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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7월호

빛에서 볕으로
향하는 계절에 ― 볕뉘

겨울이 빛에 관해 이야기하는 계절이라면, 여름은 확실히 볕에 관해 이야기하는 계절이다. 빛이 발하는 것이라면 볕은 내리쬐는 것이다. 커다란 빛 앞에서 눈을 가리고 따가운 볕 앞에서 손차양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빛은 때때로 감당할 수 없는 것이면서, 어딘가에 있기를 우리가 늘 바라는 것이다. 볕은 추울 때 절실하지만, 그 정도가 지나칠 때면 우리는 어떻게든 그것을 피하려고 한다. 사람은 빛낼 수 있지만 볕을 낼 수는 없다. 안에 있는 온기를 애써 전달해도 상대가 그것을 볕으로 받아들일지 모를 일이다. 쐬거나 쬐지 않고 따갑다고 손사래를 칠 수도 있다. 참으로 고약한 볕이다.

이럴 때면 사는 데 있어 먹는 일이 얼마나 필연적인지 온몸이 알아차리곤 한다. 우리는 단순히 밥만 먹는 것이 아니다. 겁도 먹고 충격도 먹는다. 누군가는 이익이나 공금, 뇌물을 먹기도 한다. 자칫하다 한 방 먹는 경우 또한 비일비재하다. 1등을 먹는 상황은 손에 꼽지만, 무방비 상태에서 한 골을 먹는 일은 예사다. 약속을 잊어먹으면 사방에서 날아드는 욕을 먹어야 한다. 좀 먹듯, 벌레 먹듯, 버짐 먹듯 상하는 마음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가만있어도 먹는 것이 있다. 다름 아닌 산소다. 무의식적으로 하는 호흡 덕분에 우리는 여름에는 냉면을, 겨울에는 국밥을 먹을 수 있다. 그럴 때 식사는 꼭 덤 같다. 빛이 온기를 데려오는 것처럼, 볕이 열기와 함께 오는 것처럼.

그리고 여름, 우리는 별수 없이 또 더위를 먹는다. 습기를 먹는 것 또한 잊지 않는다. 먹는 일이 우리 소관 밖의 일인 것만 같다. 가만있어도 얼굴이 따갑다. 그 얼굴 위로 땀이 줄줄 흐른다. 따가운 볕을 땀으로 만드는 게 여름에 사람이 과연 해야 할 일인지 자문하기도 한다. 더위를 먹을 때 공교로운 것은 우리가 무언가를 먹고 있다는 느낌이 좀체 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산소를 먹는 일과 다른 점이 있다면, 더위를 먹으면 꼭 몸에 탈이 난다는 것이다. 어지럼증과 함께 눈앞이 희뿌예지는 경험을 하기도 하고, 심하면 극심한 복통에 시달리거나 온몸의 기운이 단박에 빠지기도 한다. 그제야 자신이 뭔가를 먹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날씨 앞에서 우리는 무력한 존재다.

프랑스 작가 귀스타브 플로베르Gustave Flaubert는 『통상 관념 사전Dictionnaire des idées reçues2023(책세상)에서 날씨를 이렇게 정의한다. “대화의 영원한 주제. 질병의 보편적인 원인. 언제나 날씨에 대해 불평할 것.” 누군가를 만났을 때 별달리 할 말이 없으면 “날이 참 좋지요?” “오늘 참 덥네요”와 같은 말을 건네는 장면이 연상된다. 날이 좋을 때는 인사말로 그치지만, 나들이나 여행을 계획했을 때 날이 흐리면 우리의 불평불만은 하늘을 찌른다. 더위를 먹고 추위에 떨다 우리가 종래 아프게 되는 것을 상상하면 세기를 뛰어넘은 혜안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그가 정의한 여름은 더 가관이다. “여름은 덥든 춥든, 건조하든 습하든, 언제나 ‘이례적이다.’” “이례적인 불볕더위” “사상 초유의 장마” 같은 머리기사로 우리의 눈길을 잡아끄는 뉴스를 떠올려 보라.

