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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8월호

사랑의
노래들

드라마 <인간실격> 중 인상 깊게 본 장면이 있다. 멀어질 대로 멀어져 각자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된 오래된 부부 정수·부정이 서로 등을 돌린 채, 아주 낮은 목소리로 고백하는 장면.

“나 너 사랑해. 내 눈도 줄 수 있고, 심장도 줄 수 있고, 다 줄 수 있어.”

“나도 그래. 우린 서로 희생할 수 있지만, 좋아할 수는 없는 거야, 이제.”

서로에게 희생만 남은 그런 사랑을, 두 사람은 힘겹게 이어간다. 신형철 문학평론가의 산문을 다시 읽다 기억 속 이 장면이 다시 떠올랐다.

앞으로 그와 나에게 오래 슬퍼할 만한 일이 일어난다면, 그때 그곳에 우리가 꼭 함께 있었으면 한다. 그 일이 다른 한 사람을 피해 가는 행운을 전혀 바라지 않는다. 같이 겪지 않은 일에 같은 슬픔을 느낄 수는 없기 때문이고, 서로의 슬픔을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우리는 견딜 수 없을 것이므로.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9쪽

나 자신을 저버리는 사랑이 아닌, 오래 슬퍼해야 할 일이 다가온다 해도 기꺼이 함께하는 사랑. 사랑에 대한 나름의 정의를 최근에 다시 내리고 있다.

십 대, 이십 대 때 알던 사랑이 더 이상 없을 거라는 사실에 아쉬워하던 시기가 있었다. 설렘, 호기심, 모든 걸 내던질 듯한 태도 같은 것. 돌이켜보면 정말이지 누군가를 위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그가 나를 위해 뭐든 할 수 있을까 궁금했다. 어떤 운명에 의해 혹 내가 죽음을 맞아야 한다면, 미련 없이 떠날 수도 있다는 그런 상상과 대화를 하기도 했다.

현재의 나는 누가 누구를 위해 뭔가를 해야 하는 상황을 결코 마주하고 싶지 않다. 그저 아이의 손을 잡고, 남은 한 손으로는 남편의 손을 잡고 다가올 행복과 그 이면의 굴곡을 아주 얕게, 잔잔하게 넘으며 가고 싶다. 비슷한 하루하루를 보내며, 크고 작은 성장에 기뻐하며, 서로가 잘 알지 못하는 슬픔이란 없는 채로. 조금 우습지만 태어나서 처음으로 오래 살고 싶다는 생각도 한다. 더 오래 살을 붙이고, 좋은 것들에 관해 이야기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

『G는 파랑』2023의 저자 김지희는 ‘행복은 론도’라는 제목의 짧은 글에서 니콜라이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피아노와 관악기를 위한 오중주를 소개한다.

론도는 하나의 멜로디가 계속 다른 짝꿍을 데리고 나타나는 형식입니다. A-B-A-C-A-D처럼 멜로디는 변하지 않은 채 중간중간에 새로운 친구가 생깁니다. 론도는 듣다 보면 예측이 가능하기 때문에 금세 편한 마음으로 즐길 수 있습니다.
『G는 파랑』, 102쪽

림스키 코르사코프가 1876년에 발표한 이 곡은 바순이 시작해 호른과 클라리넷·플루트로 이어지는 맑은 주제 선율과 경쾌한 피아노 반주가 다시 돌아오고, 또다시 돌아오는, 작은 행복을 싣고 내달리는 낡은 기차 같은 귀엽고 명랑한 곡이다. 김지희의 추천곡에 설명을 덧붙여 보자면, 림스키 코르사코프는 19세기 무소륵스키·보로딘 등과 함께 러시아 국민주의 악파로 활약하며 후대에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말년에는 프로코피예프·스트라빈스키도 가르친 바 있으며, 라흐마니노프 또한 그의 풍부한 관현악 작법을 참고했다.

해군 장교로 복무하며 작곡 활동을 병행하는 독특한 이력을 지닌 이 작곡가는 마치 신세계를 열어 보이듯 아름답고 신비로운 장면들을 다채로운 오케스트라 색채로 실현하며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의 작곡 및 관현악법 교수로 위촉되기도 했는데, 기초 이론도 배운 적이 없던 그는 당시 취임 직전의 불안과 걱정을, 자서전을 통해 고백하기도 했다.

어떤 악보든 초견으로 노래할 수 있었고, 세상 모든 화성을 ‘구별’할 수는 있었지만, ‘6화음’이니, ‘4-6화음’이니 하는 용어는 생소했다. 단지 본능과 귀에 의존하여 각 성부를 올바로 써내려가려고 노력했을 뿐이다. 음악 형식에 대한 이해(특히 론도 형식)도 희미하긴 마찬가지였다. 또 음악을 충분히 다채롭게 들리도록 작곡할 수 있었지만, 현악기 연주법이나 호른, 트럼펫, 트롬본이 발휘할 수 있는 잠재력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위대한 작곡가들의 삶 2』, 333쪽

그러나 림스키 코르사코프는 자신의 취약점을 극복하려 부단히 애써 훌륭한 이론서들을 편찬해 러시아의 상징적인 교육자가 되었다.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음악은 흥미롭고 개성 있는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한편, 보수적인 작법의 특징을 보인다. 론도 형식에 자신이 없고, 호른의 잠재력을 잘 모른다는 작곡가가 쓴 론도 형식의 실내악곡을 듣고 있으니 웃음이 난다. 반짝이는 창조적인 순간의 몰입이 귀로 느껴진다.

온기의 사랑

쇼팽과 라흐마니노프 같은 작곡가들이 쓴 농밀한 사랑의 장면들을 소개하려다 그보다 조금은 현실 세계에 발붙인 사랑의 감각을 재생해본다. 음악감독 요한 요한슨이 참여한 영화 <사랑에 대한 모든 것>2014 사운드트랙은 21세기 영화음악사의 위대한 기록 같은 작품이다. 스티븐 호킹이라는 실존 인물의 일대기를 그린 따뜻한 영화인데, 이 따뜻함이라는 정서에 입체감, 시간성 같은 것을 부여하는 게 요한 요한슨의 음악이다. 관객은 이 음악을 들으며 아득함과 애틋함, 환상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사랑의 위대함,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태도가 만드는 힘 같은 것을 발견해 느낄 수 있다.

사운드트랙의 작법은 대체로 고전음악의 결을 따른다. 영화 <컨택트Arrival>2016나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2015에서 선보인 전위적인 음향 실험과 정반대에 있는, 선율적이고 화음이 풍부한 작품이다. 영상 없이 음악으로만 감상하기에도 손색이 없다.

눈도 주고 심장도 주고 뭐든 다 줄 수 있는, 희생하고 포기하는 사랑이 아닌 아무리 힘든 상황이 와도 기꺼이 함께 나누는, 눈의 고통과 심장의 고통을 조금씩 나누어 짊어지며 희망을 그리는 그런 사랑이 있다. 그 사랑의 순간들 안에 있을 법한 행복이 두 작품 속에 흐른다.

글 김호경 『플레이리스트: 음악 듣는 몸』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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