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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9월호

물 앞에서 하는 약속
— 물다짐

“틈틈이 물 꼭 드시고요.” 메일을 쓸 때 덧붙이는 말이 생겼다. 올여름, 탈수 증상으로 고생하는 사람을 여럿 본 뒤로 쓰게 된 문장이다. 평소에도 물을 많이 마시지만, 여름철에는 물을 입에 달고 산다. 살기 위해서 마시는 것, 살아 있다는 사실을 생생히 느끼게 해주는 것이 내겐 물이다. 외출했는데 텀블러가 보이지 않으면 금세 초조해지고 입이 바짝바짝 타기 시작한다. 유사 갈증 상태로 나 자신을 혹독하게 몰아붙이는 것 같다. 물을 들이켜는 행위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물이 든 텀블러가 있다는 사실이다. 언제든 물을 마실 수 있다는 점이 나를 숨 쉬게 한다. 가능성은 있던 갈증도 사라지게 만든다.

‘물먹다’라는 단어를 처음 알게 됐을 때 당혹스러웠던 것도 이 때문이다. 물먹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데, 사족처럼 붙는 뜻이 눈을 의심하게 했다. “식물이 물을 양분으로 빨아들이다”라는 첫 번째 뜻과 “종이나 헝겊 따위에 물이 배어서 젖다”라는 두 번째 뜻은 고개를 끄덕일 만하다. 그리고 잘 알다시피 “시험에서 떨어지거나 직위에서 떨리어 나다”라는 뜻이 있다. 숭고한 물먹는 일에 왜 이런 의미가 깃들게 되었을까. 이는 바다에 빠진 사람은 별수 없이 물을 먹을 수밖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섭취한 물이고, 몸에 들어간 그 물이 신체적 이상을 일으킬 수도 있다. 이쯤 되면 ‘물먹은 담장’이라는 관용구가 “어느 순간에 허물어질지 모르는 매우 위태로운 상태”를 가리키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물먹다’라는 단어는 나를 자연스레 바다로 이끈다. 지구 표면적의 약 70.8%를 차지하는 넓고 큰 부분. 상상만으로도 짭조름한 냄새가 온몸을 덮치는 것 같은 바다. 수영을 못 하는 나는 그저 멀찌감치 서서 지켜볼 뿐이지만, 멀리서 바라볼 때 전체를 조망할 수 있음을 가르쳐준 것도 다름 아닌 바다였다. 거리감이야말로 상황을 정확히 꿰뚫는 데 필요한 요소일 것이다. 저렇게나 많은 물이 한데 있다니, 고여 있지 않고 흐르고 있다니, 잠시도 운동을 그만두지 않는다니! 그러니 어릴 적 ‘물바다’라는 단어를 처음 접했을 때 얼마나 놀랐겠는가. “홍수 따위로 인하여 넓은 지역이 온통 물에 잠긴 상태를 이르는 말”이라는 뜻은 수해 현장 사진을 계속해서 떠올리게 했다.

바닷가에 가면 물부터 본다. 물의 색깔, 파도가 밀려들 때의 속도, 고유한 리듬 속에서 이따금 변주를 눈치채게 해주는 물보라…… 보는 것만으로도 금세 충만해지지만, 귀까지 즐거우니 망중한을 즐기기 제격이다. 바닷바람을 타고 훅 끼쳐오는 물비린내는 또 어떤가. 후각과 촉각을 동시에 자극하는 덩어리진 냄새는 잠시나마 나를 바다에 속해 있게 한다. 그럴 때면 물결, 물비늘, 물오르다 같은 단어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물로 인해 일렁이고 반짝이고 생장하는 것들을 상상하고 있노라면, 말라 있던 가슴속에 물방울이 맺힌다. 때마침 전화벨이 울리고, 튀어 올랐으면 좋았을 물방울들이 이내 물거품이 되어버린다.

‘물거품’이라는 단어는 “물이 다른 물이나 물체에 부딪쳐서 생기는 거품”이라는 첫 번째 뜻보다 “노력이 헛되게 된 상태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는 두 번째 뜻으로 더 빈번하게 사용된다. 물이 무언가에 부딪치면 자연스레 생기는 게 물거품일 텐데, 이 자연스러움이 실패를 가리킬 수도 있다는 점이 자못 서글프다. 웬만하면 부딪치지 말라는 가르침인가 싶다가도, 부딪치지 않으면 내가 누구인지 발견할 수 없잖은가 반문하게 된다. 살면서 두 번째 물거품을 경험하지 않기란 쉽지 않다. 노력이 헛된 상태가 될 때면 내가 으레 바다를 찾곤 했다는 생각이 들어 흠칫 놀랐다. 그때마다 나는 첫 번째 물거품을 보면서 두 번째 물거품을 받아들였는지도 모르겠다.

