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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호

정세랑, 현실을 뛰어넘고 상상의 한계를 돌파하는

영어 접두사 ‘트랜스trans’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크게 두 가지 뜻이 있는 것으로 나온다. 보통 형용사나 동사 앞에 붙어서 ‘변화’ 또는 ‘초월’의 의미를 부여한다고 돼 있다. 변화와 초월. 얼핏 보기에는 의미상 서로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통하는 구석이 있는 것 같다. 변화는 주어진 조건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정해진 한계를 극복하려는 몸부림 아닌가. 운명에 순응하지 않는 것, 세상이 부여한 역할에 맞서는 것. ‘트랜스’는 단순한 접두사가 아니다. 오늘날을 관통하고 있는 시대정신이다.

이런 ‘트랜스 정신’에 가장 잘 어울리는 요즘 소설 속 주인공은 누구일까.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는 인물이 바로 설자은이다. 통일신라를 활보하는 남장 여자 탐정, 그 자신은 ‘평범한 문서 관리자’가 되고 싶었으나 세상이 그를 평범하게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던. 설자은 시리즈를 쓴 소설가 정세랑에게 설자은 탄생 비화를 들었다. 2023년 『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를 펴낸 뒤 얼마 전 속편 『설자은, 불꽃을 쫓다』2025를 출간했다. 설자은은 어디까지 갈 것인가. 또 앞으로는 무엇을 할 것인가. 그보다 더 중요한 첫 번째 질문, 왜 하필 ‘통일신라’인가.

“통일신라에 늘 관심이 있었어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외부의 적이 사라진 시대에 어떻게 내부를 통합하고 제도를 가다듬었을지 궁금했습니다. 특히 신문왕 시대에 행해진 일들이 무척 합리적으로 보였기에 마음이 끌렸고요. 국제적이고 화려했던 문화도 그려내고 싶었습니다.”

정세랑은 편집자로 책을 만들다가 소설을 쓰기 시작해 2010년 데뷔했다. 문단에서는 장르문학과 순문학을 엄격히 가르는 편이지만, 이런 분위기에 그리 개의치 않는 듯 양쪽 가리지 않고 작품을 써낸다. 소설가가 된 뒤에도 역사 시리즈물을 쓰고 싶은 마음을 깊이 품어왔다고 다른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는데, 그러고보니 고려대학교 역사교육과를 졸업했다. 역사를 향한 남모를 부채 의식 같은 게 있었던 걸까. 설자은 시리즈를 쓰면서 기억에 남는 독자의 반응을 물었더니 정세랑은 “학령기의 자녀와 함께 소설을 읽고 있다고 전해주실 때 기쁘다”고 했다. 그러면서 “학교에서 역사 수업을 생생하게 듣는 10대 청소년이 시리즈의 재밌는 구석을 잘 발견하는 것 같다”고도 덧붙였다.

무대가 과거인 만큼 철저하고 꼼꼼한 고증은 필수다. 역사물만이 전할 수 있는 쾌감이 설자은 시리즈의 매력 포인트 아니겠는가. 통일신라의 수도였던 천년고도 경주는 소설을 위한 취재를 시작한 이후 매년 가고 있단다. 특히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는 신라천년서고에서 도움을 많이 얻었다. 신라천년서고는 박물관 안에 있는 도서관으로, 다양한 자료를 열람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이곳에서 집필에 필요한 책들을 수십 권 넘게 찾았다고 한다. 그러나 단순히 과거의 자료에만 얽매이지 않는다. 최근 고고학 발굴을 통해 새로 알려진 사실도 꾸준히 따라가고 있다. 활자로만 머무는 역사가 살아서 움직이는 소설이 되기 위해서는 얼마간의 생생함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설자은 시리즈의 목적이 통일신라를 ‘다큐멘터리’처럼 있는 그대로 복원하는 건 아니다.

“취재한 것을 잘 소화해 ‘있었을 법한’ 공기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렇게 노력한다 해도 틀린 부분이 많을 테지만, 꾸며낸 이야기임을 분명히 하면 용인될 수 있지 않을까요?”

