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하고 뻔해 애틋한, 나의 이야기 가루와 콩고물, 나와 우리
〈그 겨울, 나는〉(2022)
감독 오성호
출연 권다함(경학), 권소현(혜진), 오지혜(혜진 엄마)
저 멀리 보이는 빛을 따라 걸었다. 그렇게 걷고 걷다 보면 지독하게 습하고 어두운 시간을 통과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 길에서 가끔 희미한 초를 들고 있는 사람도 만나고, 반짝이는 플래시를 가진 사람도 만난다. 쉬지 않고 부지런히 빛을 향해 걷는다. 이 어둠만 빠져나가면 모든 것이 달라질 거라고 믿는다. 하지만 곧 알게 된다. 빛이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 통과할 수 없게 구멍이 너무 작다는 것을. 내가 걷는 길이 터널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동굴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흔해서 아팠던 시절
동거 중인 경학(권다함)과 혜진(권소현)은 각각 경찰공무원과 관광공사 취업을 준비하는 스물아홉 동갑내기 커플이다. 20대와 30대 사이, 취준생과 사회인 사이의 경계에 선 두 사람은 사는 데 최선을 다하지만 늘 외줄 타기를 하는 것처럼 아슬아슬하다. 경학이 엄마의 빚을 떠안으며 배달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고, 혜진이 취업을 하면서 두 사람 사이는 조금씩 균열이 생긴다.
가장 애틋해야 할 사랑마저 피곤하던 그 시절, 차갑고 꽁꽁 얼었던 그 겨울 속에서도 사람들은 살았다. 오성호 감독의 장편 데뷔작 〈그 겨울, 나는〉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나는 한 청춘의 시간 속으로 쑥 들어간다. 미래도 약속도 보장되지 않던 암담하고 초라했던 시간을 극적으로 포장하지도, 다 안다는 양 위로하지도 않는다. 그저 불안한 젊은이들의 울렁이는 시간을 함께한다.
경학은 혜진이 바라던 미래와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아 자격지심을 느낀다. 혜진은 경학이 얼른 자신이 원하는 사람이 돼주길 바란다. 관계의 미묘한 변화 속에서 선량한 사람인 경학과 혜진은 서로에게 좋은 사람으로 남지 못한다. 연인으로서의 관계도, 청춘의 좌절도 특별할 것이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극히 평범한 이야기를 하기에 〈그 겨울, 나는〉은 흔하지 않은 반짝이는 영화가 됐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청춘의 무기력함이 청춘의 시간을 가라앉히는 순간을 이렇게 대놓고 아무런 위안이나 보상 없이 들여다본 적이 있던가? 특별할 것이 없어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열심히 살았지만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었던 시간을 함께한다. 성급하지도, 느긋하지도 않은 보폭으로 따르는 그 겨울, 경학의 이야기는 우리 이야기의 한 줄기로 그 뿌리를 뻗는다. 그래서 우리는 그 시절의 절망을 우리의 기억으로 공감하게 된다.
뻔해서 애틋한 우리
〈그 겨울, 나는〉의 이야기는 뻔하다. 식상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날것 그대로의 진짜 이야기라는 의미다. 오성호 감독은 그 시절 우리의 이야기를 빙빙 돌리거나 낭만적으로 회고하지 않고 답답한 채로 둔다. 위악도 위선도 없는 카메라의 시선은 아직 편집되지 않은 다큐멘터리 필름처럼 인물들을 작정 없는 피사체로 둔다. 사회를 탓하지도, 젊은이들을 동정하지도 않는 이야기는 내 인생의 한 토막처럼 익숙하다.
그래서 경학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문득 숙연해진다. 이미 겪어봤지만 완전하게 빠져나오지는 못했던 그 시절이 여전히 흉진 채 아프다고 느낀다. 〈그 겨울, 나는〉은 사람들의 힘겨운 시간이 진창이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극적 효과를 내기 위해 이야기를 과장하지도 않고, 아는 척하거나 이해하는 척하지도 않는다.
청춘이라 아픈 것이 아니라 누구도 길을 알려주지 않고, 누구도 도와주지 않던 막연한 어둠의 시간이 아팠다. 시간이 지나면 좋은 날도 오리라는 기대조차 사치 같았던 그 시절은 쓸쓸하고 쌀쌀했다. 왠지 시큰거리고 추웠던 것 같아 생각하면 늘 겨울을 살았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겨울은 조금만 체온을 나누면 온기가 느껴지는 그런 계절이기도 하다. 섣부른 위안도, 흔한 희망도 멀지만 가끔은 생각 없이 웃고, 또 속절없이 누군가와 마음을 나누는 주인공 경학과 나의 모습이 살포시 포개진다. 그러다 그 시간을 겪은 내가 참 애틋해진다.
글 최재훈_영화감독이 만들어낸 영상 언어를 지면 위에 또박또박 풀어내는 일이 가장 행복한 영화평론가.
현재 서울문화재단에서 근무하며 각종 매체에 영화평론과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저서로 《나는 아팠고, 어른들은 나빴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