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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5월호

하늘이 높고 맑을 때
종묘와 종묘제례악

세종 7년1425, 종묘 제향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왕은 이조판서를 불러 말했다 “우리는 향악을 익혀왔는데 종묘에서는 당악을 먼저 연주하고 마지막에 이르러 향악을 연주하니 조상들이 평소 익히 듣던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 어떠한가.” 그로부터 5년이 흘렀다. 왕은 또다시 “아악(당악)은 본래 우리나라 음악이 아니므로 평소에 익히 듣던 음악을 제사용으로 쓰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살아서 향악(조선의 음악)을 듣다가 죽으면 아악을 연주하니 어찌 된 셈인가”라며 그 모순을 지적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왕의 첫 외침 후 무려 24년 만인 세종 31년1449, 조선 역대 왕의 문덕과 무덕을 찬양하는 정대업과 보태평이 회례악무會禮樂舞로 창제됐고, 가야금과 삼죽(대금·중금·소금) 같은 조선의 악기를 더한 제례악이 탄생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종묘제례악이다. 여기서 종묘제례악은 역대 조선 왕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낸 종묘대제와 그에 수반되는 악가무 일체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종묘사직을 운운하며 나라의 존폐를 고민하던 시기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나, 종묘대제는 축소와 확대를 거듭하며 500년 넘게 이어졌다. 팬데믹과 정전 보수로 인해 몇 년째 영녕전에서 5월에만 진행하고 있지만, 본래 11월까지 일 년에 두 번 역대 조선 왕의 신위를 모시고 종묘대제를 지냈다.

종묘대제를 지내는 두 사당, 종묘에서 가장 큰 건물인 정전에는 태조와 세종을 포함한 조선 왕 19명과 왕후 30명의 신위가, 조선과 자손을 평안하게 한다는 의미가 깃든 영녕전에는 정종과 인종을 포함한 조선 왕 16명과 왕후 17명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그렇다면, 정전과 영녕전에 이르기까지 어떤 길을 지나야 할까. 높은 돌담 사이 종묘 외대문外大門을 지나 좌우로 난 소나무 숲길을 따라 걷다 보면 우측에 남신문이 있다. 그 좌우로 자리한 칠사당과 공신당을 지나 박석이 깔린 너른 마당을 건너면 디귿 자 형태의 정전을 마주할 수 있다. 종묘에서 가장 큰 건물이다. 남신문을 나와 왼편으로 걷다 보면 정전의 반 정도 되는 규모의 영녕전을 발견할 수 있다. 본래 태조의 직계 4명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작게 지었으나, 훗날 모실 신위가 많아짐에 따라 증축해 지금에 이른다. 영녕전 중앙 박석이 깔린 너른 마당 중앙에는 신을 위한 신로가 있고 왕을 제외한 누구도 이 길을 지날 수 없었다. (지금도 이 길을 걷는 것은 지양하도록 권하고 있다.) 신로 양옆에는 홍주의를 입고 목화를 신은 악사와 무원이 있고, 그 너머 영녕전 앞에는 신위가 모셔져 있다.

종묘제례악 풍경을 보자.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일무다. 일무는 제례에 수반되는 일종의 춤이다. 일정한 수의 무원이 열과 행을 맞춰 커다란 정사각형 모양으로 늘어서서 각기 다른 무구를 손에 들고 합을 맞춰 같은 춤사위를 보여준다. 여기서 무구는 무덕武德을 기리는 간·척과 문덕文德을 기리는 우·모로 나뉘는데, 중요한 것은 이때 동원되는 무원의 수이다. 본래 천자天子는 팔일무, 제후諸侯는 육일무, 대부大夫는 사일무, 사는 이일무를 춘다. 여기서 팔일무는 열과 행에 8명씩 64명, 육일무는 6명씩 36명이 춘다. 무원의 수는 임의로 늘리거나 줄일 수 없다. 종묘제례악의 경우 중국에 황제가 있고 조선에 왕이 있으니, 천자의 춤을 출 수 없어 36명이 줄지어 추는 제후의 춤, 육일무를 췄다. 하지만 대한 제국에 이르러 왕을 황제로 칭함에 따라 팔일무로 바뀌었다가 일제 강점기에 다시 육일무,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다시 팔일무를 추게 됐다. 반면 공자와 그의 제자 그리고 성현과 같은 학자들의 위패를 모시던 문묘제례악(성균관 석전의례)의 경우 열과 행에 8명씩, 64명이 팔일무를 췄다. 공자의 위엄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일무가 육일무에서 팔일무로 변화한 것처럼, 음악 역시 시기에 따라 악기 편성이 달라졌다. 그 과정에서 삼죽이 없어지기도 하고 다시 생겨나기도 했는데, 현재는 임진왜란 이후 간소화된 편제를 따르고 있다. 악기 연주는 댓돌 위를 가리키는 등가와 댓돌 아래를 가리키는 헌가에서 모두 행한다. 이는 문묘제례악과 같은 아악의 형식과 체계를 따른 것으로 등가에서는 노래와 현악기가 중심이 되고, 헌가에서는 관악기와 타악기가 중심을 이룬다.

