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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6월호

고전을 고쳐 쓰는 소녀들

무대 위 소녀들은 사랑을 꿈꾸곤 했다. 마치 ‘건실한 자궁’이 되는 것이 유일한 장래 희망인 듯, 소년들과의 성과 사랑에 대해서만 수줍게 노래했다. 그녀들의 꿈은 이미 이처럼 아주 빈곤했으나, 비극적 무대는 이조차 기어코 짓밟아 그녀들은 자살하거나, 강간 당하거나, 강간 당한 후 자살했다. 옛 남성 작가들이 여성 인물을 형상화하는 데 있어 당최 재능이 없었다는 건 너무나도 잘 알려진 터, 훈련된 독자·관객이라면 작가의 편협한 상상력은 잠시 괄호 치고 나머지를 즐기는 일에 능숙할지도 모르겠다. 결코 자랑할 일은 아니지만 나 또한 훈련이 적지 않아 무딘 마음으로 무대를 대하는 것에 익숙한 편이나, 완전히 새로운 형식으로 재창작되어 관객을 찾을 때조차 전혀 달라지지 않는 소녀들의 협소한 관심사와 속절없는 죽음을 바라보고 있자면, 여지없이 분노와 슬픔이 교차하곤 한다. 이를테면, 프랑크 베데킨트Frank Wedekind의 『눈뜨는 봄』1890-91이 뮤지컬 <스프링 어웨이크닝Spring Awakening>(오프 브로드웨이2006, 한국 초연2009)으로,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Federico Garcia Lorca의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1936이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Bernarda Alba>(오프 브로드웨이2006, 한국 초연2018)로 다시 찾아왔을 때가 그런 순간이었다.

동의할 수 없는 요소들이 선연한 ‘수작秀作’을 마주할 때면 마음이 양방향으로 동시에 잡아당겨진다. 전통적인 뮤지컬 어법을 사뿐히 위반하며 혁신적인 무대언어로 청소년의 사랑과 욕망과 분노를 분출하는 <스프링 어웨이크닝>. ‘고루한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예기치 않은 동요’라는 평을 받기도 한 이 놀랍도록 아름답고 슬프고 역동적인 작품에서도, 소녀들은 참으로 ‘고루한’ 인생을 산다. 소년들은 학교에 다니고 문학을 읽고 죽음에 관해 토론하는 사이, 소녀들은 오직 소년들에 대한 이야기에 하염없다. 그리고 바로 그런 소녀 중 하나였던 벤들라는 예상치 못한 임신 끝에 원치 않은 중절수술 도중 죽음을 맞는다. 뮤지컬 창작자들은─출판된 희곡 서문에─원작의 멜키어와 벤들라의 관계가 마치 ‘데이트- 강간’처럼 보여 둘 사이의 사랑이 쌓여나가도록 장면을 재배치하고 벤들라가 사랑을 스스로 감각하고 노래하도록 가사를 추가했다고 말하나, 벤들라의 운명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베르나르다 알바>의 경우는 더욱 씁쓸하다. 이 작품이 2018년 우란문화재단에서 놀라운 역량을 지닌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 배우들에 의해 ‘올-여배극all-female cast’으로 무대화되었을 때, 관객들은 환호했다. 공연의 환희가 채 가시지 않은 극장에서 커튼콜 동안 배우와 관객이 함께 눈물을 훔친 기억이 생생하다. 그러나 애석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던 퇴근길에 대한 기억 또한 생생하다. 이야기 때문이다. 고작 ‘동네에서 가장 멋진 남자’라는 한 사내를 두고 세 자매가 갈등하다 결국 그중 한 명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원작의 고루한 서사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끊임없이 지워내는 세계 속에서 그저 사랑에 매달렸던 소녀들의 이야기와, 그 무엇도 될 수 있을 것처럼 보였고 실제로도 그러했던 여성 배우들의 역능과 존재감이 부딪혀, 그 순간을 설명할 언어를 찾을 수 없었다.

