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진 몸들의 항변
2012년 9월, 리처드 3세Richard III, 1452~1485의 유골이 영국 레스터의 한 공용 주차장에서 발굴됐다. 왕위 계승을 놓고 30년간 이어졌던 장미전쟁의 마지막 결전지, 보즈워스Bosworth 전투에서 서른두 살의 나이에 비참한 죽음을 맞았던 요크 왕조의 마지막 왕, 리처드 3세가 527년 만에 발견된 것이다. 레스터 대학 발굴팀은 유골 분석을 통해 그가 172cm의 호리호리한 체격으로, 척추측만증이 있었을지언정 옷만 갖춰 입으면 크게 티가 나지 않을 정도였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처럼 발굴된 진실이 ‘역사의 패자’ 리처드 3세를 오랜 오해에서 구해낼 법도 했으나, 이야기는 그리 쉽게 전복되지 않았다. 2016년 BBC는 셰익스피어 타계 400주년을 기념해 TV 시리즈 <텅 빈 왕관The Hollow Crown>을 제작하며 리처드 3세 역에 베네딕트 컴버배치Benedict Cumberbatch를 캐스팅했는데, 컴버배치는 여지없이 육중한 보형물을 등에 얹고 연기했다. 심지어 그는 리처드 3세의 유골이 다시 안치될 때 추도사를 읽기도 한, 리처드 3세의 후손으로 알려진 배우인데도 말이다. 진실이 무엇이든, 뭇사람들의 마음속 ‘리처드 3세’는 셰익스피어가─추측건대 의도적으로 과장해─창조한 ‘뒤틀린 몸의 불구’여야만 했기 때문일 것이다.
역사가들이 들으면 경악할지도 모르지만, 사실 2023년을 살고 있는 한국인인 나에게 역사적 인물, 리처드 3세의 몸과 마음이 어떠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셰익스피어가 이 역사적 인물에게 그동안 얼마나 왜곡된 인식을 갖게 했는지도 크게 마음이 쓰이지 않는다. <리처드 3세>는 허구이기에, 역사와 허구를 구별해 읽는 것은 독자·관객의 몫일 것이다. 게다가 역사 속 리처드 3세는 어떤 몸으로 어떤 삶을 살았든 끝내 왕좌에 올랐던 백인 남성이다. 아마도 장애처럼, 그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특질을 포함해 그 어떤 이유로든 억압과 차별에 크게 취약하지는 않았으리라고 믿었고, 역사가들은 나의 추측을 어느 정도 승인했다. 역사의 승자들에 의해 악독한 폭군으로 묘사되었을 뿐, 그는 신실했고, 형제와 조카의 죽음에 직접 관여한 것은 아니며, 아내 앤과 화목했다는 의견이 적지 않았다. 어쨌든 그는 왕이 되었고, 왕으로 죽었다.
진정으로 오래도록 나의 마음을 어지럽혀 온 것은, <리처드 3세>가 ‘보통과 다른 몸’들에게 해온 일이다. 기실 <리처드 3세>는 오래도록 신체장애가 인물의 성격적 흠결을 구체화하는 효과적인─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게으른’─이야기 공식의 가장 대표적인 예시처럼 언급되곤 했다. 무대에 오르면 이 낡은 공식은 더욱더 강력해지곤 했는데, 장애인 캐릭터를 연기한 비장애인 배우들이 공연이 끝나면 공연 내내 구부렸던 등을 꼿꼿하게 일으켜 세우고 절뚝이던 다리를 곧게 펴 ‘장애’와 자신을 분리하며, ‘장애’는 부정적인 성격의 은유일 뿐이었음을 일깨우곤 했기 때문이다. ‘일그러진 욕망이 깃든 뒤틀린 몸’을 훌륭히 연기했을 뿐, 그 무대에 장애가 자리할 여지는 조금도 없었다. 그렇게 역사 속 ‘리처드 3세’와 무관하게,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3세’는 실재하는 몸들에 대한 속단을 승인하며, ‘보통과 다른 몸’들의 삶을 뒤틀어왔다.