설자은은 원래 설자은이 아니었다. 어떤 역설의 뒤편에는 슬픈 이야기가 깔린다. 설자은은 원래 설미은이었다. 설씨 집안 여섯째로 태어났으나 병으로 죽은 다섯째 자은을 대신하게 됐다. “다섯째로 살면 다섯째를 살린 것 같을까?”라는 소설 속 문장은 쉽게 해명되지 않는다. 미은은 그렇게 자은이 돼 자은의 운명을 걸머지고 여자의 몸으로 남자의 삶을 살아간다. 내가 선택하지 못한, 남이 규정한 모습으로 평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건 예나 지금이나 슬픈 일이다. 설자은에게 이런 가혹한 짐을 던져준 정세랑은 이렇게 말했다.

“활보하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고 싶었어요. 시대를 감안하면 여성은 어려울 것 같았고요. 그렇다고 주인공 둘 다 남성이면 여성의 세계에 진입할 때 난처해지지 않을까도 염려했습니다. 여러 성별을 움직일 수 있어야 전개하기 쉬우니까요. 과거를 미화하지 않으면서 행동반경을 넓히려고 하다가 ‘클리셰’를 빌리기로 했고, 그러면서 동시에 이 클리셰를 비틀고도 싶었습니다. 그러다 나온 것이 설자은의 성별을 의심하는 자들인 거죠. 그런 자들이야 항상 있을 테니까요. 그러나 설자은이 ‘권력’을 얻으면 더는 묻지 않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질문을 받지 않는 게 권력의 특징이니까요.”

일개 사설탐정이던 설자은은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권력과 가까워진다. 작가가 의도한 1권과 2권의 가장 큰 차이도 여기에 있다. 2권에서 설자은은 ‘집사부 대사’에 임명된다. 한국사 시간에 배우기로 집사부는 신라의 최고 권력 기관이다. 거기서 제3등 관직인 ‘대사’는 복잡하게 따질 것 없이 ‘엄청 높은 자리’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권력을 가졌다고 해서 설자은의 삶이 더 순탄할까. 으레 권력이 있으면 삶도 수월할 것 같지만 착각이다. 오히려 권력의 중심에 다가설수록 설자은은 더 힘들어진다. 권력이란 원래 이런 것이다. 내가 손에 쥐고 있는 권력이 무거울수록 책임도 커지고 생각도 깊어져야 한다. 뻔하고 당연한 진리를 우리 위정자들은 알고 있을까. 설자은이 권력을 갖게 된 2권을 통해 정세랑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설자은은 사에서 공의 영역으로 움직여요. 그 변화 때문에 고통도 느끼겠지만 시야가 넓어지지 않았을까요? 어깨가 무거워지고 내면이 단단해졌을 겁니다. 앞으로 더 큰 정치적 사건 속에 설자은을 던지고 싶어요.”

장르가 추리물인 만큼 고전으로 치는 아서 코난 도일의 셜록 홈스 시리즈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모르긴 몰라도 인간이 문학으로 창조한 인물 중에서 셜록 홈스보다 유명한 이는 없을 것이다. 추리물을 쓰는 작가로서 셜록 홈스가 머릿속에 없었다면 거짓말일 것. 정세랑 역시 “셜록 홈스의 천재성을 사랑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셜록 홈스에게는 없는, 설자은에게만 있는 매력은 무엇일까.

“설자은은 천재가 아니라는 점이 독자에게 친밀하게 다가갈 것 같아요. 본인은 조용하고 평범한 문서 관리자로 살고 싶었는데 어쩌다보니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인생이 원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가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누구의 삶이나 조금은 그렇지 않나요? 엉망으로 휘말렸지만, 일단은 헤쳐 나간 경험이 현대인에게도 있으니 설자은에게 공감해주시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한계 없이 뻗어나가는 상상력

