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듬의 시는 나의 바람
짙은 녹음이 연희문학창작촌을 가득 채운 8월 어느 날. 여름의 한복판에서 열기를 피해 김이듬 시인을 만난 곳은 지하에 마련된 문인들의 아지트, ‘책다방 연희’였다.
연희문학창작촌 입주작가들이 책을 읽거나 대화를 나누며 생각을 정리하기도 하는 곳. 이곳에서 만난 김이듬 시인은 “최근까지 출강하는 대학의 계절학기 성적을 처리하느라 며칠 밤을 새울 정도로 바쁘게 지냈다”면서 “이제는 차분하게 앉아서 작품을 집필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시인은 이날 인터뷰에서 자신의 삶에 흔적을 남긴 상처들을 되돌아보고 그로 인한 시 세계의 변화까지 마주하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현재 연희문학창작촌에 머물고 계신다고요.
이곳에는 7월 초순에 들어왔어요. 생활도 집필도 이곳에서 하고 있는데, 거주 공간 외에도 도서관이나 입주작가끼리 차 마시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보니 집중해서 일하기 좋아요. 사실은 올해 3월 경북 산불로 영덕군에 있던 집이 전소되면서 집필 공간이 없어졌어요. 그런데 불이 나기 바로 얼마 전에 서울문화재단 공모를 통해 입주작가로 선정됐다는 안내를 받게 된 거예요. 오게 되고나서는 ‘여기 아니었으면 나 지금 어떻게 됐을까’ 가슴을 쓸어내린 날도 여럿이에요. 그러다보니 ‘인생은 우연의 집합체’라는 생각도 하게 되고, 인생이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금 되새기면서 ‘이제는 무계획에 마음 가는 대로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하게 되는 요즘입니다.
경북 산불로 집이 소실된 게 불과 몇 달 전이니, 상실감이 남아 있을 것 같습니다.
3월 25일 크게 산불이 나면서 제 작업실이 완전히 불탔어요. 집이 있었던 곳은 따개비 마을로 불리는데, 해안가 절벽에 있는 곳인 데다가 서울에서 한 번에 가는 기차도 없어요. 한번 가려면 서울에서 대여섯 시간 걸리는 곳이에요. 그래서 평소에 조용히 작업하고 싶을 때가 있거나, 나중에 나이 들어서 서울에서 더 일을 하기 힘든 상황이 되면 거기서 아예 살아야지 생각하면서 제가 애정하는 아이템과 책들을 다 갖다 놓았어요. 그래서 집이 불에 타면서 사라지면서 그토록 아끼던 물건들이 사라지고 제 꿈도 폐허가 됐어요. 그 이후로 계속 심리 상담을 받아야 했고, 최근까지도 수면유도제 먹으면서 지내다가, 겨우 정신 차린 게 한 달도 안 돼요. 어떤 스승님이 제게 “누군가와 만났을 때 인간에 대한 예의가 명랑”이라고 하더라고요. 그걸 이번에 실천하려고 굉장히 많이 노력하고 있어요.
25년간 시 쓰며 시적 화자도 변해
김이듬 시인을 얘기할 때 ‘여성에 대해 말하는 시인’ 또는 ‘여성의 목소리로 말하는 시인’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습니다. 2005년 발간한 첫 시집 『별 모양의 얼룩』에서부터 『명랑하라 팜 파탈』, 『히스테리아』, 『표류하는 흑발』, 『투명한 것과 없는 것』까지 모두 여성으로서의 감각이 강렬하게 느껴집니다.
