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실향민의 마음을 어루만진 수호신,
밤섬부군당도당굿
1968년 신문지상을 뜨겁게 달군 뉴스가 있었다. 신비의 섬, 밤섬이 사라진다는 것. 한창 공사 중인 여의도가 물에 잠기지 않도록 한강 하류를 넓히고자 결정된 일이었다. 2월 10일 암석과 모래로 덮여 있던 섬엔 폭발음이 울렸고, 약 4개월에 걸쳐 섬은 지도에서 사라졌다.
“한강 여의도 옆에 위치한 전설의 섬마을 밤섬(율도)이 ‘근대화’에 쫓겨 자취를 감추게 됐다. 김현옥 당시 서울시장은 10일 오후 3시 밤섬 폭파 작업의 첫 스위치를 눌렀으며 이 섬은 오는 5월 말까지 이 땅 위에서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다. (…) 이 섬은 17,393평. 현재 78가구 643명이 대대손손 이어오며 살았지만, 병이 없고 도둑이 없다는 신비의 마을. 또 하나의 특색은 마, 판, 석, 인, 성 씨 등 희성이 많으며 자신들의 은총을 받는다는 부군 신을 모시고 있다.”(‘근대화에 밀려 수장되는 한강 섬마을 ‘밤섬’ 폭파’, 『조선일보』, 1968년 2월 11일, 7면)
“서울시는 한강 개발과 여의도 건설의 일환으로 하구를 넓혀 한강 물이 잘 빠지게 하기 위해 10일 오후 3시 총면적 17,393평의 ‘밤섬’을 폭파한다. 이곳엔 부군 신을 모시는 사당을 만들어 17대를 이어 살아온 62가구 443명이 살고 있으며 어업과 도선업에 종사하고 있다. 밤섬은 주로 돌산으로 되어 있는데, 서울시는 공사비 5,480만 원을 들여 이 섬을 없애고 여의도 축석에 필요한 잡석 114,000m3를 캐낼 방침이다.”(‘오늘 오후 3시 밤섬 폭파’, 『동아일보』, 1968년 2월 10일, 7면)
이곳 주민들은 밤섬이 내려다보이는 마포구 창전동에 집단 이주했고, 섬을 나오면서 마을의 수호신처럼 여겨지던 부군을 모시고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마을 사람들은 섬을 나오는 날까지 전기 대신 부군등을 켜고 어둠을 보냈으며, 밤섬 앞을 흐르던 깨끗한 한강을 식수로 사용하면서도 탈 난 이가 한 명도 없었다고 입을 모은다. 그리고 그것을 부군당의 비호 덕분으로 여겼다. 딱 두 번, 피할 수 없던 재난 상황이던 을축년 장마와 6.25 전쟁 외에는 그 어떤 재난도 겪은 일이 없었을뿐더러, 이 두 번의 재난에도 기와 한 장 깨지지 않은 채 그 모습을 유지하는 부군 신당을 보며 그에 대한 신심이 깊어진 것이다.
하지만 섬 바깥의 시선은 이와 달랐다. 『조선왕조실록』 중 「명종실록」의 기록을 보면, 밤섬이 폐쇄적이고 지나치게 개방적인 성문화를 지닌 곳이라 여겼다.
“남녀가 서로 업고 업히며 정답게 강을 건너는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았다. 또한 동성동본이나 반상을 따지지 않고 의논에 맞춰 살면서 조금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폐쇄적이기에 전염병이나 개발로 인한 환경 파괴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개방적으로 보일 수 있는 문화가 어업으로 한정된 척박한 땅에서 번영과 안정을 가져다줬을지 모를 일이다.
밤섬 주민들이 모셔 온 부군당은 화주청을 지닌 당집형 제당 한 칸으로 꾸려졌다. 공민왕·노국공주·마부·최영 장군·삼불제석 등 무신도가 걸렸고, 유교 제례와 무속 의례가 더해진 의식을 행했다.
당주무당 김춘감과 악사 김찬업 남매가 주축이 돼 굿판을 이끌었고, 연구자들에 의해 정리된 바에 따르면 2000년대까지 밤섬부군당도당굿의 절차는 주당물림-유가돌기-부정-가망청배-부군거리-본향말명-마지올림-장군거리-별상거리-신장거리-대감거리-불사거리-군웅거리-창부거리-뒷전으로 이뤄졌다. 이 중 부군거리가 굿의 절정을 이루는 판이다. 그런 의미에서 부군거리를 눈여겨보는 것도 좋겠다. 또, 집마다 돌며 액운을 떨치고 복을 빌어주는 ‘유가돌기’도 빼놓을 수 없다. 유가돌기는 1990년대 사라졌다가 2000년대 다시 생긴 것으로, 밤섬부군당도당굿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집단 이주 전에는 ‘산돌기’라 해서 무녀와 제관들이 밤섬 곳곳을 돌았고, 집단 이주 이후에는 당주무당이 밤섬 이주민을 중심으로 유가돌기를 하며 이들의 결속을 다졌다. 주당물림 이후에는 밤섬 사람들이 사는 곳의 범위를 잘 아우른다는 뜻의 ‘동네 마우리’를 했는데 도시 개발의 여파로 발생한 실향민의 아픔을 어루만지기 위한 하나의 위로이자 이들의 안정적인 정착과 도약을 위한 응원과도 같다.
이 같은 격려의 의미를 담은 의례가 관 차원에서 만들어지기도 했는데, 바로 ‘귀향제’다. 귀향제는 실향민을 위로하는 목적 외에도 지역문화 홍보라는 대의를 위해 만들어졌다. 하지만 기존 무속 의례에 비해 주민 참여도가 현격히 떨어졌다고 한다. 아무래도 관 차원의 위로가 실향민들에게는 잘 전달되지 않은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의 공적 조직이 부군당제의 지원 단체로 등장하는 것은 마을굿의 유지와 형성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밤섬부군당도당굿이 열리는 마포구 역시 마포문화원이 하나의 축으로 등장해 마포 지역 마을굿을 지원하고 있다.
1980년대 이후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전통문화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밤섬부군당도당굿 역시 여러 민속학자와 언론의 관심을 받았다. 1999년에는 관계자가 모인 가운데 큰 굿을 벌이기도 했는데, 2000년대에 들어서며 이런 관심도 사그라들었다. 다행히 2005년 1월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밤섬부군당도당굿은 그 명맥을 이어올 수 있었다. 문화재 지정의 의미는 가치를 지닌 문화재라는 평가이기도 하지만, 사라져가기에 지켜야 하는 문화로 인식된다는 점을 다시금 상기해야 할 것이다.
학창 시절, 새벽이슬이 내린 한강 다리 위를 지날 때마다 꺼져가듯 내려앉는 눈꺼풀을 여닫으며 바라본 여의도는 그렇게 차갑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지금 와 돌이켜보면 60년 전 고향을 떠나온 밤섬 사람들에게는 여의도의 너른 땅이 그저 차가울 뿐이었을까. 마포구 창전동 언덕길에서 내려다보이는 여의도 도심의 불빛이 야속하게 느껴지진 않았을까. 도시 개발과 민속에 대한 천대, 또 다른 이유에서의 관심과 홍보 콘텐츠로 여겨진 밤섬부군당도당굿은 민속적 심정을 품은 현대인에게 끊임없이 긴 생각의 사다리를 놓아준다.
글 칼럼니스트 김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