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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6월호

거문고산조의 양대 산맥
신쾌동과 한갑득

‘돌고 도는 물레방아 인생’이라는 노래가 있다. 거문고산조 국가무형문화재 신쾌동 명인1910~1977과 한갑득 명인1919~1987의 삶을 살펴보면 인생이란 돌고 도는 것임을 알게 된다.

한갑득 명인

시작은 달라도 목표는 하나

전라북도 익산 태생의 신쾌동은 흙수저, 전라남도 광주 태생의 한갑득은 금수저로 태어났다. 국악과 무관한 신쾌동은 농사를 지었고 풍류를 근근이 익히면서 꿈을 키웠다. 국악 명가에서 태어난 한갑득은 당대 최고의 가야금 명인 안기옥1894~197을 사사했다. 신쾌동과 한갑득, 두 사람에게는 똑같은 소원이 있었다. 거문고산조의 창시자 백낙준1884~1933 문하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두 사람 모두 충청남도 강경(현재 논산시 강경읍)에 사는 백낙준을 찾아갔다.
여기서 처음으로 두 사람의 운명이 갈린다. 백낙준은 신쾌동을 제자로 받아들였다. 백낙준은 ‘6척 장신’에 손마디가 굵은 신쾌동을 마음에 들어 했다. 반면 나이도 어리고 ‘5척 단신’에다가 손마디가 고운 한갑득에게는 “그냥 가야금을 하라”고 말하며 돌려보냈다. 한갑득 인생에서 최초의 좌절이었다. 그러나 한갑득은 포기하지 않았다. 백낙준의 제자 박석기1899~1952를 찾아가 거문고산조를 익혔다.
백낙준에게 거문고를 잘 배운 신쾌동은 상경해서 ‘조선성악연구회(이하 성연)’에 입성한다. 거문고산조도 잘 타고 판소리도 곧잘 하는 신쾌동은 ‘성연’의 명인, 명창에게 두루 사랑을 받았다. 경성방송국JODK을 제집 드나들 듯했다. 1938년 2월 20일, 신쾌동에 의해 ‘거문고병창’이 처음 방송에 소개됐고, 그의 인기는 최고에 달했다. 한갑득도 뒤이어 상경하고 ‘성연’에 뒤늦게 입단했다. 그때 신쾌동은 이미 성연’을 대표하는 15명의 이사진에 포함돼 있었다.
이랬던 두 사람의 운명이 또다시 바뀐다. ‘성연’이 내부 갈등으로 유명무실해지자 신쾌동이 졸지에 실직자 신세가 된 것이다. 반면 한갑득은 스승인 박석기가 만든 ‘화랑창극단’에 합류한다. 금상첨화로, 여기서 창극의 대가 박동실1897~1968을 만나면서 예술적으로 성장하게 된다.
1948년 여성국극이 시작됐다. 여성국극은 1950년대 최고의 흥행물이었다. 그중에서도 여성국극단 ‘삼성’이 크게 인기가 있었다. 박보아·박옥진·조양금, 세 명의 스타가 있어 ‘삼성三星’인데 박보아의 남편이 한갑득이었다. 당시 여성국극의 인기는 대단해서 돈을 갈퀴로 긁어 쌀가마니에 담았다는 소문이 날 정도였다. 대한민국 국악인 중에서 한때 돈이 가장 많았던 인물이 한갑득이었다. 이즈음 신쾌동도 또 다른 국극단의 반주자로 합류했지만 신통치 않았다. 거주지를 전주로 옮겨 남의 집 문간방에서 거문고를 가끔 가르치는 신세가 됐다.

거문고 명반, 신쾌동 명인과 김재선 고수의 <거문고와 가야금병창>. 1956년 미국공보원에서 두 사람이 짝을 이뤄 연주했다.

각각의 삶이 밴 각각의 가락

두 사람의 운명을 바꿔준 일생일대의 희비가 찾아온다. 1957년, 여성국극으로 큰돈을 번 ‘삼성’은 국극 영화 〈대춘향전〉을 제작해 개봉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흥행에서 참패한다. 국극에서 번 돈을 영화 한 편으로 다 날린 셈이다.
이즈음 전주와 서울을 오가면서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던 신쾌동에게 반가운 요청이 들어왔다. 서울에 있는 미국공보원United States Information Service, USIS에서 신쾌동에게 거문고 연주회를 개최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당시 USIS는, 미소 중심의 냉전체제가 고착되면서 미국이 우방 국가에 주는 문화적 혜택이었다. 미국의 문화 보급이 주요 업무였지만 각국의 전통문화를 소개하는 역할도 병행했다.
1956년 7월 18일, 신쾌동은 미국공보원에서 독주회를 연다. 이것이 현대적 의미의 최초 거문고 독주회다. 신쾌동은 장구의 김재선과 콤비를 이루면서 1960년대 거문고산조의 전성기를 만들어낸다. 1967년 6월 23일, 거문고산조가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신쾌동이 ‘인간문화재’가 되는 순간이었다. 이때 신쾌동, 한갑득 두 사람이 다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됐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신쾌동만 단독으로 국가무형문화재가 된다. 당시 한갑득 명인이 느꼈을 섭섭함은 충분히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아쉬움 때문이었을까? 1969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가야금산조는 두 사람(김윤덕, 성금연)이 기예능 보유자가 되어 전수됐다. 오래도록 한갑득 명인은 힘든 시기를 보냈다. 하지만 이 시기에 한갑득 명인은 출중한 제자를 길러내기 시작한다.
1977년, 신쾌동 명인이 타계했다. 이듬해인 1978년, 한갑득 명인이 국가무형문화재가 된다. 1978년 2월 24일, 한갑득 명인을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지정한 중요한 이유는 이렇다. “거문고산조는 백낙준을 시작으로 유파를 달리해 전승됐다. ‘신쾌동류’와 ‘박석기류’로 대별되는데, 신쾌동류는 이미 지정됐으나 박석기류는 지정되지 못했다. 한갑득이 이를 발굴해 지정한다.”
‘인생살이 새옹지마’라고 했던가. 신쾌동 명인이 타계하기도 했지만 한갑득 명인을 지정한 중요한 이유는 그가 박석기류의 유일한 인물이라는 데 있다. 지금은 우리가 ‘한갑득류’라고 한다. 하지만 국가무형문화재 제도 속에서는 박석기류이고 이것이 발전돼 한갑득류가 된 셈이다.
신쾌동류와 한갑득류는 거문고산조의 양대 산맥이다. 어느 것이 더 좋다는 말이 불가하다. 각각의 산조에는 두 명인의 기쁨과 슬픔이 고스란히 가락으로 배어 있다. 두 명인의 삶이 그렇듯이 신쾌동류는 꿋꿋하고, 한갑득류는 구성지다.

윤중강_국악 평론가 | 사진 제공 윤중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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