2022년 11월 국립극장에서 공연된 <틴에이지 딕Teenage Dick>은 이러한 재현의 오랜 역사 끝에 드디어 찾아온 ‘보통과 다른 몸’의 항변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계 미국인 극작가 마이크 루Mike Lew는 <리처드 3세>를 동시대 미국 고등학교의 학생회장 선거를 배경으로 각색하며 “리처드와 벅 역에는 장애인 배우를 캐스팅해야 한다. 장애인들은 존재하며, 함께 살고 있다”라고 명시한 바 있다. 작가의 이러한 취지를 살려 국립극장은 ‘무장애 공연’을 표방하며, 지체장애인 배우 하지성과 조우리를 캐스팅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몸들의 접근성을 확대하기 위해 배리어프리 방법론을 세심하게 운용했다. 시각 장애 관객에게는 FM 수신기로 폐쇄형 음성 해설을 제공하고, 수어 통역사를 배우와 일대일로 배치해 원활한 전달을 꾀했으며, 대사의 억양과 유사한 감각을 담은 자막을 역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점자로 인쇄된 프로그램을 무료로 배포하기도 했다.
이 모두는 공연을 풍요롭게 하는 일부였기에 비장애인 관객인 나에게도 무대 위 모든 것이 인상적이었으나, 무엇보다 오래도록 마음에 남은 것은 무대 밖에서 보았던 사람들이었다. 공연 시작 전 로비에서 휠체어를 타고 있는 중증 장애인 몇몇 분을 마주했던 것. 공연 내내 나는 궁금했다. 휠체어를 타고 경사진 무대를 누비는 하지성·조우리 배우를 보며 그 관객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물론 나는 절대 알 수 없다. 혹 극장을 떠나는 그들을 붙잡고 물었다 하더라도 단어 몇 마디 안에는 담기지 않는 감정이 있었을 터, 나는 끝내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저 ‘나’와 다르지 않은, 아니 사실 같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으나 뭇사람들이 ‘나’의 몸과 구별하지 못하는 그 몸들이 세 시간 동안 무대를 종횡무진하며 펼쳐내는 이야기를 수많은 사람들이 집중하여 바라보는 그 풍광이, 부디 새로운 힘을 부여하는empowering 경험이었기를 바랄 뿐이다.
분명 극장 곳곳에 다양한 몸이 있었다. 소위 ‘정상 신체’라고 일컬어지는 몸들에 의해 지워지지 않은 ‘보통과 다른 몸’들의 ‘있음’이 생생했다. 허나 나는 ‘무장애 공연’이라는 캐치프레이즈가 못내 애석하다. <틴에이지 딕>에서 항변하고 있는 몸은 리처드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극의 말미, 리처드로 인해 비극적 최후를 맞는 앤 마거릿Anne Margaret이 말한다. “이건 리처드 얘기”라고. 근데 “왜 항상 리처드 얘기”냐고. “난 셰익스피어 연극에서처럼, 여자들이 전부 물건이고 주인공 보조고 극적 장치일 뿐인 연극에서처럼 단숨에 이용되고 나중에야 덧붙여지는 사람”이 아니라고. <리처드 3세>에서는 현란한 화술에 농락돼 그와 결혼했다 독살당하는 캐릭터 앤이 <틴에이지 딕>의 마지막 장면에서야 본인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셈이다. 왜 자신이 그렇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몸disabled body’이 되었는지를 말이다. 남성들만이 무대에 서던 시대의 여성으로서 그녀 또한 이야기를 위해 실재와는 무관하게 은유적으로 사용되고 지워지는 존재였다. ‘장애’가 작동해온 바로 그 방식으로 말이다.
<틴에이지 딕>이 <리처드 3세>가 품고 있는 낡은 이야기 공식을 내파內破해 성취한 것은 ‘장애를 (잠시) 없애는 것’이 아니었다고 믿는다. 낡디낡은 이야기의 공식에서 효과적인 극적 장치로 사용되고 버려진, 수사의 도구로 쓰이고 지워진 몸들의 항변을 통해, <틴에이지 딕>은─신체장애를 넘어─‘장애’의 작동 원리를 묘파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극장 안에서 잠시 발생했다 휘발되는 유토피아보다 극장 밖 현실을 달리 마주하게 하는 작품이 더 소중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접근이 정체성의 경계를 횡단하여 다종다양한 몸들의 연립聯立을 꾀할 수 있게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글 공연 칼럼니스트 · 드라마터그 전영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