저는 ‘여성 문제에 대해서 내가 나서서 공론화하겠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어요. 리얼리즘·페미니즘 이런 식으로 묶이는 것 자체에 대해서도 강박적으로 싫어하는 경향이 있고요. 묶이면 갑갑해서 죽을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요. 나의 의도와 무관하게 사후적으로 비평가들이 한국의 페미니즘 시인으로 분류한 것이죠. 그렇지만 여성이라는 것은 혈액형처럼 그냥 저를 구성하고 있는 것, 늘 따라다니는 감각이에요. 여성의 목소리는 태생적인 목소리죠. 뭐라고 설명할 수 없지만 뼈에 사무친 게 있는 것 같아요. 시를 쓸 때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상처 입거나 버려진 여성에 대한 뉴스를 보면 자연스럽게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요.
여성에 대해 의식적으로 사유하고 글을 쓰게 된 지점이 있지 않을까요.
어릴 때부터 어머니란 무엇인가에 대한 궁금증이 내 안에 크게 자리하고 있었어요. 제 첫 시집 『별 모양의 얼룩』에 나오는 첫 시가 ‘거리의 기타리스트’인데, 그것도 모성이란 무엇인지에 관한 질문에서부터 시작한 작품이에요. 아주 어릴 때, 무언가를 사유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왜 엄마는 나를 떠났을까’, ‘인간은 모두가 모성애를 가지고 있는 걸까’ 등의 질문을 하곤 했어요. 근데 그것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한 게 제가 문학이었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여자란 무엇인가, 모성애란 무엇인가로 자연스럽게 작품의 주제가 흘러간 거죠.
길거리의 여자는 기타를 껴안고 있다
젖통을 밀어넣을 기세다 어떻게든 기타를 울려 구걸해야 한다
비가 오기 시작하면 더 조급해진다
기타의 성기는 소리이므로 딸을 걷어차기 시작한다
(‘거리의 기타리스트’ 중)
시가 어릴 때부터 삶의 일부였던 셈이네요.
어린 시절부터 뭔가 외로우니까 쓰게 된 거고, 말할 데가 없으니까 또 쓰게 된 거예요. 그러다보니까 글들이 자연스럽게 시가 된 거죠. 어릴 적부터 누가 나한테 시 써라, 공부해라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었고, 오히려 구박도 받았어요. 아버지에게 ‘네가 무슨 시를 쓰냐’, ‘시를 쓸 거면 윤동주 시인처럼 쓰라’는 이야기를 듣고 자랐거든요. 그런데도 무용하는 친구들 중에 춤을 안 추면 미칠 것 같아서 추는 친구가 분명히 있듯이, 저한테는 시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것이었어요. 동시에 저도 시를 쓰면서 세상을 견디고 이겨나온 거예요.
김이듬의 시 속에 있는 여성 화자들은 어떤 모습인가요.
제 시집 중에 『명랑하라 팜 파탈』2008이라는 책이 있어요. 팜 파탈은 예를 들어 ‘욕먹을 만한 여자’라고 프레임이 씌워진 여자들, 그러니까 굉장히 똑똑하다거나 승부욕이 있다거나 관능적인 면모를 가진 여자들을 의미해요. 저는 기본적으로 드세고 기세고 자기주장 강한 여성에 대해 굉장히 사랑을 느껴요. 그런데 동일한 성향을 보여도 때로 남자에게는 힘세고, 승부욕이 있다는 수식어가 붙지만, 여자에게는 되바라지고, 남자를 누르려 든다는 평이 따라다녀요. 그런 사회적 인식에 대한 반동 심리로 팜 파탈에게 ‘명랑하라’고 주문한 것이죠. 그런데 실은 제 시 속의 여성 화자도 많이 바뀌었어요. 제가 시를 발표하기 시작한 지가 어느새 25년째인걸요. 지금의 여성 화자는 나를 버리거나 괴롭힌 사람에 대해서도 어떻게든 이해해보려고 애쓰는 사람으로 바뀌었어요. 이전엔 여성을 억누르는 사람들에 대해 ‘한 대 뺨이라도 때리고 싶다’고 분노하기만 했다면, 이제는 ‘너 혼자만의 문제는 아니겠지, 사회에서의 잘못된 경험과 가정교육을 통해 그렇게 된 거겠지’ 하고 생각해보게 되더라고요. 그런데 그마저도 제가 의도한 바는 아니에요. 피카소나 샤갈도 그림을 그리다가 그림이 바뀐 거지, 몇 년도부터 이렇게 그리겠다 이런 건 아니었을 것 같거든요.