물거품을 바라보고 있으면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거품 덕분에 물이 움직인다는 것을, 무언가와 부닥쳤다는 것을, 제풀에 흘러넘치고 말았다는 것을 차례로 알게 된다. 물거품은 결과고, 이 결과는 뜻한 바와는 다를지언정 내가 한동안 무언가에 골몰했음을 보여준다. 물거품으로 사라지고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물거품으로 꺼져버려도, 물이 있었다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물밀듯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지그시 누르고 삶이라는 조수潮水에 또다시 몸을 실어야 한다. 이때 두 갈래 이상의 물줄기가 한데 모이는 지점을 가리키는 ‘두물머리’라는 낱말이나 “낙숫물이 댓돌을 뚫는다”와 같은 속담을 떠올려도 좋으리라.

물은 ‘사이’를 가리킬 때 종종 동원되기도 한다.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가리켜 “물과 고기”라고 하고, 서로 어울리지 못하고 겉도는 사이를 “물과 기름”이라고 일컫는다. 서로 용납하지 못하거나 맞서는 상태는 흔히 “물과 불”로 표현되고, 어떠한 조치를 할 수 없을 상황에 부닥치면 “물 건너가다”라는 관용구가 소환된다. 물을 건너가면 마냥 좋은 줄만 알았는데, 물이 제 의지대로 건너가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물인지 불인지 모르고” 닥치는 대로 살다 보면 남는 것은 “물에 물 탄 것 같은” 삶이다. “물 찬 제비”가 되겠다고 결심했지만 “물에 빠진 생쥐” 꼴로 돌아왔을 때, “물 건너 불 보듯” 하는 사람이 차라리 편하다. “물 만난 오리 걸음”으로 재바르게 그 자리를 떠야 한다.

한결같은 바다 앞에서 내 삶을 견주는 건 어리석은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총명함보다 묵묵한 어리석음이 바다와 더 닮아 있는 듯도 하다. 바다 앞에서 “내 삶의 ‘물참’은 대체 언제 찾아오는 거야!” 포효한들, 바다가 답해줄 리 만무하다. ‘물참’은 물때, 물번, 만조 등과 바꾸어 쓸 수 있는 단어로 “밀물이 들어오는 때”를 가리킨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한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쓰지만, 정작 물 들어오는 시기를 알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 설령 물 들어온다는 사실을 감지했더라도 그 물이 나한테 맞는 물인지 신중하게 파악하다 거짓말처럼 물이 빠져나갈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물 들어올 때를 대비해 노 젓는 법을 알고 있어야 할 텐데, 노 젓기에 대응할 만한 나만의 비기祕技를 발견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바다는 한 번도 물은 적이 없는데, 나 혼자 또 열심히 답하고 있다.

‘물낯’에 동심원이 퍼지고 있다. 물낯은 “물의 겉면”을 의미하는데, 물낯에 피어나는 동심원은 물밑에서 뭔가가 바지런히 움직이고 있음을 일러준다. 물밑 작업이라는 말도 여기에서 만들어졌으리라. “공기가 물 밑에서 물 위로 떠오를 때 꾸르륵꾸르륵하며 나는 소리”를 가리켜 ‘물방귀’라고 한다. 물밑 작업을 할 때 내서는 안 되는 소리일 것이다. 물론 이 또한 바다 앞에 서 있으니까 퍼져 나갈 수 있는 상념이다. 물 앞에서 “물벼락과 불벼락 중 더 무서운 것은?”처럼 실없는 물음을 던지는 오후, 사람만큼은 절대 물로 보지 말자고 다짐한다.

그러고 보니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물과 관련된 단어는 바로 ‘물다짐’이다. 이는 건축 용어로 “되메우기를 할 때 흙 속의 공기를 없애기 위하여 물을 흠뻑 주면서 다짐하는 일”을 가리킨다. 다지는 일과 다짐하는 일, 삶을 지탱하는 데 꼭 필요한 일이다. 물 앞에서 불끈 쥔 주먹 안에 방울꽃이 피어난다.

글 오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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