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품과 관조의 자세
무엇이 그리 힘들었을까, 생각해보니 고상함을 좇느라 그랬다. 피아니스트 크리스티안 지메르만Krystian Zimerman의 내한 독주회 객석에 앉아 깨달았다. 품위 있게 살고자 하는 마음이 절망과 피로감을 가져다주었음을. 대체로 싸워야 하고, 이겨서 가져야 하고, 죽이거나 드러내야 하는 세계에서 ‘아, 역시 별수 없지’라며 정당화와 합리화를 하던 순간마다 야금야금 갉아 먹힌 그 마음을. 실망이 반복되면 회복의 탄력은 사라진다. 지메르만이 연주하는 쇼팽의 작품을 들으며 닿고자 했던 이상을 다시 확인했다.
지메르만은 그렇게 ‘기품’이라는 단어를 객석에 뭉게뭉게 밀어 넣더니 어떻게 마음의 혼란을 잠재울 수 있는지 그 해답도 제시했다. ‘관조’. 서두르고 또 비난하다 넘어지고 좌절하던 나에게 관조의 자세를 행해 보인다. 고요한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를 바라볼 것. 아름다움을 계속 추구하며 인내할 것. 다른 이들의 시선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에 침잠하고 나면 앞으로 나아갈 힘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아름다운 가르침. 쇼팽과 드뷔시·시마노프스키와 앙코르곡으로 이어진 라흐마니노프·슈만까지 내 안에 지적 자양분을 꾹꾹 눌러 담고 돌아와 연초에 어울릴 만한 피아노곡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어 본다. 가볍고 활기찬 시작도, 비장한 시작도 모두 좋지만, 요란하지 않은 차분한 시작도 의미가 있으니.
고요한 밤으로부터
쇼팽은 특히 기품과 관조가 어울리는 작곡가다. 170센티미터에 마른 체구였던 이 예술가는 많은 이가 들어찬 큰 홀에서 뽐내듯 공연하는 걸 싫어했다. 살롱 음악회 같은 작은 규모의 연주를 선호했다. 바흐와 모차르트를 존경했으며, 동시대 함께 활동했던 슈만의 지나치게 감성적인 면모, 리스트의 화려한 대중성은 버거워했다고 기록돼 있다.
쇼팽은 당대 손꼽히는 뛰어난 피아니스트였고, 작곡가로서도 피아노라는 악기를 중심에 둔 채 여러 악기의 소리를 응집하듯 작품 목록을 확장해갔다. 쇼팽의 피아노곡들은 큰 소리를 내는 법 없이 다채로운 이야기를 구사한다. 정교하게 압축된 형식으로 음악적 의미를 깊이 파고든다. 화려하기보다는 세련된 기술을 창조해냈으며, 감정 과잉 없이 절제된 언어로 아름다운 시를 그려간다.
녹턴 9번 중 두 번째 곡은 작곡가 생전에도, 오늘날에도 가장 많은 이의 사랑을 받는 쇼팽의 대표곡이다. 언제 들어도 마음을 요동치게 하는 이 선율을 새해의 풍경 속에 다시 걸어본다. 3박자의 우아한 반주와 뻗어나갈 듯 뻗어나가지 않고 온화하게 맴도는 오른손의 선율이 작고 따뜻한 빛이 감도는 어느 밤으로 듣는 이들을 데려간다. 무대 위 지메르만은 담백하고 깔끔한 해석을 들려주었는데, 거의 모든 피아니스트가 사랑하는 곡이니만큼 선택지가 많다. 아르투르 루빈스타인Arthur Rubinstein이 남긴 섬세한 기록물부터 시대를 대표하는 조성진의 황홀한 연주까지 역사가 이어진다.
쇼팽은 녹턴?왈츠?폴로네즈?전주곡?연습곡?변주곡?발라드?스케르초?소나타 등 포괄적인 제목을 붙인 피아노 작품을 200여 곡 가까이 작곡했고, 거의 모든 곡이 오래도록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 네 개의 발라드 중 마지막 곡은 특히 감정의 밀도가 높아 긴 여운을 남긴다. 서주와 두 개의 주제를 변형시켜가는 가운데 명상적이고 서정적인 분위기, 격렬한 열정, 그리고 갑자기 흐르는 적막을 대비시키며 완벽한 몰입을 이끈다. 영국의 평론가 조앤 치셀Joan Chissell은 이 곡의 도입부를 두고 “난생처음 세상을 보게 된 맹인이 느낄 법한 경이로움을 전해 준다”고 묘사했다. 지메르만의 1980년대 오래된 녹음이 도이치 그라모폰 레이블에 남아 있다.
따뜻하고 포근한 새벽으로
무대 위 지메르만이 연주하는 드뷔시 ‘판화’를 듣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라벨 ‘물의 유희’와 드뷔시 ‘물의 반영’을 번갈아들었다. 1800년대 말, 1900년대 초 화려했던 파리의 강가에 선 이들이 빛처럼 번지는 감각을 음표로 뒤바꾼 순간들을 상상해본다. 온갖 역사·문화적 모순을 끌어안은 채, 일상과 동떨어진 아름다움을 향한 천착.
라벨이 1901년에 발표한 ‘물의 유희’와 드뷔시가 1905년에 쓴 ‘물의 반영’은 섬세한 아르페지오와 장식음으로 물결의 움직임을 표현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라벨이 소나타 구조로 규칙적인 리듬, 또렷한 선율을 들려주는 데 반해 드뷔시는 조금 더 자유로운 방식으로 빠르게 흘러가는 물의 이미지를 전개한다. 시각적으로는 라벨이 글리산도와 트레몰로 같은 기법으로 물의 순간적인 이미지를 표현했다면, 드뷔시의 시선은 보다 멀리 있는 느낌이다. 음악의 언어를 쇄신하는 위대한 혁신이 형체를 지우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신비롭고 또 공허하다. 중요한 일은 때때로 아주 조용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지메르만의 마지막 앙코르곡이기도 했던 슈만의 ‘세 개의 로망스’ Op.28 2번을 플레이리스트의 마지막 곡으로 담아본다. 악보의 앞머리에 쓰인 지시어는 ‘단순하게Einfach’. 포근하고 따뜻한 이 짧은 곡으로 ‘녹턴’이 연 밤을 근심 없이 편안히 닫을 수 있다.
글 『플레이리스트: 음악 듣는 몸』 저자 김호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