요즘 독자 중에는 재밌는 소설을 읽으면 “넷플릭스 드라마를 보는 것 같다”고 평가하는 이도 있다. 세계를 호령하는 온라인동영상플랫폼OTT 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아닌 게 아니라 정세랑 역시 앞선 작품 가운데 넷플릭스 시리즈로 만들어진 소설이 있다. 정유미·남주혁 주연의 <보건교사 안은영>이다. 확실히 장르문학은 영상화의 쾌감이 있다. 설자은을 읽으면서도 이런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소설 제목부터 떡하니 등장하는 주인공과 그가 종횡무진 활약하는 모습들. 작가도 영상화를 생각했을까. 만약 그렇다면 누구를 떠올리면서 설자은을 그린 것일까. 아직 이 소설이 영상으로 만들어진다는 소식은 없다. 그래도 설자은에 푹 빠진 독자라면 머릿속에서 ‘가상 캐스팅’을 해 봤을 수 있겠다. 혹시 작가가 염두에 둔 배우도 있을까. 정세랑은 묘하게 확답을 피했다.

“사극은 제작비가 많이 드는 편이라 들었어요. 영상화가 되면 좋겠지만, 어려울 수도 있겠다 싶어요. 설자은의 얼굴은 마음속에서 계속 변하고 있는데. 키가 크고 서늘한 느낌이 살면 좋겠다는 생각이고요. 워낙 멋진 배우들이 많아 자꾸 설자은에 대입해보기는 합니다.”

다시 셜록 홈스로 돌아가보자. 셜록 홈스 시리즈를 언급하면서 주인공 셜록 홈스만 이야기하는 것은 ‘누군가’에게 상당한 실례가 되는 일이다. 바로 존 왓슨이다. 존 왓슨이 없었다면 셜록 홈스도 없었다. 설자은에게도 이런 영혼의 단짝이 있다. 백제 출신의 장인 목인곤이다. 설자은과 목인곤은 당나라에서 신라로 돌아오는 배에서 만난다. 설자은과 달리 목인곤은 경우가 조금 딱하다. 유학을 다녀왔더니 조국인 백제가 오간 데 없이 없어졌으니 말이다. 설자은이 남장 여자인 것을 대번에 알아본 목인곤은 그 대단한 눈썰미로 설자은을 옆에서 돕는다. 목인곤은 어떻게 창조된 인물일까.

“몇백 년 된 나라도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으니까요. 돌아갈 나라가 없어진 이의 황망함과 그래도 또 살아나가는 생명력을 동시에 표현할 수 있는 인물이었으면 했습니다. 과거는 각박했고 미래는 보이지 않지만, 오늘의 즐거움은 놓치지 않는 이로 그리고 싶었어요. 단순한 보조가 아니라 동반자로서 주인공과의 관계가 대등해 보였으면 합니다.”

장르문학에는 일정한 ‘문법’이 있다고들 한다. 쓰는 이와 읽는 이 사이에 공유하고 있는 틀을 의미하는 것일 테다. 그것에 충실하면 충실한 대로, 충실하지 않으면 충실하지 않은 대로 나름의 쾌감을 일으킨다. 장르문학이 끊임없이 창작되고 그 세계가 확장하며 발전하는 이유는 확실한 문법과 그것을 뒤틀고자 하는 창작자의 욕망 때문일 것이다. 설자은 시리즈 속 다양한 에피소드의 아이디어는 자료를 쌓아놓고 읽으면서 얻는다고 한다. 읽다가 흥미로운 지점들을 메모하는데, 그것들은 바로 에피소드가 되기도 하고 몇 년 묵혔다가 불현듯 떠오르기도 한다. 전혀 관련 없는 소재들이 갑자기 자석처럼 붙을 때가 있는데, 그때 정세랑은 노트북을 연다. 장르문학과 순문학의 경계를 자유로이 오가는 작가는 설자은 시리즈에서 “장르문학의 문법을 굳이 깨고자 애쓰지 않았다”고 했다. 그럼에도 크게 신경을 쓴 부분은 있다. 바로 ‘죽음’이다.

“장르적 쾌감과 ‘B급 감성’을 좋아하는 편이라 (장르문학의 문법을) 깨고자 노력하지는 않았습니다. 한 가지 염두에 둔 것은, 이야기 안에서 사람이 죽는다면 그것을 가볍지 않게 다루려고는 노력했죠. 추리물은 종종 시신을 발견하고 바로 게임을 하듯 넘어가는 경우가 있거든요. 가상의 세계이지만 주의하려고 합니다.”

