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신해욱, 연결의 감각
장소 협조 : 카페 코기토
종로구 낙산4길 56 이화동 한옥카페
2025년에 상복이 있나 봅니다. 책을 내고 1년쯤 지나면 ‘책을 냈다는 기분’이 슬슬 사라지는 시기거든요. 그런데 상을 받은 덕에 그 ‘기분’이 지속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일단은 기쁘지만 무겁기도 해요. 상이라는 게 그저 응원이라기보다는 공적인 호명이기도 한 터라서요.
사람을 많이 만나는 편이 아닌데, 새 책도 나온 터라 지금처럼 인터뷰도 하고 북토크도 하고 또 송년회 시즌이기도 해서 문학 이야기를 오랜만에 정말 많이 나누고 있어요. 『미개봉박두』를 낸 출판사 ‘픽션들’이 11월에 언리미티드 에디션에 참가하면서, 덕분에 저도 그 자리에 잠시 끼어 있었고요. 문학 출판과는 또 다른 영역이라 책과 텍스트와 이미지와 디자인 등등에 대해 여러모로 많은 생각을 해 볼 수 있던 시간이었습니다.
어쩌다보니 출간 시기가 겹쳤어요. 이 시집의 기획 청탁을 받은 것은 좀 더 오래된 일인데요. 사실 출판사로부터 제안받았을 당시에는 제가 함께할 수 있는 작업인지 잠시 고민했어요. SF를 염두에 두고 시를 써본 적은 없고, 또 소재적으로 접근하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SF는 테크놀로지의 발달을 상상의 동력으로 삼아 지금 현실과는 다른 세계를 그려 보이는 장르잖아요. 가만히 제 독서 경험을 돌이켜보니, 제게 방점은 테크놀로지가 아니라 ‘다른 세계’에 있는 것 같더라고요. SF의 궁극에는 신비주의가 있기도 하고요. 지금 이곳과는 다른 중력, 다른 공기의 밀도, 다른 감각 체계, 다른 시간의 흐름을 언어적으로 상상하고 텍스트의 형태로 살려내고자 하는 실험들이 시로서의 SF라면, 제 작업 또한 얼마쯤은 맞닿아 있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죠.
저는 작업을 오래 하는 편이라서요. 일단 쓰고 싶은 구절들을 꾸준히 모아둡니다. 그러다보면 어떤 구절이 어떤 상황과, 혹은 어떤 구절이 또 다른 어떤 구절과 잘 달라붙는 때가 있어요. 그들 사이에 일종의 화학작용이랄까요. 그런 게 발생하는 시기가 있는데, 그 지점을 가능하면 놓치지 않고 붙잡아보려고 합니다. 거기서부터 작업을 시작하는 편이죠.
확실히 협업의 느낌이 강했던 것 같아요. 표지 그림이 한진 작가의 작품 <Tone Roads Op. 1>인데, 전시회에서 그림을 본 게 2016년쯤이었어요. 막연히 이 그림과 함께하는 어떤 계기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봄날의 시집’ 시리즈는 표지 그림을 시인 자신이 고르게 되어 있으니 더없이 좋은 기회였죠. 작가님께서 흔쾌히 응해주셔서 기뻤고요. 실물을 받아보고는 더 흐뭇했어요. 연필 선과 흑연의 느낌이 물씬 살아나서 좋았고, 그림 원본은 만질 수 없지만 이 표지는 만질 수 있어서 좋았고요. 만지고 나면 손에 흑연이 묻어나고 그 손가락을 종이에 대면 지문이 남을 것 같은 느낌도 좋았고요. 지금 생각해보면, 시집 제목을 ‘자연의 가장자리와 자연사’로 정하게 된 것이 이 그림 때문이 아니었나 싶기도 해요. 제목을 정한 후 표지가 확정됐지만, 제목을 정할 때부터 이 그림을 염두에 둔 것 같기도 하고요.
