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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8월호

고전 최고의
신 스틸러는?

‘올해가 셰익스피어에 관한 특별한 해인가?’ 의문이 들 정도로 셰익스피어의 공연이 잦다는 느낌이다. 여름에만 해도 <햄릿>이 두 편(6월부터 9월까지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대극장, 7월 명동예술극장), <맥베스>가 세 편(6월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7월 신촌극장, 7월과 8월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올라갔으니 말이다.

사실 ‘셰익스피어 열풍’은 국내에서 특별히 예외적인 현상은 아니다. 최근 한 신문 기사에 따르면 “셰익스피어 희곡 38편 가운데 한 해에 적으면 20편, 많으면 50편 안팎이 공연으로 만들어진다.”(한겨레신문, 2024년 6월 26일 자) 그 까닭에 대해서 누구는 셰익스피어가 선보이는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다수의 관객에게 소구되기 때문에 기획적 측면에서 ‘안전한 선택’이라고 하고, 누구는 셰익스피어 작품의 내용이 이미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혁신적 연출’의 재료로 알맞다고도 한다. 허나 이 모든 지적에 동의하더라도, 반복적으로 <햄릿>과 <맥베스>를 관람하려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거창한 이유가 있던 것은 아니다. 그저 칼싸움이 많아도 너무 많아, 반복되는 싸움 구경이 피로했을 뿐이다.

개인적 취향에서 비롯한, 지극히 사소한 불평을 토로하려는 것은 아니다. 칼싸움을 맥없이 지켜보다 찾아든 질문을 나누고자 함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연극에 갈등conflict, 특히 적나라하게 물리적인 갈등이 이토록 빈번하게 등장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 어떤 의문으로 이어졌으며, 그리하여 얼마나 매력적인 존재와 만나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하고자 함이다.

영국 연극학자 니컬러스 리다우트Nicholas Ridout에 따르면, 극장은 인간이 서로서로 죽이는 대신 갈등을 상징적으로 해결하는 장소다. 극장은 “인간이 서로서로 얼굴을 맞대고는 그렇게 서로 대면하는 것을 즐기거나 진저리치는 것이 전부인 장소”라는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그는 “극장 안에 동물의 자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무대 공포증, 동물, 그리고 다른 연극적 문제들Stage Fright, Animals, and Other Theatrical Problems』,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6) 그렇다면, 극장에 동물의 자리가 마련되면, (물리적) 갈등 없는 연극이 가능해질까? 갈등에 대한 연극의 발화가 달라질 수 있을까? 이런 질문으로 나는 동물이 등장하는 고전 희곡을 검색했고, “고전 최고의 말 없는 신 스틸러the most scene stealing non-speaking role in the canon”, ‘게Crab’와 만날 수 있었다.

‘게’는 셰익스피어의 작품 <베로나의 두 신사The Two Gentlemen of Verona>1589~1593에 등장하는 개dog다. 사실 ‘게’는 무대에 등장하기는 하나, 대사도, 의미 있는 행동도 없는 캐릭터로서 오랫동안 비평사에서 배제된 존재였다. 아니, <베로나의 두 신사> 자체가 ‘셰익스피어의 희곡 중 가장 약한 작품’으로 여겨져, 셰익스피어에 대한 논의에서 자주 생략되었다는 설명이 더 정확할 것이다.

줄거리를 간단하게 소개하면, 절친 사이인 ‘베로나의 두 신사’, 프로테우스Proteus와 발렌타인Valentine은 사랑에 대해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다. 프로테우스는 연인 줄리아Julia 생각뿐이었으나, 발렌타인은 사랑보다 견문을 넓히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 그러나 밀라노에서 재회한 두 사람은 공작의 딸 실비아Silvia를 사이에 둔 연적이 된다. 친구와 연인 모두를 배신한 프로테우스의 계략으로 발렌타인이 밀라노에서 추방되자, 실비아는 발렌타인을, 프로테우스는 발렌타인을 쫓는 실비아를 찾아 나선다. 그사이 남장하고 프로테우스를 찾아 밀라노에 온 줄리아 또한 프로테우스의 시종으로 그와 함께 길을 나섰기에, 서로가 서로를 쫓는 네 사람은 숲에서 다시 조우하고···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두 쌍의 연인이 서로의 잘못을 용서하고 원래의 짝과 행복하게 결합하는 것으로 극이 끝난다. 갑자기? 그렇다, 작품 속 등장인물들은 너무도 갑자기 사랑에 빠지고, 갑자기 배신하며, 또 갑자기 서로를 용서한다. 셰익스피어의 첫 작품이라고 추정되기도 한다니, 처음은 누구나 서툰가 싶어진다.

