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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10월호

모른 채
지나버린 순간에 대하여

그리운 얼굴이 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나신 부모님의 젊었을 적 얼굴이다. 사진 속의 얼굴은 어쩐지 가짜 같을 때가 있다. 필름으로 사진을 찍는 일의 의미가 지금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는 것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묵직했던 때, 사람들은 카메라 앞에서는 약간 긴장했던 것 같다. 가족사진 같은 것은 특히 그랬는데, 활짝 웃으며 찍은 사진보다 진지한 느낌의 어떤 표정을 ‘만들어’ 카메라 앞에 선 듯한 사진들이 자주 보인다. 이런 사진들에서 눈이 참을 수 없는 즐거움으로 살짝 휘어 있다든가, 입꼬리가 들려 있는 모습을 보는 일은 즐겁다.

하지만 때로는 그 반대의 사진들도 있기 마련이다. 어딘가 망연자실한 얼굴. 어딜 바라보는지 모르게 찍힌 사진. 그러니까 잘못 찍힌 사진처럼 보이는 어떤 흔적들 말이다. 표정이라기보다는 (감정의) 흔적이라고 불러야 할 듯한 이런 표정들은 평상시에는 잘 숨어 있는다. 혹은, 숨겨둔다. 이런 표정을 들키는 일은 마치 잠옷을 입고 외출하는 것과 같아서, 여간해서는 사람들 앞에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어디로든 가야 하는 사람의 표정. 어른으로 불리는 나이가 된 뒤 종종 짓게 되는 진실의 표정. 영화는 이런 순간을 포착하는 배우의 얼굴을 담아내는 데 선수인 매체다. 내가 사랑하는 영화적 순간들은 이렇게 ‘스치듯’ ‘무심코’ ‘포착된’ 얼굴들로 이루어져 있다. 한순간도 연기가 아닌 적이 없으리라는 사실을 몰라서가 아니라, 얼굴 앞에 거울을 상시 들고 다니지 않는 내가 짓는 그 표정을, 가까운 사람들이 너무도 능숙하고 빠르게 얼굴에서 감춰버려서 내가 미처 숙고해보지조차 못했던 그 표정을 천천히 깊게 마주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사라 폴리가 감독하고 미셸 윌리엄스가 출연한 <우리도 사랑일까Take This Waltz>2011에도 이런 표정이 나온다.

마고는 출장길에 대니얼과 우연히 스친다. 시선을 교환하는 정도보다는 호감에 더 가까운 감정이지만 마고는 애초에 결혼한 몸이고, 출장길의 낭만을 발전시킬 생각은 없다. 하지만 알고 보니 대니얼은 마고의 집 앞에 살고 있었고, 마고는 남편 루와 다른 대니얼의 매력에 빠져든다. 마고의 남편 루는 이른바 친구 같은 남편이다. 성적이든 정신적이든 이끌림을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샤워 중인 아내에게 찬물을 끼얹는(문자 그대로의 상황이다) 장난을 치는 데 열중하는 사람이다.

대니얼은 다르다. 그렇다, 많은 사랑 이야기가 그렇듯 이 이야기에서도 ‘다르다’가 사람을 못살게 만든다. 마고는 몇 번이고 선을 긋고 관계를 발전시키기를 거부하지만, 결국 항복한다. 이것은 많은 사랑 이야기에서 해피엔딩의 신호다. <제인 에어> 식으로 말하면 “독자 여러분이시여, 나는 그와 결혼했다.” 경이에 찬 새 삶에 대한 암시. 그에 가까운 항복 선언. 하지만 제인 에어가 로체스터 씨와 결혼했다고 해서 그의 몰락이 없던 일이 되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는 두 사람이 모든 역경을 헤치고 함께하기로 했다고 해서 인생이 주변부로 밀려나는 법은 없다. 오히려, ‘콩깍지가 씐’ 기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을 직시해야 하는 시기가 눈앞으로 다가왔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도 사랑일까>는 다소 짖궂은 장난을 친다. 두 연인이 ‘마침내’ 함께하게 한 다음, 그들이 온갖 체위로 섹스하는 모습을 보여준 다음, 다른 사람과 함께 스리섬을 하는 모습을 보여준 다음을 보여준다. 이 영화의 인상적인 피날레에서, 미셸 윌리엄스가 연기하는 마고는 세탁기 앞에 앉아 있다. 세탁기는 한참 돌아가는 중이고, 마고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 표정이 없기 때문이다. 무표정을 짓는다는 느낌이라기보다는 희로애락이 모두 닳아 없어진 것처럼 앉아 있다. 곧 다시 일어나 여러 감정을 꾸미고 보여주겠지만 지금, 혼자 있는 지금만큼은 그 무엇도 가장할 필요가 없음이 그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타인을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순간의 마고는 다소 고독해 보이고, 그것은 꼭 나쁘다는 뜻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길을 잃은 듯하다. 사랑이라 믿은 감정 다음 오는 것은 어차피 뻔한 일상뿐이라는 경고일까?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을 미셸 윌리엄스의 얼굴이 보여준다.

마고의 표정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 영화가 <애프터썬Aftersun>2022이다. 우리는 사랑에 유난한 경향이 있어서 연인의 눈썹이 드리운 그늘이나 귓불에 돋은 솜털을 늘 새삼스럽게 발견하고 재발견하곤 한다. 그런 사랑의 대상으로 부모를 바라보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당신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면 이게 늘 죄책감을 불러일으킨다. 슬프게도 죄책감은 사랑보다 커진다.)

샬럿 웰스 감독의 <애프터썬> 속 주인공 11살 소피는 아빠 캘럼과 튀르키예에서 며칠간 여름휴가를 보냈다. 아버지와 함께한 어떤 여름날의 추억을 캠코더의 조각 영상으로 재구성하는 대목에서 <애프터썬>은 힘을 발휘한다. 어떤 장면들은 예전에 찍은 영상이고 소피의 추억 같지만, 또 어떤 장면들은 소피가 후일 상상 속에서 재구성한 장면 같기도 한 이 영화에서 아버지는 다정했지만 우울한 사람이었다. 영상 속에 찍힌 딸은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영상을 보는 성인이 된 딸은 그 뉘앙스를 알아차린다. 감독이 자신의 아버지와 실제 겪은 시간을 바탕으로 극화한 이 영화는 마치 뒤늦은 사과 인사를 건네는 것도 같다. 알아차려야 했는데 모른 채 지나버린 순간에 대하여.

하지만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좌절을 느꼈는데, 나에게는 캠코더 영상이 없으며, 그때 그 시절의 부모님 얼굴을, 뉘앙스로 가득한 표정을 전혀 기억할 수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가족의 경제 형편에는 무리해서 떠나야 했던 휴가지, 체력이 제각각인 가족들을 낙오 없이 이끌어야 했던 매일, 입에 맞거나 맞지 않거나 소란스러웠을 식사 시간과 잠들 때까지도 쉬지 않던 재잘거림 속에서 한숨 돌리는 순간에야 무표정할 수 있었을 부모님의 얼굴을. 영화 속 캘럼의 얼굴이나 뒷모습을 보며 내가 읽어내는 감정들을 생각한다. 내 것이 아닌 경험으로부터 내 경험을 길어 올린다.

글 이다혜 작가, 씨네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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