이전 시집에서는 해설을 따로 붙이지 않았는데요. 가이드 없이 누구나 첫 독자로서 시집을 읽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마치 흰 눈을 직접 밟는 느낌으로요.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었던 게, 저는 제 시가 늘 쉽다고 생각했거든요. ‘숨기지 않고 다 쓰는데? 복잡한 맥락 없고 쓰인 그대로 표면만 읽으면 되는데?’라고 생각한 거죠. 하지만 내가 최선을 다해 표면에 전부 드러내려고 해도 여전히 누군가에게는 진입장벽이 높고 어렵게 느껴질 수 있다는 걸 이제 와서야 인정하게 된 것 같아요. 일반적인 산문 어법은 아니니까 낯설 것이고, 어려움으로 다가올 수도 있겠죠. 읽기의 방법을 누군가가 먼저 제시해주는 것도 좋을 것 같았고요. 예전엔 시를 쓰고 시집을 묶는 나에게만 집중했는데, 지금은 한 권의 시집이 만들어지고 그것이 읽히는 자리, 시를 읽고 싶어 하는 여러 층위의 마음들을 두루 살피게 된 것 같습니다.
변화란 것은 조금 애매한 게, 사실 시집 단위별로 변화를 겪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물론 시집을 묶을 때 절반은 편집자의 자리에서 시를 배치하기 때문에 그런 재구성의 감각이 반영되며 시집이 나올 때마다 변화했다는 느낌이 생성되기는 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경험적으로는 시집이 나오고 나서가 아니라, 오히려 시집을 내기 얼마 전쯤에 어떠한 변화 같은 것이 오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변화 중인 지점 혹은 상태가 한 시집 안에 섞여 있는 거죠. 한편, 시를 쓰는 내내 계속 이어져온 것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봤는데요. 저는 알맞음에 대한 갈망이랄까 환상이랄까, 그런 게 있었어요. 말에 대해서도 삶에 대해서도요. 내가 딱 알맞은 만큼만 나일 수 있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 바람이요. 건강할 때 몸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숨 쉴 때 공기를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요. 그 갈망이 시를 쓰는 동력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보니 반대더라고요. 비로소 익숙해지면 그 익숙함이 불편한 거예요. 시를 쓸 때만큼은요. 내게 익숙한 감각, 어휘나 어법, 리듬에 들어서면 이게 아닌데 싶어요. 잘 맞는 옷만 아이러니 하게도 내 옷이 아닌 느낌. 그 불편함과 부대낌에서 벗어나려고 하니까 결국은 또 다른 알맞음을 찾아 헤매는 건가. 그렇다면 끝없이 유예되는 알맞음을 여전히 갈망하는 것일지도 모르겠고요. 아니면 불편함 속에서만 언어적 쾌락을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한 편의 시를 예로 들어볼게요. 표제작인 「자연의 가장자리와 자연사」가 네 편인데 그중 하나는 ‘다랑쉬’라는 지명에 끌리면서 시작되었어요. 제주에 갔다가 ‘다랑쉬’라는 지명을 보는 순간 무조건 저 단어가 나오는 시를 쓰고 싶다고 생각했죠. 말 자체가 동글동글하고 귀여운 느낌이라 마치 손에 꼭 쥐고 싶은 작은 돌 같지 않나요. 그러나 ‘다랑쉬굴’은 제주 민간인 학살이 일어났던 참혹한 현장이기도 하죠. 다랑쉬라는 말에 매혹되는 순간 비극적 역사의 무게 또한 외면할 수는 없어져요. 누군가의 고통에 연루된 지명을 내가 유희적으로 탐닉하는 것 같아 죄책감도 들고요. 역사적 무게를 삭제하지 않고, 그러나 그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다랑쉬다운 다랑쉬로, 새로운 장소를 생성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이때 시의 ‘우리’라는 화자는 단순한 ‘우리’여서도 안 되고, 그때 돌아가신 분들이어서도 안 되는 것 같아요. 또 다른 어떤 목소리여야만 하죠.
맞아요. 언어는 상속받은 것이고, 그 때문에 그것이 내게 올 때 온갖 찌꺼기들과 함께 오는 셈이죠. 결국은 그런 것을 모두 끌어안고 어딘가로 나아가야 할 텐데요. 그러려면 그 앞에서 한 번은 더 주저하며 서 있어야 하는 순간들이 있는 것 같아요. 다른 글을 쓸 때보다 시를 쓸 때는 그런 것에 대해 더 자주 생각하게 되고요.