그러나 ‘게’를 주목해 읽으면—여전히 이상하긴 하지만—좀 더 재밌는 독해가 가능해진다. ‘게’는 프로테우스의 어리숙한 하인 룬체Launce의 개다. 룬체는 종종 ‘게’를 데리고 등장해 ‘게’를 짝사랑하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한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자기가 부리는 개나 종에게 이렇게 해주는 주인이 과연 몇이나 되겠어요? 글쎄, 맹세라도 하겠어요. 놈이 푸딩을 훔쳐 발에 족쇄를 찬 적도 있어요. 모른 척했으면 놈은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겁니다. 또 한번은 놈이 거위를 물어 죽여 제가 대신 목에 칼을 찼던 적도 있어요. 모른 척했으면 놈은 정말 혼났을 겁니다. 그런데도 놈은 지금 다 잊어버렸어요.”(4막 4장) 지난 일은 모두 잊은 무정한 ‘게’. 그럼에도 이 개를 미워할 수 없는 마음을 하소연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또한 ‘게’의 사랑일 터. 프로테우스뿐 아니라 줄리아도, 발렌타인도—자기 자신을 배신하고—변덕을 부리며 사랑한다. 프로테우스가 말하듯 “사랑의 봄[은] 태양이 아름답게 비치다가도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와 모든 걸 날려 버리[는] 변덕스런 4월 날씨의 영광과 같아”, 네 명의 순정한 젊은이들은 어리석게도 그저 ‘사랑’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사실 내가 사랑의 변덕에 이렇듯 너그러워진 것은 순전히 ‘베라’(6세, 래브라도 리트리버) 때문이다. 만난 지는 이제 석 달이 채 안 됐지만, ‘베라’를 만나기 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을 것만 같다. “개는 나고, 나는 개다”라는 룬체처럼, “베라는 나고, 나는 베라다”라고 외치고 싶을 지경이다. 그러나 베라는 꼭 ‘게’처럼 무정하여, 한없이 다정하다가도 이내 새로운 사랑에 빠진다. 계곡을 만나면 계곡을, 공을 보면 공을, 고양이가 지나가면 고양이를 사랑한다. 나와의 시간은 완전히 잊었다는 듯, 새로운 사랑으로 돌진한다. ‘베라’의 이런 분명하고 솔직한 마음은 나를 번번이 낙담시키지만, 또 그 마음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내 마음 또한 정직하게 들여다보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애타게 서둘러 뛰쳐나가는 마음도, 민망할 정도로 쉽게 토라지는 마음도 ‘베라’에게는 전할 수 있다. 인간에게는 애써 숨긴 마음들을 ‘베라’에게는 다 드러내게 되는 것. 항상 이렇게 사랑하고 싶었던 것 같다.

‘베라’와 섞여 들어가는 내 삶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자연스레 묻게 된다. ‘지독하게 인간적인 예술’인 연극에 이제껏 극장에서 배제된 ‘소중한 타자’들이 다시 찾아들면 ‘연극의 갈등’은 얼마나 풍성해질까? 혹 그럴 때야 비로소 사랑하고, 배신하고, 미워하고, 증오하고, 용서하고, 화해하는 우리 일상의 고투를, 그리고 그 일상을 사는 우리의 얼굴을 투명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지는 않을까? 일찍이 도나 해러웨이Donna J. Haraway가 제안한 ‘함께 반려종 되기becoming-with companion species’를 통해 만들어갈 ‘대안적 세계’를 위한 연극적 실천을 상상한다.

*‘Crab’의 철자를 거꾸로 읽으면 ‘짖다(bark)’의 발음과 유사하다. 말장난(pun)을 즐겨 하는 셰익스피어 특유의 선택이다. 이 글이 참조한 번역본인 『베로나의 두 신사』(김종환 역, 지만지드라마, 2019)의 경우에는 음차하여 ‘크라브’라고 썼으나, 이 글에서는 ‘게’로 표기하고자 한다. 셰익스피어는 분명 ‘Crab’이 한국어로 ‘게’라는 사을, 자신이 ‘게’라는 이름의 개를 만들어냈다는 것을 알았다면 크게 기뻐했을 것이다.

글 전영지 공연 칼럼니스트·드라마터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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