통일신라를 무대로 활보하는 설자은을 볼 수 있는 책은 앞으로 한 권 남았다. 하지만 특별히 애착을 가지고 있는 캐릭터인 만큼 이야기를 더 이어나가고 싶다고 했다. 계속 과거에만 머무를 순 없으니 3권 이후에는 현대물을 준비하고 있다. 다른 인터뷰에서 정세랑은 “10권까지 쓰고 싶다”고 했다. 그는 “40대 초반에 시작한 시리즈를 60대, 70대까지 쓰고 싶은 욕심이 있다”고 밝혔다. 그토록 사랑하는 설자은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는지 물었다.

“고생스러운 이야기의 주인공을 시켜 미안하지만, 의연하게 나아가기를 바라요. 가장 오래 함께하고 싶은 주인공이니 잘 부탁합니다.”

작가에게 ‘소설을 사랑하느냐’고 묻지는 않았다. 너무 낯간지러울 것 같아서다. 하지만 여러 질문을 통해 유추한 결과 정세랑은 분명 소설을 사랑하는 것 같았다. 하고많은 예술 중에서 왜 하 필 소설을 쓰는지 물었더니 상당히 ‘경제적인’ 관 점에서 이유를 댔다. 소설은 쓰는 데 작가와 컴퓨 터 한 대만 있으면 된다고. 물론 책을 출간할 때 인쇄가 필요하고 이 비용도 상당히 오르고 있지 만, 예컨대 영화에 비하면 자본으로부터 한없이 자유로운 예술이다. 문학의 힘은 어쩌면 여기에 있다. ‘저렴하게’ 창조할 수 있는 예술이지만, 그 렇기에 그 어떤 제약에도 구속되지 않는다. 상상 력은 한계 없이 뻗어나간다. 그걸 적당히, 멋지게 설명할 수 있는 글재주만 있으면 문학은 성립한 다. 현실에서 시작한 문학은 결코 현실에만 머무 르지 않는다. 현실을 뛰어넘고 상상의 한계를 돌 파한다. 그리고 그곳을 우리 세계의 영역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의미에서 문학의 이념을 ‘자유’라 고 하는 주장은 타당하다.

“현실적인 조건들을 따지지 않아도 되는 게 좋아 소설을 썼고, 그 독립성이 분명 공동체에 기여하는 부분이 있다고 봅니다. 흰 바탕의 검은 글자를 각자 읽어내면, 읽는 사람의 머릿속에서 3차원이 된다는 게 놀랍죠. 소설을 통해 동시대의 사람들과 존재하지 않는 여러 삶을 풍부하게 통과하고 싶습니다.”

정세랑은 데뷔한 지 15년이 됐다. 대중의 뇌리에 여러 작품을 각인시키며 동시대 독자들에게 확실한 인상을 남긴 소설가로 평가된다. 앞서 언급한 『보건교사 안은영』2015 외에도 『지구에서 한아뿐』2012, 『피프티 피플』2017, 『시선으로부터,』2020 등을 써냈다. 스스로 느끼기에 ‘성격이 건조한 인물’을 자주 쓰는 것 같단다. 이글이글한 면은 그다지 없는, 평범한 생활인들이다. 하지만 원래 평범하기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아니겠는가. 평범을 꿈꾼 정세랑 소설 속 주인공들은 평범을 ‘초월’한다. 설자은도 그렇다. 창비장편소설상·한국일보문학상 등 걸출한 상도 여럿 받았다. 설자은 외 어떤 소설을 쓰고 싶은지 물었다. 그는 “모험하고 싶다”고 했다.

“다양한 매체와 다양한 장르를 오가며 모험하고 싶어요. 도전해보지 못한 장르인 호러도 언젠가는 해 보고 싶고요. 쉽게 요약되지 않는 작가로 기억되고 싶어요. 엉뚱한 걸 시도하며 성취도 하고 실패도 한 사람으로요.”

글 오경진 서울신문 문화체육부 기자

사진 강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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