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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11월호

장단의 고수,
판소리고법

기억은 2016년 봄으로 거슬러 간다. 살짝 후텁지근하고 포근한 햇살이 기분 좋은 날이었다. 남산 자락에 만들어진 한옥 마루에서 그를 만났다. 광주 권번에서 소리 공부를 시작하고 1944년 동일창극단을 거쳐 80여 년간 소리꾼으로 살아온 그는 작은 체구에서도 오라가 뿜어져 나왔다. 담담하게 무대를 준비하는 그의 얼굴에 봄날 만개한 꽃처럼 온화한 미소가 피어올라 나도 모르게 따라 웃었다.

“토요일 3시에 국립극장에서 흥보가 완창 공연을 했어요. 그때는 지금처럼 대대적인 홍보를 할 수 있는 시대도 아니었고, 또 가난한 소리꾼이라는 소문도 있었던 터라 내심 걱정하고 있었거든요. 심지어 공연 당일, 설상가상으로 비까지 오는 거예요. 손님이 없는데 어쩌나 하고 마음을 졸이며 무대에 섰는데, 2층까지 객석이 꽉 차 있었어요.” 무대에 함께 오른 고수가 좀 쉬었다가 하라며 소리꾼을 말릴 정도였다고 하니 무대에서 느낀 희열과 관객의 열기를 상상해봄 직하다.(2016년 박송희 명창 인터뷰)

1986년 4월 26일 작은 체구의 여성 소리꾼, 박송희가 국립극장 완창판소리 무대에서 ‘흥보가’를 불렀다. 극장장이던 허규는 김영자·은희진과 함께 그를 미래의 주역으로 소개하며 공연에 의미를 더했고, 최종민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가 박녹주의 제자가 공력이 필요한 소리를 완창하게 된 점에 큰 기대를 표했다. 430석에 달하는 소극장이 관객으로 가득 찼고, 그 모습에 소리꾼은 어느 때보다 큰 감동과 힘을 얻었다고 회고했다. 관객은 수시로 박수치고 웃으며 공연을 즐겼다. 심지어 무대로 뛰어올라 춤을 춘 관객이 있을 정도로 박송희의 첫 완창 무대는 성황을 이뤘다.

예순이 다 된 나이에 연 첫 번째 완창이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성공리에 막을 내렸다는 건 소리꾼뿐만 아니라 공연 기획자들에게도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간과한 것이 있다. 공연 프로그램 북에 이름 석 자 달랑 실렸을 뿐이고, 성황을 알리는 기사에는 언급조차 되지 않았지만, 이 공연을 성공으로 이끈 숨은 히어로가 있다는 것. 소리꾼을 말리며 완급 조절을 맡아준 고수, 고 김동진이다.

소리판의 성패를 오롯이 소리꾼의 실력에 집중해 판단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소리판에서 소리꾼과 고수는 한 팀이다. 아무리 소리꾼이 잘해도 고수가 판을 잘 이끌어주지 않으면 다리 길이가 맞지 않는 식탁처럼 흔들리기 마련이다. 흔들리는 식탁 위에 놓인 것들은 곧잘 쏟아지고 흐트러진다. 소리꾼이 혼신을 다시 소리한대도, 고수의 적절한 북 반주가 있어야 그 소리의 참 매력을 느낄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한마디로 소리뿐만 아니라 고수의 역할이 공연의 성패를 가르는 열쇠가 된다. 1986년의 공연은 회고의 말에서 알 수 있듯 대성공을 거뒀다. 늦깎이 소리꾼과 고수의 환상적 호흡도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다만 고수에 관한 언급이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비록 화려한 수식이나 기록은 없지만, 김동준은 고수로 꾸준히 활약하며 여러 음원과 자료를 남겼다. 북으로 소리의 완급을 조절하고 장단을 휘몰아 좌중을 휘어잡는 장단의 고수高手다운 고수鼓手의 행보였다. 고수에 대한 인정이 온전하지 않던 시절, 김동준이 명고수로 성장하고 활발히 활동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소리를 잘 이해하고 무대 위 소리꾼과 밀접하게 호흡하는 것에 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소리꾼에서 시작된 그의 사사 내력에서 엿볼 수 있는데, 김동준은 13세부터 담양에서 박동실에게 ‘심청가’, ‘적벽가’ 등을 사사해 20세부터는 후학을 양성하기도 한 인물이다. 하지만 여기에 안주하지 않고 30대엔 김연수에게 ‘춘향가’를 사사해 소리 공부를 이어갈 만큼 열정적이었다. 이렇게 쭉 소리꾼의 삶을 살았더라면 어땠을까 싶지만, 40세 무렵 목소리가 변하면서 소리를 지속할 수 없게 됐다. 하지만 소리판을 벗어나고 싶지는 않았던 그는 자연스럽게 북을 치기 시작했다. 30년 넘게 소리를 해온 그이기에 누구보다 소리 구성을 잘 알았다. 그 덕에 세밀한 고법을 구사할 수 있었고, 1989년 중요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유산) 판소리고법 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

