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할 일
웹진[비유] 42호의 <쓰다> 포스터
“올여름의 할 일은 모르는 사람의 그늘을 읽는 일.” 광화문 교보생명 빌딩에 여름 햇살과 함께 내걸린 문장이다. 김경인 시인의 시 <여름의 할 일> 일부인데, 흘긋 본 것치고는 며칠 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여름 채비는 커녕 일거리에 눈이 묶여 창밖 풍경이 바뀌는 걸 나는 알아차리지 못했고, 내가 나를 먹이고 재우는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하물며 다른 사람의 어두운 구석을 살피고 도닥일 여유가 얼마나 있었을까. 스스로에게 경고등을 켜듯이 열아홉 자를 되뇌었다. 올여름의 할 일은 모르는 사람의 그늘을 읽는 일.
어쩐지 그애가 멀리 떠나는 것만 같아서 집 앞 골목까지 따라나섰어요. 가끔 그애가 멀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기대어 왔으면 할 때조차 고집스럽게 혼자이기를 자처할 때요. 그런 면이 언니를 닮았다는 생각을 자주 해요.
가파른 내리막길로 점점 사라지는 소애의 뒷모습을 한참 지켜봤던 기억이 나요. 그 밤에 떴던 달 모양도요. 방
구석 어딘가에 잠자코 떨어져 있을 것 같은, 잘린 손톱 모양의 가는 그믐달이었어요.
안윤, <달밤> 부분
여름의 할 일은 여기서도 가능하다. 웹진 [비유] 42호에 실린 안윤의 소설 <달밤>이다. ‘나’와 ‘소애’는 5년 전 광화문에 있는 한 카페에서 같은 아침 근무조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매장 구석구석을 오가며 마치 잘 길든 기계처럼 조용하고 매끄럽게 일하는 소애의 모습에서 ‘나’는 그 애가 살아온 내력을 읽는다. “노동에 숙련된 몸, 어떤 환경에든 자신을 기꺼이 끼워 맞출 줄 아는 마음 같은” 것을. 묵묵하고 눈치 빠른 소애. 좀처럼 부탁 않는 소애. 언젠가 ‘나’의 집에서 며칠 지낼 때에도, 열흘쯤 지나 방을 구했다면서 짐을 정리해 떠날 때에도 소애는 발소리를 죽이고 그믐달처럼 움직일 뿐이다.
소애는 요즘 앨범 준비 때문에 안국동에 있는 브런치 카페에서 설거지 아르바이트를 해요. 일자리를 구하고서 하루에 네 시간만 일하면 되고 보수도 센 편이라고 좋아했죠. 일한 지 한 달쯤 지났을까요. 소애에게 전화가 왔는데 대뜸 한숨을 쉬었어요.
“언니. 사람들이 음식을 정말 많이 남겨요. 설거지도 설거진데 버리는 게 일이에요. 버려지는 음식을 계속 보는 게 이렇게 마음을 힘들게 할 줄은 몰랐어요. 뭐랄까. 너무 쉬워요. 버리고 버려지는 게요.”
그런 소애를 ‘나’는 살뜰히 챙긴다. 하고 싶은 음악을 하기 위해 생계형 아르바이트를 이어가는 소애의 한숨을 듣는다. 신세 질 수 있느냐는 소애의 부탁에 사정을 더 묻지 않고 방을 내어줬던 때처럼, ‘나’는 초라한 잔고를 털어 새 냄비를 마련하고 질 좋은 양지머리와 고사리를 삶아 소애가 먹고 싶어 한 육개장과 나물 반찬을 만들어 푸짐한 생일상을 차린다. 그리고 말해 준다. “축하해, 전소애. 태어난 거, 살아온 거, 살아 있는 거, 다.”
언니를 알고 지냈다는 낯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미지근한 육개장을 떠먹으며 앉아 있었잖아요. 질긴 대파를 오래오래 씹으면서 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들었잖아요. 옆자리에서 언니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말들이 들려오는데, 하나같이 정확한 사실은 없고, 무례하기 짝이 없어서 가서 면전에 소주를 뿌리고 싶은 걸 참고만 있었잖아요. 분명했던 건, 그 자리에 있는 어느 누구도 언니에 관해 정확히 알지 못했다는 거예요. 나조차도요.
그렇게 소애를 아끼고 이해하고 지지할 수 있는 까닭은 ‘나’에게도 그런 언니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학교를 다닐 때 비엔나커피 한 잔을 놓고도 오래 이야기할 수 있었던 언니. 졸업한 후에 글 써서 번 돈이 생기면 꼭 밥을 사줬던 언니. 아프지 마, 안 아픈 게 최고야 말해 줬던 언니. ‘내’가 나 하나 감당하기 벅차하는 동안 연락이 없다가 사라진 언니. 언니 마음을 “그려보고 짐작해 볼수록 아무것도 알 수 없게 돼버리”는 ‘은주 언니’가.
작년 소애 생일 즈음, 은주 언니의 부고 소식을 들은 ‘나’는 언니가 남기고 간 나머지 세계를 떠안는다. 서울 거리와 사는 동네는 여전히 다를 것 없는 모습이지만 남겨진 ‘나’의 세계는 절대 이전과 같을 수 없다. ‘나’는 “살아 있는 나는 이제 뭘 해야 할까” 메모한다. (이어지는 문장은 옮겨 적지 않고 부러 작품 안에 남겨둔다. 나는 나의 많은 언니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이 작품을 읽는 독자 누구든지 그럴 것이다.)
잠든 소애 곁에서 ‘나’는 언니에게 묻지 못한 언니 마음을 여전히 헤아리고 헤아린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게다가 타인의 그늘과 상처를 온전히 읽는다는 건 어렵고 불가능에 가깝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 아닌 존재를 한 뼘씩 더듬어보고 공감하는 일은, 멈추면 안 될, 사람의 해야 할 일이다. 땡볕에 선 듯이 메마르고 지친 개개인의 마음을 일으키고 회복시키는 건 옆 사람의 ‘언니 된’ 마음일 테니까.
글 남지은 [비유]편집자 | 사진 제공 웹진 [비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