왜 시 세계나 작법에 변화가 찾아왔다고 생각하시나요.
제가 좀 무책임한 건지 몰라도 제가 왜 이렇게 변해가는 건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저는 그냥 진솔하게 쓰는 거예요. 과거에는 내가 정말로 세상과 맞대결하는 느낌으로, 치열하게 사랑으로 언어를 만졌고, 또 이후에는 그때그때 저의 모습으로 시를 쓴 거죠. 기계는 계속 똑같은 제품을 똑같이 찍어내면 되는데 사람은 계속해서 변하니까 당연히 작품도 변하겠죠. 그런 저를 바라보는 다양한 평가에 대해서는 그저, ‘내가 그렇게 변했구나. 앞으로는 근데 또 어쩌지’ 하고서는 또 써지는 대로 쓰는 것 같아요. 부는 바람을 인간이 의도하고 그럴 수 없는 거잖아요. 저는 공작소에서 하듯이 언어를 배치하기보다는 바람이 불면 훅 날리는 것처럼 시를 쓰거든요.
시간이 흐르면서 찾아온 자연스러운 변화라는 의미인가요.
물론 그렇게 된 건 그냥 시간을 보낸 결과라기보다 오랜 기간 책 한 권 한 권이 쌓여서 만들어진 결과 같기도 해요. 그냥 소설 한 권, 인문학 서적 한 권, 미술 관련한 책 한 권이 저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은연중에 가르쳐준 것 같아요. 수녀님들이 기도하거나 스님들이 염불 외우는 것처럼 저도 읽고 쓰면서 일종의 수련을 한 것이라고 할까요. 그래서 타인에게서 문제점을 찾던 것을 나에게서 찾아보고, ‘나도 저런 면이 있었지, 누군가에게 상처를 줬겠지’ 하며 성찰하게 된 거죠. 지나서 생각해보면 제 시가 많이 바뀐 이유에는 ‘책방이듬’을 운영하면서의 경험도 연관된 것 같아요. 2017년부터 책방을 운영하다가 재작년에 닫게 됐는데 그전에는 제가 잘난 줄만 알았고 이기적인 면도 있었어요. 술집에 갔을 때 싫어하는 작가가 있으면 바로 뒤돌아 나올 정도로 싫은 사람과 절대 어울리지 않았고요. 그런데 책방을 하면서 싫은 사람도 만나야 하고, 누구한테 책 한 권 팔려고 한참 얘기도 해야 하고, 그러다보니 성격이 바뀐 것도 있어요.
실제로 가장 최근인 2024년 출간한 시집 『누구나 밤엔 명작을 쓰잖아요』에 대해서는 “김이듬 시의 변곡점”이라는 평도 나왔어요.
지금의 시에 대해 양가적인 반응이 있는 것 같아요. 원래 제 시를 좋아해주신 독자분들은 나쁘게 말하면 ‘시가 풀어졌다’고 하시고, 반대로 또 어떤 분들은 ‘이제 좀 소통이 되는 것 같다’고 하시고요. 제 지인도 몇 해 전에 나온 제 시집 보고서는 현대적이고 미학적이기는 한데 무슨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고 읽고나서 피곤했다고도 했거든요. 그런데 지금 시가 훨씬 더 편하다고 하는 분들도 계세요.
김이듬의 『누구나 밤엔 명작을 쓰잖아요』는 지난 6월 제15회 이형기 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문학평론가 이재복은 “이전 시에서 만날 수 있는 파격과 히스테릭한 감각 대신 이번 시집에서는 평이하면서도 익숙한 언어가 일상의 문법과 질서 속에서 새로운 시적 담론을 구축하고 있다”고 평했다.
