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용·민규동 감독의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돌에서 헤엄치는 물고기
아이들이 그렇다. 달아나고 싶지만 늘 발 한쪽이 학교라는 공간에 결박돼 있다. 발에 묶인 팽팽한 끈 길이만큼 벗어날 수 없어 학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감옥이 돼 아이들을 가둔다. 그렇게 갇혀버린 아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가해자·피해자·방관자의 모습으로 얼굴을 바꾸고 우정인지 사랑인지 모르는 감정사이에서 의리를 지킬지, 배신이라도 해서 숨 한번 쉬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린다.
미성숙이라는 겁
신체검사가 있는 날, 민아(김규리)는 수돗가에서 빨간 노트를 줍는다. 효신(박예진)과 시은(이영진)의 교환일기다. 효신은 튀는 언행과 국어선생과의 소문 등으로 따돌림을 당하는 아이다. 민아는 일기를 통해 두 사람 사이를 되짚어 가는 관찰자가 된다. 신체검사를 하는 날, 효신이 옥상에서 투신자살을 하고 일기장을 통해 효신과 시은을 느끼기 시작한 민아는 자꾸 효신과 심정적으로 점점 더 가까워진다.
학교 밖 세상은 분주하고 빨리 흐르겠지만, 학교에 갇힌 소녀들의 삶은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리게 흘러간다. 박제가 된 소녀들의 시간 속에서 두 소녀 효신과 시은의 사이는 우정보다 더 짙은 사랑의 감정에 가깝다. 두 소녀만이 오롯이 공유하는 개인의 시간과 수많은 소녀가 거칠게 살아가는 공통의 시간 사이에는 시차가 너무 크다. 집단과 개인, 그 분절된 시간을 이어주는 것은 관찰자인 민아다.
세기말의 흉흉한 정서가 떠돌던 그 시절, 1999년 12월 24일에 개봉, 20세기의 마지막 공포영화로 기록된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는 사실 장르영화로서 공포의 농도가 낮은 편이다. 영화는 ‘괴담’이 아닌 ‘여자’ 고등학생을 이야기한다. 그시절 모두가 겪어봤을 오해와 사랑받고 싶은 갈증이 학교에 갇힌 채 부유한다.
이미 죽어버린 아이의 영혼이 학교를 미처 떠나지 못했을 거라는 이야기는 무서움을 포기한 대신 처연함으로 되살아난다. 그리고 그 시절, 소녀들이 겪어야 하는 가장 두렵고 잔혹한 공포는 서로의 마음을 끝내 할퀴고야마는 미성숙함이라고 영화는 줄곧 묵도하지만 소녀를 탓하지는 않는다.
결국 성장하지 못한 우리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는 상상 가능한 저주나 원혼 이야기가 아니다. 세상의 편견과 채찍에 맞서 살아남아야 하는 소녀들의 생존 본능이 날카롭게 콕, 송곳처럼 마음을 찌른다. 갇힌, 혹은 버림받은 사춘기 소녀들이 겪을 수 있는 섹슈얼리티의 혼란과 질투가 오가는 이야기는 처연하고 섹슈얼리티보다 훨씬 더 내밀하고 깊은 동질감을 포괄한다. 그리고 시은과 텔레파시로 소통 가능한 민아는 사라진 효신을 대신해 시은과 더 깊은 연대감으로 엮일 가능성을 열어둔다.
상처 입은 소녀들은 물 없는 돌 위를 헤엄치는 물고기 같다. 아직 덜 자란, 버림받은, 그리고 살아남아야 하는 소녀들은 핏빛 소동을 겪은 후에도 한 치도 성장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 영화가 주는 가장 큰 공포다. 그리고 세상과 맞서다 죽은 아이와 살아남은 아이들의 이야기는 이상적 결말에 이르는 법 없이, 그 절망의 순간이 그냥 현실이라는 점을 생채기처럼 아로새긴다.
씨네2000 대표 고故 이춘연을 기리며
영화제작사 씨네2000을 이끈 이춘연은 1994년 심리 스릴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평가받는 <손톱>(1994)과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5) <미술관 옆 동물원>(1998) 등 실험성과 작품성을 함께 인정받은 작품을 만들어왔다. 그 중 1998년 시작된 <여고괴담> 시리즈는 사회문제를 공포의 형식으로 되짚는 학원 괴담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으며, 빼어난 신인 감독과 신인 배우의 등용문이 됐다. 새로운 시리즈 <여고괴담, 여섯 번째 이야기: 모교>가 지난 6월 개봉했다.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1999)
감독 김태용, 민규동
출연 김규리(민아 역), 박예진(효신 역), 이영진(시은 역), 공효진(지원 역)
글 최재훈 영화감독이 만들어낸 영상 언어를 지면 위에 또박또박 풀어내는 일이 가장 행복한 영화평론가.
현재 서울문화재단에서 근무하며 각종 매체에 영화평론과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