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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10월호

‘Track 4’

삶을 부지런히 살아내고 있으면 어디선가 선물이 온다. 고생 많았다고, 요즘 이런 거 필요하지 않았냐며 말이다. 그건 사람일 때도 있고, 보이지 않는 음악일 때도 있으며, 때로는 한 권 책의 형태로 온다. 『음악소설집』2024(프란츠)도 그랬다. 여름을 몹시 견디기 어려워하는 내게 오랜만에 찾아온 작은 선물이었다. 징그럽게 무더운 계절이지만, 시원한 곳에서 이 책에 흠뻑 빠지고 나면 여름은 한 뼘 더 흘러갔을 거라고 누군가 속삭이는 듯했다. 그 누군가는 다름 아닌 오랜 시간 흠모해온 다섯 명의 소설가였다. 김애란·김연수·윤성희·은희경·편혜영. 오래전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같은 기획이 아닌 일반 단행본에서 이들의 이름이 나란히 쓰인 걸 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고, 심지어 이들이 음악 이야기를 한다는 점에서 나뿐만 아니라 많은 독자의 마음이 일렁였던 듯하다.

정작 여름의 한복판에서는 읽지 못하고 여름을 어느 정도 떠나보낸 시점에 책을 펼쳤다. 그리고 책을 덮을 때 깨달았다. 음악에 대한 이야기이자 이별과 애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것을.

이제 와 헌수 말을 빌리자면 “그런 일은 그냥 일어난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저 내 차례가 된 것뿐이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그 앞에서 매번 깜짝 놀란 표정을 지을까? 마치 살면서 이별이라고는 전혀 겪어본 적 없는 사람들처럼.
『음악소설집』, 42쪽

언제 써먹을 수 있을지 모를 외국어를 배우며 옛 연인 헌수와 함께 들었던 ‘러브 허츠Love Hurts’를 떠올리는 은미(김애란, 「안녕이라 그랬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애인의 옛 모습을 유튜브에서 우연히 발견한 뒤 그와 노천극장에서 함께 들었던 드뷔시의 ‘달빛’을 천천히 기억하는 은희(김연수, 「수면 위로」), 허망한 교통사고로 영혼이 된 딸이 엄마의 꿈속에 들어가 자장가를 불러주고 싶어하는 이야기(윤성희, 「자장가」), G시로 가는 KTX 4인석에 앉은 네 명의 낯선 이들이 구스타브 홀스트의 ‘행성’이라는 긴 연주곡을 따로 또 같이 듣는 「웨더링」(은희경), 돌아가신 엄마의 옛 친구로부터 목소리가 담긴 테이프를 선물 받으며 엄마를 손에 잡히는 것으로 기억할 수 있게 된 경주(편혜영, 「초록 스웨터」). 이들은 짧게는 3분, 길게는 50분 연주에 기대어 누군가를 혹은 지난 시절 속 그렇게밖에 될 수 없었던 순간을 떠올리고, 오래 미적이던 자리에서 사뿐히 일어나 과거와 작별하고서 앞으로 나아간다.

I learned from you,
I really leared a lot,
really learned a lot...
너한테 배웠어,
정말 많이,
정말 많이 배웠어.
『음악소설집』, 40쪽

헌수가 은미에게 해석해준 ‘러브 허츠’의 가사를 같이 들으며 불현듯 떠오른 얼굴이 있었다. 음악은 늘 이런 식이다. 어떤 곡의 어느 가사에서 어떤 얼굴과 시절이 튀어나올지 모른다. 음악의 힘은 무척이나 세서 어떤 시절의 마개인 경우가 많고, 심지어는 그 마개를 열어 그 자리에 눈 깜짝할 새에 데려다주는 타임머신이 되기도 한다. 그럴 때면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깜짝 놀라는 얼굴도 있고, 마땅히 떠오를 사람이 떠올라서 이내 마음이 미어지기도 한다. 나는 ‘러브 허츠’의 이 구절에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P가 떠올랐다. 나의 이십 대 절반을 함께한 사람. 누군가가 나를 다정한 사람으로 알고 있다면, 나의 다정함과 장난기, 타인에게 사랑을 주는 능력의 대부분은 이 친구로부터 받았다. 그 친구로부터 사랑과 이해를 정말 많이 배웠다.

엄마가 남겨놓은 스웨터가 여러 사람의 흔적과 손길로 조금씩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다보면 어떤 관계든, 지금 곁에 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삶의 부피감을 늘려주었다는 걸 경주가 알게 되리라 생각했어요.
편혜영 작가 인터뷰, 『음악소설집』, 269쪽

수록된 소설이 좋았던 것만큼이나 편혜영 작가의 인터뷰 한 줄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내게는 경주의 초록 스웨터가 음악이니까. 음악을 듣다 보면 지금은 곁에 없는 사람들이 떠오르고, 그들 덕분에 내 삶의 부피감이 얼마나 늘었는지 자주 깨닫게 된다. 최근엔 또 다른 한 벌의 초록 스웨터 같은 영화도 봤다. <룩백>2024이라는 일본 애니메이션인데, 십 대 시절 그림을 함께 그렸던 두 친구가 주인공인 이야기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언제나 내 등 뒤에 있던, 그래서 나의 등을 선선하게 밀어주며 앞으로 나아가라고 응원하던 친구가 나온다. 참 좋아하는 뮤지션 나카무라 하루카가 영화음악을 맡았고, 둘의 아름다운 우정의 순간마다 잔잔히 흐르는 선율을 들으며 오래 울었다. 이런 책과 영화를 동시에 봐서였을까? P가 꿈에 나왔다. 꿈에서라도 보고 싶었는데 정말 나오지 않던 친구였다. 꿈에서 깬 후로도 며칠간 P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다가 같이 좋아했던 곡을 틀었다. 함께 들었기에 3분을 버티기 어려워 10년 가까이 듣지 않으며 견딘 곡이다. 재생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고, 오랜만에 들은 곡은 역시나 좋았다.

『음악소설집』은 그렇게 한 번 더 귀한 선물이 되어주었다. 어떤 시절을 정말로 떠나보내는 재생 버튼을 누르게 해주었고, 이제는 곁에 없는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내 전할 수 없는 고마움을 전할 시간을 주었다. 미움과 섭섭함보다는 그들이 내게 알려준 삶의 아름다움들을 다시 한번 찬찬히 떠올렸다. 나의 일부를 만들어줌으로써 내 마음속에서 영원히 늙지 않은 채 살아 있게 된 사람들. 더는 015B의 음악처럼 “나이가 들어 주름살이 하나둘씩 늘어갈 내 모습을 볼 수 없는” 이들에게, 장기하와 얼굴들의 곡처럼 “마지막으로 만난 지도 벌써 여러 해가 지나가 버린” 이들에게, 이소라의 ‘Track 4’ 가사로 인사를 건네고 싶다.

“안녕히. 이제 안녕히. 영원히. 괜찮아 이제 괜찮아. 영원히.”

글 손정승 『아무튼, 드럼』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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