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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9월호

시대를 품은 풍류남아

선조들의 지혜에 새삼 놀라게 되는 순간이 있다. 바로 절기에 따라 바뀌는 날씨를 경험할 때다. 음력 7월 4일 입추가 지나자, 찌는 듯한 더위 대신 높은 하늘에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드디어 숨이 쉬어지는 것만 같았달까. 그러더니 어느새 돗자리 깔고 소풍하기 딱 좋은 계절이 성큼 다가왔다. 도포 자락을 날리며 춤을 추고, 나무 그늘에서 부채질하며 쉬는 선비, 한량의 모습을 상상하기 좋은 시기다. ‘한량’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면 ‘돈 잘 쓰고 잘 노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정의한다. 북한 속담에 ‘돈 없으면 건달, 돈 있으면 한량’이란 말이 있듯이, 우리는 실제로 넉넉한 부를 바탕으로 한바탕 잘 노는 이를 가리켜 한량이라 불렀다. 이러한 한량을 주제로 한 민속춤도 전해지는데, 바로 ‘한량무’다.

한량무는 극 형식으로 4~7명이 역할을 맡아 추는 춤과 허튼춤 계열의 남성 독무 두 가지로 구분된다. 최근에는 독무 형태의 춤을 더 쉽게 볼 수 있으나 탈춤이 성행하던 시절에는 극 형식의 한량무가 더 많았고, 이것이 원조에 가깝다.

한량무의 정확한 기원이나 발생 과정을 그려볼 순 없으나, 산대놀이 혹은 조선 시대 남사당패의 연희에서 온 것으로 추측한다. 그러니 더욱 극 형식이 먼저였을밖에. 극 형식의 한량무는 색시·승려가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탈춤과 같이 여러 개의 과장으로 나뉘어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기승전결을 갖춘 서사에 따라 9개 과장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점이 인상적이다. 한량무가 처음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건 1979년 경상남도에서였다. 2005년엔 부산에서 동래한량춤이란 이름으로 등재됐고, 2011년엔 전라북도에서 한량춤이란 이름으로 등재됐다. 그리고 2014년에는 서울에서도 한량무라는 이름으로 시도무형유산이 등재됐는데, 대개 비슷한 형식과 서사 구조를 갖추고 있으나 서울은 5과장으로 구분돼 있다는 점이 다르다.

그 서사를 짧게 풀어보자면 이렇다. 극마다 색시이기도, 기생이기도 한 미모의 여인이 있다. 여기서는 색시로 하자. 색시가 고운 자태를 뽐내며 한량을 유혹하고 유혹에 넘어간 한량이 색시에게 줄 꽃신을 가지러 간 사이 승려를 만나 그를 배신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런데 이것은 4~5명 구성일 때이고, 참여 인원이 7명까지 늘어난 지금은 권력의 정점에 서 있는 별감까지 가세하며 갈등이 극대화된다. 후에 색시가 다시 한량과 승려에게 돌아오지만, 누구도 받아주지 않았다. 이때 슬피 우는 색시에게 측은지심을 느낀 한량이 색시를 용서하고, 결국 모두 화해하며 이야기는 끝이 난다. 마치 마당놀이처럼, 출연진 모두가 무대로 나와 한판 흥겨운 춤을 추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것이다. 한량무가 현대판 마당놀이 구성 당시 영향을 미친 요소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삼각 혹은 사각 관계를 통해 사회를 풍자하고 교훈을 담는 것뿐만 아니라, 마당놀이에서 관객의 흥미를 높이는 감초 같은 역할로 뺑파가 등장하듯 여기선 주모가 엉덩이를 흔들며 나타나 관객에게 재미를 주는 것까지 유사하다.

남성 독무로 추는 한량무는 1960년대 전통공연예술이 무대화되던 시절 발생했다. 입춤·남무·선비춤·양반춤 등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근래에는 한량무라 하면 독무를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고고한 선비정신을 몸짓으로 풀어낸 춤이라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극 형식으로 추던 한량무에서 한량의 행실이나 본래 한량이 지닌 사전적 의미만 보더라도 고고함과는 거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학식은 갖추었지만 출셋길에 나서지 않는 선비가 고고할 순 있겠지만, 한량과 같은 정신을 품었다고 보긴 어려워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량무 자체를 남무라고 부른 만큼 남성 독무로 독보적인 위치에 있는 춤이라는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호젓하면서도 역동적이고 자유로운 몸짓은 풍류와 흥을 표현하는 예술성을 지닌다. 태평무처럼 화려한 복식이 아닌 은은한 빛깔의 도포를 입고, 갓을 쓰는 것이 전부다. 오롯이 몸짓이 유일한 표현의 도구인 셈이다. 물론, 춤의 분위기를 더욱 고조하고자 지역에 따라서 소품을 활용하기도 하는데, 진주에서는 부채나 담뱃대를 들고 춤을 추기도 한다. 서울에서는 난초나 대나무가 그려진 부채를 들기도 하는데, 모든 것을 내려둔 채 맨손으로 도포 자락을 날리며 등장하기도 한다.

한량무는 시대와 환경에 따라 자연 발생한 춤이라고도 한다. 자연 발생의 의미를 곱씹어 본다면 조금 의아하게 느껴지지만, 산대놀이에서 기원을 찾던 극 형식의 한량무가 무대화되고 거기에 지역에 따른 특성이 더해지는 걸 보면 시대와 환경에 영향을 받아 살아 숨 쉬는 춤사위라는 점에서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한다. 또, 그것이 한량무가 여전히 생명력과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는 이유일 수도 있을 거다.

지난 7월, 한국춤 무대화에 이바지해 ‘근대 한국춤의 아버지’로 불리는 한성준의 탄생 150주년을 맞아 홍성에서 한성준 춤·소리 예술제가 열렸다. 이 무대에서 당시 한성준이 춘 한량무가 재연됐다. 강선영 예인에게 전해진 이 춤은 극 형식의 춤으로, 부채를 든 한량과 색시가 무대에 올랐다. 강선영은 서울특별시 무형유산 ‘한량무’를 전승하는 한성준류 강선영춤 보존회를 이끌고 있다. 8월 31일 국립국악원 <토요명품> 무대에도 남성 독무로 구성된 한량무가 올랐다. <토요명품>은 12월까지 매주 토요일마다 우리 춤·기악·성악 등을 다양하게 구성해 선보이니 눈여겨봐도 좋겠다. 이 시대 진정한 풍류남아를 위하여.

글 김보나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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