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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6월호

'오래된 미래' 를
걷는 시간

문득 여름이 끝났다고 느낀 어느 날 창덕궁에 간 적이 있다. ‘궁궐을 걷는 시간’이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운영자는 문화유산교육전문가 자격과 숲 해설가 자격을 갖춘 이시우 작가로, 일찍이 『궁궐 걷는 법』2021(유유)을 펴낸 분이었다. 당시 나는 여러 일로 제법 심란한 상황이었는데, 멀리 여행을 떠날 수도 없어서 자연을 품은 궁궐로 향했다. 그전까지만 해도 궁에 가면 가장 큰 문에서 출발해 오른쪽으로든 왼쪽으로든 한 방향으로 쭉 돌고서는 ‘다 본 건가?’ 하는 마음으로 애매하게 나오곤 했는데, 이번엔 달랐다. 궁궐의 식물을 관찰하는 프로그램이었기에 창덕궁의 나무와 들꽃, 멀고 가까운 풍경을 원 없이 누리며 걷다 보니 어느새 구중궁궐이었다. 분명 궁궐 문턱이 닳도록 드나든 사람만이 꾸릴 수 있는 코스였다. 그런 든든한 안내인이 2년 반 만에 어린이들을 위한 ‘궁궐 탐험대’ 시리즈를 펴냈다. 첫 타자인 『재밌게 걷자! 경복궁』2024(주니어RHK)을 펼친 순간, 그날의 습한 공기가 코끝에 훅 끼쳐왔다.

궁궐에 대한 사랑이 어마어마하고 마음이 따뜻한 분이니 좋은 글이 나오리란 건 알았지만 이렇게나 귀여운 책일 줄은 몰랐다. 서평화 그림작가 덕분이리라. 그림은 궁의 위엄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고루한 느낌이 없고, 궁궐의 귀여움과 아기자기함을 오색빛깔로 뽐내고 있었다. 책의 만듦새는 또 어떤가. 어린이책답게 글씨는 시원시원했으며, 들고 다니기 편한 크기였고, 표지 안쪽은 분리해서 지도로도 활용할 수 있었다. 집에서만 읽기엔 너무 아까운 책이었다. 휴일이 많던 5월의 어느 오후, 그렇게 나는 경복궁으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광화문 옆 분식집에서 라면과 김밥으로 배를 든든히 채우고 광화문 앞으로 걸어갔더니 월대가 앞으로 나와 있었다. 궁궐 앞에 높고 넓게 쌓은 단으로 무대로도 활용했다는데, 일제 강점기 때 어이없이 사라진 유산이었다. 그 월대가 복원되자 해태도 제자리를 찾아 월대 맨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고운 한복을 입고 사진을 찍는 외국인들 사이에서 책을 펼치니 완전히 여행자의 기분이 되었다. 궁궐 유지에 도움이 될까 싶을 정도로 저렴한 표값을 지불하면서, 한편으론 그 덕에 마음 편히 오는 시민들이 있으리라는 생각도 잠시 해 보았다.

경복궁은 십 년 전이 마지막이었나. 경복궁을 떠올리면 마음은 좋으면서도 산책으로는 조금 부담스러운 규모라는 느낌이 늘 있었다. 그렇지만 오늘은 다르지! 일말의 걱정 없이 책에서 소개하는 장소마다 멈춰서 꼼꼼히 읽고 다음을 향해 걸었다. 근정전 마당의 정1품 자리에서는 ‘앗, 내 자리네’ 하는 개그를 하고, 강녕전에 가서는 뒤쪽 교태전으로 쏘옥 걸어갔을 왕을 상상해보고, 바깥 외출을 잘하지 못하는 왕비를 위해 만든 아미산 앞에선 애처로움에 잠시 젖어보기도 했다. 탐험대장님(어느새 대장님으로 추대되었다!)이 내준 탐험 미션 덕분이다. 탐험 미션은 답이 정해진 것도 있고 내 상상력이 정답이 되기도 하는 질문들인데, 답을 거듭할수록 조선의 진짜 정승이 된 기분으로 걸을 수 있었다.

확실히 이 책은 어린이 눈높이에 맞는 설명을 하기 위해 고민한 흔적이 역력했다. 『궁궐 걷는 법』을 같이 읽었더니 더욱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같은 풍경을 설명할 때도 단어 하나, 표현 하나를 듣는 이에게 맞춰 바꾸려고 애쓴 마음이 전해졌다. 어른은 『궁궐 걷는 법』을, 아이는 『재밌게 걷자! 경복궁』을 나란히 들고서 걷는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지금까지 출간된 궁궐 안내서 또한 누군가의 노고가 담긴 귀한 자료지만, 이번 안내서는 제목 그대로 정말 ‘재밌게’ 걸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엄격하고 근엄하고 진지한 줄만 알았던 궁궐이 입체적으로 살아났다. 궁궐 속 수십 채의 건물에서 웃고 울고 먹고 자고 버선발로 뛰어다녔을 이들이 저 멀리서 지나가는 듯했다. 책이 아니면 절대 몰랐을 궁궐의 귀여움을 엿봐서일 테다.

경복궁은 조선의 으뜸가는 궁궐이지만 역사를 보면 조선의 처음과 끝을 함께했을 뿐 중간에 300여 년은 존재가 미약하다.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돼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1865년 재건을 시작해 꾸준한 복원이 이뤄졌고, 지금 이 순간에도 복원이 진행되고 있다. 이 과정에는 말로 다할 수 없는 기막힌 조선의 운명이 담겨 있다. 그런 역사를 똑똑히 목도하며 온몸으로 견뎌낸 경복궁은 생색을 내는 대신 고요한 품을 내어주고 있었다. 구석구석 피어난 꽃들, 크고 진한 그늘을 드리운 나무, 잔물결이 이는 경회루의 연못… 그 사이를 걷는 이들은 평화로운 풍경의 마지막 조각이었다. 눈과 마음이 절로 환해지는 시간이었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함께하며 경복궁 산책을 마치고 싶었으나 급격한 체력 저하로 중간쯤 빠져나오게 되었다. 전 같았으면 내가 어디서 어디까지 보고 나오는지도 몰라서 고개를 갸웃거렸을 텐데, 이번엔 내가 선 자리를 파악해 다음을 기약하며 나올 수 있어 기뻤다. 다음 산책은 책의 절반이자 경복궁의 절반인 동쪽과 북쪽을 거닐어보기로 했다. 백호가 배웅하는 영추문을 나서는데 무척 산뜻한 기분이 들었다. 책이 나의 행동을 이끈 게 정말 오랜만이기 때문이다. 늘 곁에 있어 언제든 갈 수 있다는 자신만만함에 외려 잘 모르게 되어버린 존재를 제대로 알았을 때의 기쁨이란! 걷기 좋은 계절이 돌아오면 좋아하는 친구에게 든든한 경복궁 안내인이 되어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앞서 말한 대로 이 책은 시리즈물이라 아직 네 곳의 궁궐이 더 남아 있다. 나는 이 든든하고 다정하고 박식한 궁궐 전문가가 다른 궁궐들을 어떻게 풀어낼지 몹시 궁금하다. 겹겹이 쌓인 과거의 시간이 미래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아직 알아야 할 궁궐이 남아 있고, 읽어야 할 책과 걸어야 할 곳이 남아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글 제목의 ‘오래된 미래’는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Helena Norberg Hodge의 책 제목에서 빌려왔습니다.

글 『아무튼, 드럼』 저자 손정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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