판소리고법은 말 그대로 북을 치는 방법이다. 하지만 그 역할은 북을 치는 것에만 한하지 않는다. 이따금 소리꾼의 상대역으로 소리를 하거나 아니리를 받아주기도 하고, 추임새로 흥을 돋우거나 소리의 빈자리를 메워 주기도 한다. 소리꾼이 한판 잘 놀 수 있으려면 함께하는 고수도 한판 잘 어우러질 수 있어야 하는 거다. 그런데도, 판소리고법은 오랜 시간 세간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1962년 문화재보호법이 시행되고 1964년 12월에 종묘제례악을 시작으로 판소리 등이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판소리고법은 1978년 2월에서야 등재됐고, 이마저도 1991년 2월 판소리에 흡수되면서 지정 해제됐다. 물론 이러한 판소리고법의 중요성을 토대로, 전북특별자치도1992~ (판소리장단), 광주광역시1995~, 전라남도2002~2019, 대전광역시2008~, 인천광역시2013~ 에서 판소리고법을 지역의 무형유산으로 지정하고 있다. 서울특별시 역시 2001년 정화영 고수를 보유자로 지정하고 ‘판소리고법’을 시도무형유산으로 지정했다. 참고로 정화영 고수는 고 김동준의 제자다.

박송희는 필자가 만난 2016년을 기준으로, 소리 인생 중 잊지 못할 무대로 이 무대를 꼽았다. 무려 72년이라는 시간을 더듬어 고른 기억이다. 소리꾼에게나 고수에게나 ‘완창’은 사실 조금 부담스러운 단어다. 둘이 합을 잘 맞춰 잘하는 소리 한 대목만 뽐내듯 부르는 것만도 쉽지 않을진대, 기승전결에 따라 관객을 울고 웃기며 한바탕 긴 이야기를 끌고 가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래서 더 도전적이고, 이뤘을 때 높이 평가받기도 한다. 국립극장에서는 1984년 12월 ‘신재효 100주기 기념공연’을 계기로 이듬해부터 본격적으로 완창판소리를 공연했고, 올해로 40년을 맞이한다. 어려운 공연이나 놓을 수 없는 무대로 꾸준히 사랑받는 완창판소리는 12월이면 한 해를 잘 마무리하자는 의미를 담아 송년 판소리를 연다. 지금은 원로 소리꾼으로, 또 타계한 판소리 예능보유자 중 한 사람으로 기억되는 박송희가 당시 차세대 소리꾼으로 소개됐듯, 젊은 소리꾼과 고수에게 완창판소리는 도전의 장이 된다. 판소리 한 바탕을 오롯이 감상할 기회의 순간을 선사하는 공연, 다음 세대를 기약하며 소리꾼 옆에 좌정한 고수의 역할을 눈여겨볼 시간이다.

글 김보나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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