 말한다. 마치 ‘우리 읍내’의 ‘평범’과 ‘보편’은 이성애 법률혼 중심의 ‘정상 가정’뿐이라는 듯 말이다. 여기에 반복적으로 들려오는 찬송가 소리까지 합쳐지면, ‘우리 읍내’가 그리는 ‘평범’과 ‘보편’이란 어쩌면 그저 지극히 보수적인 ‘앵글로색슨계 백인 신교도WASP의 이상’일 뿐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일기도 한다.

실제로 이러한 의심이 나만의 것은 아니었는지, 극작가이자 예일대학교 교수인 도널드 마굴리스Donald Margulies는 2003년 하퍼 퍼레니얼 모던 클래식스Harper Perennial Modern Classics에서 출판한 『우리 읍내』의 서문에 다음과 같이 썼다.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손턴 와일더는 자신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현대 대중에게 구시대적 가치를 설교하는 영원한 스승으로 남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한때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다고. 앞서 인용한 ‘무대감독’의 대사처럼 당위를 기술하는 듯한 문장들을 따라 읽다 보면 이 작품 전체가 한편의 ‘시대착오적 설교’ 같다는 인상을 받게 되는 것이다.

허나 등장인물의 말이 언제나 그 인물의 진심인 것은 아닐뿐더러 더더욱 작가의 생각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것도 아니다. 기실 프로덕션을 준비하며 나는 와일더가 ‘무대감독’이 ‘거의 모든 사람의 삶의 방식’이라고 묘사한 대로 살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75년 일흔여덟 살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사망한 와일더는 평생 결혼하지 않은 것. 와일더 본인은 “너무 바빠서 그저 결혼을 건너뛴 것뿐”이라고 말했다고 하지만, 그가 죽은 후 소설가이자 영문학자이며 타투 아티스트였던 사무엘 스튜어드Samuel M. Steward가—와일더가 ‘우리 읍내’를 집필하던 당시—자신이 와일더와 연인 관계였다고 밝히면서, 와일더가 끝내 결혼하지 않은 까닭에 대한 또 하나의 가설이 제기되었다. 진실이 무엇이든 분명한 것은, ‘무대감독’의 입을 빌려 ‘대부분의 사람이 하는 일’이자 자신이 만든 가상의 마을에서는 ‘더더욱 예외가 없는 일’이라고 말한 ‘결혼’에서 정작 와일더 자신은 ‘예외’였다는 점일 터다.

새로운 발견을 마음에 품고 ‘우리 읍내’를 다시 읽으니, 모든 평서문이 의문문으로 다가왔다. 작품 전체가 ‘평범하고 보편적인 삶’ 속에 안온하게 기거할 수 없었던 예술가가 ‘삶과 죽음’에 부친 거대한 물음표처럼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작가에 대한 정보 없이도 ‘우리 읍내’는 질문으로 읽힌다. 질문이 아니었다면, ‘모든 것은 한갓 연극일 뿐’임을 강조하는 ‘극장주의theatricalism’ 형식은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시대착오적 설교’라는 오해는—극의 마지막 에밀리가 토로하듯—숨 가쁘게 흘러가는 일상 속 서로를 바라볼 시간조차 없어 생긴 것일 뿐일지도 모른다. 나 또한 프로덕션에 참여하고서야 선뜻 내어놓을 수 있었던 그 시간이 아까워, 말만을 좇아 읽다 등장인물의 말에 속아버리고 마는 것이다.

사실 말의 외피와 진의 사이의 거리를 끊임없이 확인하며 타자의 세계에 온전히 닿아보겠다는, 이를 위해 기꺼이 시간을 낭비하겠다는 마음을 먹는 일은 좀처럼 쉽지 않다. 이 시대 대중 서사에 내레이션이 빼곡한 것도 그런 마음을 사치스럽다고 여기는 효율성 강박 때문일지도 모른다. 실로 동시대 서사의 주인공들은 자신의 마음을 투명하게 알고 있다는 듯 독백하고, 독자·관객은 그 말을 고스란히 믿는 듯하다. 그러나 정말 우리가 그렇게 말하던가. 자신의 마음을 정확하게 알지 못해서든, 목적을 위해서는 일정량의 거짓이 필요해서든, 진실이나 진심과는 꽤 거리가 먼 애매모호한 말들만을 쏟아내지는 않던가. 말이란 본디 지극히 불투명한 것이 아니던가.

‘우리 읍내’를 읽고 또 읽으며 생각했다. 대부분의 희곡은 입말로 쓰이지만, 희곡이야말로 말이 얼마나 믿을 수 없는 것인지를 정확하게 간파하는 장르라고, 좋은 고전 작품은 참으로 대범하게 그 불투명한 말로 끝내 모를 타자의 세계를 끝끝내 대면하게 한다고. 그리 길지도 않은 텍스트 하나를 한 계절 붙잡고 읽으면서 기꺼이 비효율을 택할 때만 닿게 되는 세계가 있다고, 아마도 타자의 세계란 언제나 그러하리라고 되뇌었다.

글 전영지 공연 칼럼니스트·드라마터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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