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아름다운가
막스 리히터Max Richter의 새 앨범 “In A Landscape”의 여섯 번째 트랙 제목은 ‘Life Study III’다. 누군가의 휘파람 소리, 대화 소리, 걷고 있는 듯한 소리가 아주 먼 곳에서 들려오듯 거리감을 둔 채 울리다 바람 같은 무언가와 함께 뒤엉키며 모호하게 사라진다. 바로 다음 트랙은 ‘The Poerty of Earth (Geophony)’. 피아노의 아르페지오 위에 천천히 포개지는 현악기의 선율이 아름다운 자연의 장면들을 넉넉하게, 때로는 쓸쓸하게 포착한다. 막스 리히터에게 많은 사람이 기대하는, 포스트 미니멀리즘의 전형이 된 반복되는 모티프, 어렵지 않은 화성 진행을 특징으로 하는, 그러나 여전히 마음을 움직이는 마법 같은 음형들이 춤을 춘다. 다시 산업 기계의 소음을 떠올리게 하는 ‘Life Study IV’라는 새로운 트랙이 연결된다. 앨범의 긴 서사 중 가장 좋아하는 한 대목이다.
이번 앨범은 문학 장르에 비유하자면 자전적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발칸반도의 코소보 분쟁을 다룬 ‘Memoryhouse’2002, 이라크 침공에 항의하는 ‘The Blue Notebooks’2004처럼 그 목적을 뚜렷하게 드러내지는 않지만, 열 곡의 음악 사이사이 아홉 개의 앰비언트 간주곡을 배치한 구성으로 막스 리히터는 새로운 메시지를 드러낸다. 리히터는 파트너이자 비주얼 아티스트인 율리아 마르와 함께 옥스퍼드셔 지역에 설립한 친환경 스튜디오에서 이 앨범을 작곡하고 녹음했다고 한다. 스튜디오 주변 숲에서 녹음한 소리, 세계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수집한 소리를 뒤섞음으로써, 어쿠스틱 악기와 전자 장치를 한데 가져옴으로써,in a landscape 어떤 풍경으로 들어가기도 하고,inner landscape 내면에 침잠하기도 한다. 일상과 상상을 번갈아 오가며, 삶과 음악 활동 전반에서 주요하게 여기는 하나의 질문을 상정한다. 무엇이 아름다운가.
이 앨범을 한참 들으며, 최근 재개봉한 영화 <타인의 삶>2007을 우연히 보며 주인공 비즐러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타인의 일상을 들음으로써 변화되는 나, 나를 감화시키는 어떤 예술, 어떤 삶. 비즐러와 나, 그리고 막스 리히터와 드라이만 부부가 겹쳤다.
<타인의 삶>은 2007년 영화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5년 전인 1984년경 동독을 배경으로 한다. 국가 정책에 헌신하는 일을 삶의 최우선으로 둔 채 단조롭고 건조한 일상을 꾸리던 비밀경찰 비즐러는 예술가 부부를 감시하는 도청 업무를 맡으며 서서히 변화되어 간다.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가치 있는 예술 작품을 선보이며, 가치 있는 삶의 태도를 유지하며 살아가려 애쓰는 드라이만-크리스타 부부의 삶을 일종의 연극 무대를 관람하듯 몰래 지켜보며 비즐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삶의 방향성을 바꾸어 간다. 촉망받던 대학교수에서 우편물 관리직으로 강등되는 결말은 세상의 기준으로는 불행이지만, 우편물을 실은 작은 수레를 끌고 걸어가는 비즐러의 걸음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
“In A Landscape”의 11번 트랙 ‘Late and Soon’은 윌리엄 워즈워스의 1802년 소네트에서 가져온 제목이다. “The world is too much with us; late and soon/Getting and spending, we lay waste to our powers; Little we see in Nature that is ours(세속의 일이 너무나 많다, 늦고 또 이르다/벌어들이고 써버리면서, 우리는 우리가 가진 힘들을 스스로 파괴해 버린다/우리는 우리가 가진 자연을 거의 보지 못한다)” 산업사회의 물질주의를 한탄하며, 본질을 잃어버린 채 점점 산만해지는 현대인을 떠올렸다고, 리히터는 ‘애플 뮤직’과의 인터뷰에서 밝힌다. 이 곡은 어둡고 음울한 분위기를 자아내지만, ‘Life Study V’와 ‘Life Study VI’의 트랙 사이에서 하나의 장면처럼 펼쳐졌다 사라진다. 현대의 우리는 거대한 모순을 끌어안은 채 비극 속에서 살아가지만, 이는 일상의 소소함과 소란스러움에 가려 잊히기도 한다. 그 일상에서의 태도가, 그 안에서의 생각들이 아름다운 인간을 만든다.
무엇이 아름다운가. 오디오 매거진 ‘정희진의 공부’는 영화 <타인의 삶>을 소개하며 이 질문을 던진다. 정희진 편집장은, 이 영화로부터 떠올릴 주요한 질문은 아름다움에 변화한 ‘인간’이 아니라 인간을 변화시킨 ‘아름다움’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고 말한다.
막스 리히터의 앨범을 반복해 재생하며 이 질문을 곱씹는다. “In A Landscape”라는 제목은 존 케이지의 독주곡에서 따온 것이며, 존 케이지에게 영감을 준 것은 에릭 사티다. 바로크 시대 작곡가와 바흐·슈베르트, 초기 미니멀리즘 작곡가로부터 리히터가 떠올린 영감의 조각들을 앨범에서 발견하다 보면, 무엇이 아름다운가, 라는 질문에 대한 리히터의 오랜 고민을 발견할 수 있다. 이야기가 고조되거나 발산되는 법이 없어 긴장이나 이완, 카타르시스 같은 것은 느끼기 어렵지만, 매끈한 질감으로, 부드러운 방식으로 하나의 안온한 공간을 마련하는 앨범이다.
‘아름다운 건 나 자신’이라는 메시지가 유행하는 시대에 있다. ‘나’도 중요하지만 나를 변화시키는, 우리를 변화시키는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생각함으로써 다음으로 갈 필요가 있다. 새해에는 시간을 들여 스스로 물을 수 있다면 좋겠다. 무엇이 아름다운가.
Max Richter “In A Landscape”
글 김호경 『플레이리스트: 음악 듣는 몸』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