제 시는 언어적 퍼포먼스, 혹은 목소리로서의 퍼포먼스에 가깝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하는데요. 첫 시집을 낼 즈음엔 시 안에 0.5명이 있었던 것 같아요.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늘어났는데, 그러면서도 뭔가 모자라거나 조금씩 남아돌아서, 1.5명의 목소리, 2.5명의 목소리, 이런 느낌이었어요. 그런 방향으로의 움직임 속에서 ‘우리’가 나타났을 거에요. 단수도 복수도 아니라서 개체인지 군집인지 알 수 없는 목소리. 형상은 흐릿해지고 운동성과 동작성만 두드러지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었고요.
바리데기 신화, 구약의 창세 신화, 『장자』에 나오는 혼돈 우화 등에 매료되고 시 안에 모티프로 활용하기도 했죠. 저는 좀 진지한 사람이라서 이 신화들을 옛사람들의 이야기로만 소비하고 싶지 않고 믿음의 방식으로 몰입하고 싶거든요. 그런데 몰입을 방해하는 것이 신화 속의 ‘아버지’예요. ‘하느님 아버지’가 되는 순간 거리감과 거부감이 생기는 거죠. 바리데기의 여정에 깊이 끌리면서도 그 여정의 계기가 죽어가는 아버지를 살리겠다는 효심이라는 걸 인정하기 어렵고요. 그 신화들이 유구한 세월을 거쳐 현재에까지 전해진 건 가부장제 안에서 보편적 호소력이 있었기 때문일 텐데, 바로 그 호소력이 오히려 저의 몰입을 가로막고 있는 거죠. 저는 제가 몰입할 수 있는 기원의 이야기를 갖고 싶어요. 믿음의 결핍 상태를 해소하고 싶기도 하고요. 그 갈망이 이번 시집에 들어 있을 거에요.
소설의 주인공이 인물, 에세이의 주인공이 생각이나 장면이라면, 시의 주인공은 말이 아닐까 싶어요. 바꿔 말하면, 단어든 구절이든 문장이든 말에 먼저 꽂혔을 때 시로 접근하는 편이에요. 표현하려는 생각이나 그리고 싶은 장면이 앞서면 산문으로 접근하고요.
신해욱 시인의 책.
주황색 표지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영화에 대한 소개와 감상을 모은 소설 『미개봉박두』
『미개봉박두』는 2015년 2월에서 2017년 2월까지 격월간으로 나온 독립 문예지 『더 멀리』의 연재 꼭지에서 시작되었어요. 영화에 대한 글을 쓰는 꼭지였는데, 한두 번 쓰다보니 재미가 없는 거에요. 그래서 중간에 방향을 틀었죠. 내가 보고 싶은 가상의 영화를 상상한 다음, 그 영화가 실제로 있는 것처럼 소개하는 콘셉트로요.
영화에 대해서만 가상의 작품을 상상해본 건 아니고요, 저는 책을 읽거나 전시회에 다녀오고 나서도 버릇처럼 내가 읽고 본 것과 다른 버전을 그려보곤 해요. ‘있게 된 것’이, ‘있었을 수도 있었을 것’을 일깨우고, ‘있었을 수도 있지만 없는 것’의 결핍을 깨닫게 만든다고 할까요. 작품의 유령들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요. 시를 쓸 때도 그렇죠. 하나의 시를 쓰고나면, 그 시가 되지 못한 잠재적 시들이 주변에 우글우글 함께 깨어나는 느낌이에요. 그런 작품들의 결핍에 또한 마음이 가죠. 그 마음을 적극적으로 형태화해본 것이 이번 책인 것 같습니다. ‘소설’이라고 이름 붙이기는 했는데 저도 잘 모르겠어요. ‘페이크 에세이’라는 명명이 어떨까 생각하기도 했고요. ‘페이크 다큐멘터리’처럼.
준비하던 책도 나온 터라 지금은 아무 계획이 없는데, 계획이 없을 때라야 저는 뭔가 뜻밖의 것과 접속되더라고요. 그게 뭘까, 더듬이를 잘 세우고 새해를 맞으면 좋겠어요. 조금 느린 속도로 읽고 싶었던 여러 책을 찬찬히 읽는 시간을 갖고 싶기도 해요.
글 최가은 문학평론가 | 사진 Studio Ken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