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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호

서거 110주년 맞은 구스타프 말러 세계가 공감한 슬픈 인생 교향곡

올해는 구스타프 말러가 세상을 떠난 지 110년이 되는 해다. 1911년 2월 뉴욕 필 지휘를 끝으로 병으로 쓰러진 말러는 그해 5월 18일 세상을 떠났다. 죽어가던 말러가 최후에 남긴 말은 “모차르트!”였다고 전한다.

구스타프말러. 빈 궁정 오페라하우스 복도에서. 사진 MoritzN hr.1907

염세적 음악에 영향 준 어린 시절

말러는 1860년 7월 7일 프라하와 빈 중간에 위치한 보헤미아의 칼리슈트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체코의 땅으로,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영토였다. 그는 열네 형제자매 가운데 두 번째로 태어났지만 형이 사망했으므로 장남이나 다름없었다. 어머니는 다리와 심장이 아팠지만 말러의 동생을 열둘이나 낳았고, 아버지가 폭군이라 육아와 가사를 전담해야 했다. 이런 모습을 본 말러는 일생을 아버지에게 냉담했다. 말러의 형제자매 가운데 반 이상은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한 살 아래 남동생 에른스트와 사이가 좋았는데 그 동생은 13세로 병사했다. 이런 가정환경과 동생 에른스트의 투병과 죽음은 말러 작품의 염세적 성격에 큰 영향을 끼쳤다.
말러는 14세부터 18세까지 빈 악우협회 음악원에서 율리우스 엡슈타인에게 피아노를, 로베르트 푹스에게 화성을, 프란츠 크렌에게 작곡을 배웠다. 활동 초창기 작곡으로 이름을 알리지 못한 말러는 지휘자로 먼저 성공했다. 슬로베니아의 류블랴나 극장, 모라비아의 올로모우츠 극장, 그리고 프로이센의 카셀 궁정 극장 등과 잇달아 계약했고, 1885년에는 유명한 바그너풍의 흥행사 안젤로 노이만의 인정을 받아 25세에 프라하의 독일 오페라 차석 악장으로 발탁됐다. 라이프치히 시립 오페라와 계약하고 이후 2년간 자신보다 연상인 재기 넘치는 수석 지휘자 아르투르니키쉬와 라이벌 관계에 있으면서 힘든 나날을 보내야 했다. 카를 마리아 폰 베버의 오페라 <세사람의 핀토>를 편곡·연주해 큰 반향을 일으켰고, 자신감을 얻은 말러는 교향곡을 썼다.
지휘자로 명성을 얻었지만 극장 관계자나 관객에게 자신의 주장을 내세워서 다투고 도중에 사임하는 일도 잦았다. 닮고 싶지 않던 아버지의 공격성을 말러도 가지고 있었다. 깡마른 체구에 높이 솟은 이마, 검고 긴 머리털, 도수 높은 안경 속에서 쏘아보는 듯한 눈초리, 말러의 성격은 외모에서부터 드러난다. 말러 음악에는 신경질적면이 고스란히 노출된다. 지휘할 때의 신경질도 보통이 아니었다고 한다. 100명이 넘는 대편성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때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실수를 귀신같이 잡아냈다. 그래서 연주자들은 말러를 존경하면서도 그의 지휘로 함께 연주하기는 꺼렸다.
말러는 유랑민처럼 여기저기를 전전했다. 그의 인생은 지휘자로서 명성 획득과 작곡가로서 좌절의 반복이었다. 1888년 10년 계약으로 부다페스트 왕립 오페라 지휘자로 부임했지만, 극장측과 다퉈 2년 만에 함부르크 시립 오페라극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1891년부터 1897년까지 함부르크 시립 극장의 지휘자를 맡았다.

외면당한 생이 담긴 음악을 남기다

유대인인 말러는 자신을 고향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오스트리아 사람에게는 보헤미안으로 여겨지고, 독일 사람에게는 오스트리아인으로 여겨졌다. 보헤미아로 돌아오면 사람들에게 유대인이라고 불렸다. 1897년 말러는 유대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다. 빈 국립오페라와 계약하려면 가톨릭교도가 필수조건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말러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궁정가극장과 빈 궁정가극장, 빈 필에서 지휘하며 당대 최고의 지휘자로서 명성을 쌓았다.
말러가 아홉 번째 교향곡 <대지의 노래> 스케치를 시작하던 1907년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시기였다. 당시 지휘자로서 최고의 지위인 빈 궁정 오페라극장 총감독을 사임했고, 사랑하던 장녀 마리아가 네 살에 갑작스레 사망했다. 설상가상으로 말러 자신의 심장 이상이 발견돼 죽음을 예감했다. 이러한 때에 말러는 한스베트게가 번역한 중국의 시를 접했다. 말러는 인생과 자연에 대한 관조와 시적 감성에 크게 공감했다. <대지의 노래>에 쓰인 시에 투영된 허무주의와 피안의 동경은 말러의 슬픔과 절망감을 정화했을 것이다. 말러의 염세적 성격과 탐미성이 동양사상에 깊이 공명해서 얻어진 결과다. 말러가 작곡하던 당시의 비극적 상황을 생각하며 가사를 음미하면 눈물이 난다.
당대의 작곡가들은 아홉 번째 교향곡에 대한 징크스가 있었다. 말러는 베토벤·슈베르트·브루크너가 교향곡 9번을 작곡하고 죽은 사실이 두려웠다. 그래서 말러가 아홉 번째 교향곡을 완성했을 때 번호를 붙이는 대신 <대지의 노래>라는 곡명을 붙여 발표한다. 그러나 ‘제9의 징크스’는 말러도 예외가 아니었다. 교향곡 9번 완성 이후 말러는 불과 몇 달 뒤 세상을 떠났다. 교향곡 10번은 미완성인 채 남겨졌다. 유대인인 말러의 작품은 1930년대 나치에 의해 배격되고 외면당했다. 그의 작품이 재조명된 시기는 탄생 100주년인 1960년 전후다.

류태형 음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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