2023년 봄, 국립창극단이 웹툰 <정년이>(서이레 글·나몬 그림)를 각색해 다시 여성국극을 소개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같은 이유로 만감이 교차했다. 여성국극은 창무극唱舞劇의 일종으로, 1948년 국악계의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남성 문화에 대한 여성 국악인들의 도전으로 시작해 6.25전쟁을 전후로 믿기 힘들 정도의 인기를 누렸던 여성 연희자 중심의 공연예술 장르다. 다시 말해, 여성국극은 여성 배우가 모든 배역을 연기하고 소리하고 춤추는, 즉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여성 배우들의 무대로서, 특유의 비규범적이고 젠더 전복적인 매혹으로 국극 공연이 거의 사라진 이후에도 오래도록 많은 연구자와 예술가의 주목을 받아왔다. 여성국극의 남역 배우들은 <정년이> 속 대사처럼, “남자됨과 여자됨이 [얼마나] 가소로운지”를 웅변하며, “세상의 역할극을 망치는” 유쾌한 놀이를 상상케 해온 것이다. 그러나 이 경쾌한 상상을 주저앉히는 것은 또다시─주로 남성 작가들에 의해 구축된─서사였다. 여성국극 레퍼토리의 대부분은 전형적인 신파 로맨스극으로─ 이 또한 <정년이> 속 대사가 명쾌하게 짚어내듯─“맨날 공주는 잡혀가고 왕자는 구해주는” 이야기들이기 때문이다.

창극 <정년이> 또한 극을 여는 소리 ‘이 시대의 왕자들이 온다’를 통해 국극단을 “왕자가 사라진 시대의 왕자”라고 소개하며, 여성국극에서 최고의 배우에게 허락되는 왕자 역할을 맡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윤정년의 이야기를 따라간다. 여성국극의 대표 레퍼토리인 <춘향전>, <자명고>와 함께 새로 창작된 <쌍탑전설>이 극중극으로 소개되는데, 이는 여성국극의 서사가 가부장제 세계관 안에 얼마나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는지를 확인하게 한다. 그러나 <정년이>는 과거에 공연되던 여성국극의 이야기를 단순히 되풀이하지 않는다. 관객의 마음을 붙드는 것은 이 작품들의 배역이 아니라 ‘배우’다. 춘향과 몽룡, 아사녀와 아사달, 낙랑공주와 호동왕자가 아니라, 윤정년·허영서·권부용·백도앵·박초록· 홍주란 등이 관객이 직접적으로 마주하는 인물들인 것이다. 노력하고 경쟁하고 연대하는 이 소녀들은 춘향·아사녀·낙랑공주와는 다른 꿈을 꾸며, 관객 또한 소녀들의 다른 삶을 상상하게 한다. 아무리 납작한 서사라도 그것을 구현하는 배우는 자신의 역능과 주체성을 통해 서사를 배반할 수 있으며, 그러한 전복을 감각하는 관객은 극의 서사와는 다른 서사를 스스로 구축할 수 있음을, <정년이>는 이처럼 여러 층위를 통해 입체적으로 실현하는 것이다. 여성국극의 팬들이 남역 배우의 ‘이상적 남성’ 연기 속에서 여성에 대한 자부심을 발견했던 바로 그 방식으로 말이다.

<정년이>는 이렇게 여성국극을 이어 쓴다. 그 위에 다른 이야기를 덧입혀 다시 쓴다. 옛이야기는 그저 지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고전을 다시 쓰는 까닭은 고쳐 쓰지 않고는, 덮어 쓰지 않고는 그 이야기들이 스스로 사라지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정년이>는 모든 소녀가 왕자가 될 수 있다고, 그러나 그 왕자가 소년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모두에게 같은 모습도 아닐 거라고, <정년이> 속 소녀들처럼 별나고 다른 꿈을 마음에 품은 소녀들에게 말한다. 다른 꿈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그 말, 고전이 오래도록 소녀들에게 전하는 데 실패한 말이 아니던가. 나에게 이 말은 성년이 비성년에게 전해야 하는 유일한 전언傳言 같아 어떤 고전 작품들은 기필코 전복되기를, 그리고 꼭 고쳐 쓰여 다시 찾아오기를 바란다.

전영지 드라마터그·공연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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