여기서 재밌는 것은 연주되는 악기의 재료다. 제례에 쓰는 악기는 팔음八音을 갖춰 연주한다. 팔음이란 금(쇠), 석(돌), 사(실), 죽(대나무), 포(바가지), 토(흙), 혁(가죽), 목(나무)을 이르는 말이다. 이 중 봄을 상징하는 석으로 만든 ‘축’은 해가 뜨는 동쪽에 비치해 음악의 시작에 쓰고, 목에 해당하는 백호가 엎드린 모양의 ‘어’는 맞은편 서쪽에 비치해 음악을 마칠 때 사용한다. 음악적 기능보단 그 쓰임에 따른 의미를 강조하기 위함이다. 비슷한 예로 부부애를 상징하는 ‘금·슬(거문고·비파)’, 형제애를 나타내는 ‘훈·지’를 들 수 있다.

음률 또한 12율 4청성, 즉 12개 음에 4개의 낮은 옥타브 음을 더한 16음으로 이뤄진 음역에 맞춰 연주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며, 한 박에 한 음씩 연주하는 문묘제례악과 달리 정해진 박자 없이 연주하는 것이 특징이다. 일정한 박에 맞춰 연주하지 않고, 노래 가사에 따라 박을 쳐서 연주를 맞췄으나 이조차 불규칙하게 변화하면서 한 음을 1박 또는 2박에 걸쳐 연주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노래 가사다. 본래 종묘제례악의 기본이 되는 보태평과 정대업의 가사는 각각 문덕과 무덕을 찬양하는 것으로, 조선 건국의 당위성과 조선 역대 왕의 업적을 널리 알리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신을 맞이하는 영신-신을 불러 폐백을 올리는 전폐-고기를 조에 담아 올리는 진찬-첫 번째 술을 올리는 초헌-두 번째 술을 올리는 아헌-마지막 술을 올리는 종헌- 왕이 음복 후 사배하고 변과 두를 철수하는 철변두-신을 보내는 송신’의 순서로 진행되는 종묘제례악의 절차 중 영신에서 연주하는 ‘영신 희문’의 가사만 보아도 칭송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결국 종묘제례악은 조선 역대 왕에 대한 경외와 존경의 마음을 악·가·무 일체에 담은 것이다.

대대로 덕을 (쌓아) 우리 후손을 여시니
세덕계아후世德啓我後

아, 그 모습과 소히 환히 상상하겠도다
오소상형성於昭想形聲

엄숙하고 법도에 맞게 제사를 드리니
숙숙천명인肅肅薦明?

우리를 편안하게 하시고 (소원을) 이뤄주소서
수아뇌사성綏我賚思成

종묘제례악은 1962년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되면서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됐고 2001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선정됐다. 유교 사상이 담긴 국가 의식에서 고귀한 문화유산으로 시대의 흐름에 따라 그 위치가 변화한 것이다.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선 또 다른 시각으로 종묘제례악을 마주하고 있다. 국립국악원에서는 2000년대부터 ‘고음악 연주회’라는 이름으로 종묘제례악을 연주하기도 하고, 2014년에는 국립고궁박물관과 함께 <종묘 특별전과 종묘제례악 공연>을 선보이기도 했다. 3D 실감 콘텐츠로 종묘제례악을 활용하기도 하고,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에서도 <덩더쿵 로봇 한마당>을 통해 일무 추는 로봇을 공개, 많은 이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우리가 주지할 것은 더 이상 종묘제례악이 하나의 의식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종묘제례악은 이제 하나의 문화 콘텐츠로 끊임없이 변화하고 소비되고 있다. 이를 경험한다는 건 고리타분한 역사의식을 고취한다는 명목이 아니더라도 하나의 문화 콘텐츠를 소비하고 체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5월, 하늘이 높고 맑은 때 신과 만나는 산책을 계획해보면 어떨까.

김보나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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