날씨는 관계에도 영향을 미친다. 인간人間에서 ‘사이’를 내팽개치고 사람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것도 바로 볕이다. 볕은 불쾌지수를 높이고, 이는 시시로 갖은 짜증과 이유 없는 비난으로 연결된다. 더위 먹은 사람 앞에서는 겁먹는 자세가 아니라 선선히 욕먹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는 지금 볕과 습기에 공먹히고 있으므로, 최대한 관용적인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어야 한다. 볕에도 세기에 따라 다른 이름이 붙는다. “따갑게 내리쬐는 뜨거운 볕”을 가리키는 땡볕은 그럭저럭 버틸 만하다. “몹시 뜨겁게 내리쬐는 햇볕”을 가리키는 불볕보다 “여름날에 강하게 내리쬐는 몹시 뜨거운 볕”을 뜻하는 뙤약볕이 더 강한 볕이다. 여름날의 볕은 습도와 결합해 우리를 타드는 동시에 녹아내리게 하기 때문이다.

빛이 밝기의 대명사라면, 볕은 온도의 대명사다. 빛이 때때로 ‘색’을 가리킬 때, 볕은 ‘햇빛으로 생기는 따뜻하고 밝은 기운’의 자리를 꿋꿋이 지킨다. 어찌 보면 빛이 볕보다 먼저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낯빛’과 ‘낮볕’처럼 한날한시에 태어나는 일도 있을 것이다. 낮볕을 받은 낯빛은 당연함과 어쩔 줄 모름 사이에서 갈팡질팡할 것이다. ‘햇살’은 빛과 볕을 다 포함하는 단어다. 햇살은 “해에서 나오는 빛의 줄기. 또는 그 기운”을 뜻하는데, 빛의 줄기를 가리킬 때는 빛으로, 기운을 드러낼 때는 볕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해가 솟아오를 때의 볕을 일컬어 ‘돋을볕’이라고 한다. 싹이 돋을 때처럼 아직은 제 속내와 가능성을 온전히 내보이지는 않는다. 새싹을 보고 반사적으로 느끼는 감정이 귀여움인 것처럼 돋을볕 앞에서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볕이 나 있는 날 잠깐 오다가 그치는 비”를 우리는 여우비라고 하듯, “비나 눈이 오는 날 잠깐 났다가 숨어 버리는 볕”을 가리켜 ‘여우볕’이라고 한다. 여우비든 여우볕이든 얼마 되지 않는 매우 짧은 동안 얼굴을 내비치기 때문에, 사라지고 나면 얼마간의 아쉬움이 남는다. “햇볕이 잘 드는 곳에서 볕을 쬐는 일”을 가리켜 ‘볕바라기’라고 하고, “햇볕을 오랫동안 받아 원래의 색깔이 바래게 되는 일”을 일컬어 ‘볕바램’이라고 한다. 볕을 바라면서도 볕에 바래는 것은 거부하는 것이 바로 우리네 인생살이다.

올여름도 온갖 이례적인 상황으로 가득할까. 땡볕과 불볕 사이에서 땀을 훔친다. 그을린 표정으로 얼음이 잔뜩 들어간 음료를 거침없이 들이켠다. 속이 잠시 울렁거려서 손바닥으로 가슴을 쓸어내린다. 이제 그늘을 찾아야 한다. 이럴 때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낱말이 ‘볕뉘’다. 볕뉘는 실로 아름다운 단어다. 이 단어의 첫 번째 뜻은 “작은 틈을 통하여 잠시 비치는 햇볕”이고, 두 번째 뜻은 “그늘진 곳에 미치는 조그마한 햇볕의 기운”이다. 작다, 잠시, 그늘지다, 조그마하다 등의 의미가 한데 모여 있는 낱말인 셈이다. 쥐구멍에 볕 들 날, 얼마나 근사하겠는가. 그늘에서 만나는 조그마한 햇볕은 또 얼마나 사랑스럽겠는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볕뉘의 세 번째 뜻이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는 보살핌이나 보호”가 바로 그것인데, 이 볕뉘는 사랑으로부터 뻗어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햇볕이 뻗고 나뭇가지가 뻗고 칡넝쿨의 뿌리가 뻗는다. 다리를 쭉 뻗고 쉬다가 팔을 뻗어 사람의 손을 맞잡는다. 사람에서 다시 인간으로 돌아올 시간이다. 다름 아닌 ‘사이’가 절실한 시간이다. 볕이 있어서 실로 다행이다. 이때의 볕은 어떤 커다란 빛과도 맞바꿀 수 없다.

글 시인 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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