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채로운 빛깔을 지닌 어린이문학 작가들
웹진 [비유] 46호 포스터
지난 10월 특별한 기획으로 창작 지면이 채워졌다. 동시와 동화를 모두 쓰는 작가의 작품을 한자리에 모은 어린이 문학 특집이었다. 김유진 편집위원은 “한 작가의 동시와 동화를 함께 읽으면 그가 이야기하는 세계를 좀 더 세밀히 들여다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의 세계가 각 장르의 스펙트럼을 거치며 펼쳐지는 다채로운 빛깔을 확인하고 싶었습니다.”라고 기획 의도를 밝히며 주미경·이상교·이창숙·추수진 작가의 신작을 소개했다. 네 명의 작가가 만든 무지갯빛을 여기에 조금 떼어와 본다.
너 같은 눈빛을 알아. 웃고 있지만, 속에서 뭔가 쏟아질 것 같은 눈빛이야.
주미경 <얌마의 기둥 집> 부분
주미경 작가는 놓치기 쉬운 눈빛과 그 속에 담긴 감정을 붙들어 노랫말 같은 문장으로 작품을 빚어낸다. 그의 동화 <얌마의 기둥 집>에서 고양이 얌마가 그러하듯이. 벌에 쏘인 듯 동그랗게 부푼 코, 빨간 수염, 뾰족한 귀, 실룩한 잿빛 방둥이를 가진 얌마의 집에 들어서면 사람들이 못다 한 말, 주저하느라 마음에만 간직한 속말을 담은 ‘작품들’이 가득하다. 얌마의 꼬리가 부드럽게 흔들리고 핀은 가슴을 묵직하게 짓누르던 이야기를 꺼낸다. “그런 생각하잖아. 저 사람이 없어졌으면 하는 거. 아무리 가족이라도.” 깊이를 알기 힘든 호수 같은 이야기, 집 둘레를 따라 핀 패랭이 꽃 같은 다독임이 주미경 작가의 작품에 들어 있다. 우리 안에 가둬진 속마음, 겨우 가라앉힌 울음을 “말갛고/ 긴 손가락으로/ 찬 등을/ 둥글게/ 문지르고/ 문지르고/ 자꾸 문질러서”(<빗방울 손가락>) 끝내 터뜨리게 만든다.
금간 뒤/ 밖으로 나와/ 반뜩 되살아난다.
이상교 <거울> 부분
이상교 작가의 작품은 시간을 들여 필사하고 싶다. 낱말이 놓인 자리마다 뜻이 있고 숨이 있어서 그렇다. ‘좀’ ‘조금’이라는 말 속에 숨은 ‘아주 많이’ 아프고 속상한 어린이의 마음을 들려주는 동시 <엄마께>는 “털어놓으니 좀/ 나아요./ 이제는 괜찮아요.”라는 마지막 구절에 머물면서 어린 마음에 손을 가만 대본다. “제가/ 좀, 조금이라고 말하는 걸/ 그대로 믿지 마세요.”라는 구절을 잊지 않는다면, 아직 말해지지 않은, 살펴야 할 마음이 거기 남아 있다는 걸 알 수 있으니까. 동화 <어둔리>의 할머니가 옆으로 누워 고양이 티슈와 눈맞춤을 하는 장면, “어느 때는 잠이 든 할머니를 티슈가 더 오래 지켜보았다”는 문장에서도 멈춰 지난 하루를 되짚어 볼 일이다. “날마다 비쳐들던/ 빛바랜 커튼 대신/ 찌든 때 벽 모서리 대신” 어떤 고통이나 슬픔을 녹여줄 환한 볕 같은 순간이 우리 안에서 “반뜩 되살아난다”(<거울>).
파란색이면 뭐 안 되니?// 안 될 건 없었다
이창숙 <푸른 멸치떼> 부분
이창숙 작가는 소개말에 “어떤 동화는 시로 바꾸니 생기가 돌았고, 어떤 시는 동화로 바꾸니 고소해졌다. 시 속에 이야기가 숨어 있고, 동화 속에 노래가 담겨 있으니까.”라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의 동시를 읽으면 냉동실 검은 비닐 봉지에서 탈출해 “바다로 간 눈부시게 파란 멸치들”(<푸른 멸치떼>)이나 “숨을 할딱이며/ 지구 어항 속을 걷는/ 사람 물고기들”(<황사>)을 주인공으로 하는 길고 긴 이야기를 상상하게 된다. 동화 <악마의 검을 뽑아라>의 주인공은 어른들의 잘못으로 전염병이 닥친 세상을 살아가는 어린이들이다. 학교도 못 가고 여행도 못 가는 어린이들 앞에 나타난 도깨비 도해는 “잘 들어. 이제부터 할 일이 있어”라고 말한다. 어린이들의 손을 들어주는 이야기, 익숙한 일상의 풍경을 뒤집는 이창숙 작가의 동화적 상상력과 언어적 고민 덕분에 현실을 바꿔나갈 무궁한 믿음과 용기를 잃지 않는다.
나무는 눈물을 꽁꽁 뭉쳐/ 단단한 씨앗을 만든대
추수진 <눈물별똥나무> 부분
추수진 작가의 동시 두 편과 동화 한 편은 각기 떨어진 몸을 가졌지만 “뾰족한 부리를 맞댄”(<한지 조각보>) 채 유기적인 흐름과 감정을 느끼게끔 한다. 자신이 펼친 조각보에 조각난 마음들이 어린 새처럼 날아와 앉았다 가기를 바라는 작가의 위로가 전해진다. 동화 <일곱 번째 규칙>의 서현이는 동생 현수를 살뜰하게 보살핀다. 암으로 돌아가신 엄마를 대신해 동생에게 ‘숙제 뚝딱 준비물 착착’ ‘동작 그만’ ‘싹싹 씻고 치카’ 등 기억하기 쉬운 이름을 달아 지켜야 할 일을 일러주기도 한다. 하지만 괜찮지 않은 날도 있다. 누나 말에 뾰족하게 대꾸하는 현수의 날도 있고, “난 괜찮아”라고 말했지만 꾹꾹 눌러온 눈물이 터지는 서현이의 날도 있다. 그런 누나의 등을 토닥이는 현수의 작은 손과, 동생의 손을 꼭 잡고 일어서는 서현이의 손을 추수진 작가는 비춘다. 그 빛이 읽는 이의 조각난 마음 틈새로 부드럽게 스민다.
글 남지은 [비유]편집자 | 사진 제공 웹진 [비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