국내외 문단에서 다수의 상을 받으면서 작품성을 인정받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이 독자의 사랑인 것 같습니다. 독자들은 김이듬의 시를 왜 좋아한다고 생각하나요.
제가 결핍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결핍이라는 게 뭐 나쁜 것만은 아니잖아요. 누구나 조금씩 가지고 있는 거고요. 가령 친구가 많이 없다면 결핍의 요소일 거고, 부모의 사랑을 많이 못 받았으면 그것도 또한 결핍의 요소일 테니까요. 그런 결핍은 어쩌면 또 창조력과도 연결되는 거니까, 결핍을 좀 더 긍정적인 에너지로 전환하려고 하는 분들이 제 시집을 읽어주지 않나 싶어요. 사실 시인이 자기 시가 독자들로부터 왜 사랑받는지 잘 몰라요. 어디 가서 모니터링을 해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웃음)
해외 수상 소식에 위로받다
김이듬의 시가 해외에서도 특히 주목을 받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요. 2020년 시집 『히스테리아』는 미국 문학번역가협회 전미번역상과 루시엔 스트릭 번역상을 동시에 수상해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전미번역상을 받을 때 심사평을 봤는데 “과도하게 비이성적이고”, “그렇지만 재미있고 흥미롭고”라는 구절이 있더라고요. 한국에서는 칭찬이 아닌데, 미국 사람들은 그게 칭찬이었나봐요. 거기서는 체계화되고 정제되며 논리적인 언어는 ‘논문의 언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때 제가 ‘한국에서 욕먹던 이유로 상을 받는구나. 내 멋대로 써도 되는구나’ 그랬거든요. 그래서 ‘이 세계에서는 눈이 세 개여서 욕을 먹는데 또 다른 세계에 가면 그것 때문에 너무 매력적이고 멋지다고 하는구나. 이 세계에서 만약에 미움받는다고 해서 다 끝난 건 아니구나’ 이런 위로를 받았어요.
확실히 한국 시에 대한 해외의 관심이 높아진 것 같습니다.
지난해 한국 문화를 메인 테마 중 하나로 한 해외 축제에 갔는데, 거기서 K-팝, K-푸드와 함께 K-포엠poem을 하나의 분야로 다루더라고요.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기 전인데도 말이죠. 확실히 한국 시를 주목하는 분위기가 조성돼 있고 해외 작가들이 ‘너희들 왜 그렇게 시 잘 쓰냐’고 물어오기도 해요. 다만 아직은 한국문학번역원 같은 기관을 통해 작품이 해외에 나가는 경우가 많아요. 정부나 지자체 기관에서 유명 작가가 아니어도 소외된 작가들, 작품은 좋으나 아직 많이 발굴되지 않은 작가에게도 골고루 해외에 소개될 기회를 주면 좋겠어요. 저도 외국에 나가면 항상 한국 시인 시집 몇 권을 가지고 가요. 일부러 해외 편집자한테 한번 봐달라고 주고 오기도 해요.
한국처럼 시를 많이 읽는 나라가 많지 않다고 하던데요.
한국인이 다 시인이자 독자여서 그래요. 우리는 시골 할머니들도 종이 주고 시 한 편 쓰라면 하면 다 써요. 우리 민족에게 일종의 시의 DNA가, 흥이 있는 거예요. 젊을 때 동사무소에서 시와 관련한 강의를 했는데 80대 퇴직 교사들도 와서 시를 한 수 쓰고 싶어 하더라고요. 그걸 보고 한국인에게는 누구나 마음을 한번 툭 건드리면 시가 탁 샘솟는 게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마음 한편에 시를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있는 것 같아요. 지하철 유리 벽에 시를 적어놓고 광화문 사거리 큰 건물에 시를 걸어 놓잖아요. 그런 문화가 특별하죠.
글 인지현 문화일보 기자 | 사진 강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