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지 작가의 머무는 것들
네덜란드 체류 시절 제작한 작업을 그곳에 남겨둔 채 돌아온 이수지는 도구와 결과, 전시의 관계를 둘러싼 질문을 오랫동안 붙들어왔다. 작가의 작업은 완성보다 그에 이르는 시간을 어떻게 다루는가에 초점을 둔다.
금천예술공장의 성격은 또렷해요. 공장지대 한가운데 있는 레지던시라는 점 때문에 처음에는 ‘미술을 생산하는 공간’으로 여겨졌어요. 심지어 이름도 ‘공장’이잖아요?(웃음) 시간이 지나며 내부 환경이 예상보다 훨씬 세심하게 갖춰져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무엇보다 작가들의 제작 방식까지 염두에 두고 준비한 곳이란 점이 눈에 띄었죠. 저는 나무를 주로 다루는데, 필요한 장비와 조건이 정확히 마련돼 있어 작업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오픈스튜디오도 기억에 남아요. 동네 주민들이 자연스럽게 공간을 찾았거든요. 미술에 익숙하지 않음에도 공간과 작업을 존중해주신 점이 인상적이었어요. 또 금천예술공장을 오래 지켜온 소장님이 직접 가꾼 과일을 작가들 방 앞에 두고 나누던 일상적인 장면들이 조용한 환대로 남았습니다.
2025년은 작업 방향을 점검해야 하는 시기라고 판단했습니다. 오랜 시간 ‘사적인 형식’이나 ‘내용의 부재’를 중심으로 작업해왔지만, 이들이 제 안에서 충분히 정리되지 않고 바깥으로도 선명하게 전달되지 않는다고 자각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다른 매체를 통해 사적인 형식과 내용의 부재를 다뤄보고자 했어요. 처음으로 퍼포먼스와 이를 기록하는 영상 작업을 시도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해보는 형식이라 낯설었지만, 3층의 넓은 갤러리 공간과 여러 장비를 활용할 수 있어 비교적 무리 없이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퍼포먼스는 미리 짜인 장면을 실행하기보다 사전에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물질과 신체가 만나 어떤 형식이 발생하는지를 지켜보는 일종의 수행이었습니다.
2025년 WWNN에서 연 개인전 《내용없음》 전시전경
제가 말하는 ‘어떻게’는 미리 설정된 절차나 명확한 계획과는 거리가 멀어요. 저에게는 작업을 이어가면서 등장하는 개인적인 선택과 반응이 중요합니다. 만족이나 망설임, 실수와 수정 등이 물리적 행위로 이어지고, 이들의 축적이 작업 형식으로 남기를 바라며 작업을 지속해왔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도구를 다루는 감각에서 비롯했습니다.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하던 시절, 컴퓨터나 기계를 도구로 대하지 못하고 되레 제가 도구에 길드는 것 같았거든요. 이로 인해 무언가 구체화하기까지의 순간들을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사소한 과정을 사적인 영역으로 전환하고, 이를 재차 사유하는 방식. 저에게 ‘어떻게 만드는가’는 바로 전환과 사유의 흐름을 자각하는 일을 의미합니다.
서체는 본디 대량 생산을 전제로 설계된 글자입니다. 글자는 ‘쓸 수 있음’과 ‘읽을 수 있음’ 두 가지 속성을 지니고 있는데, 그중 ‘쓴다’는 행위는 ‘그린다’거나 ‘제도한다’는 것과 달라서 본능에 기대는 움직임이라고 생각해요. 반면 서체는 형태와 두께, 곡선이 고정돼 있어 아주 작은 변화에도 다른 서체로 인식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서체는 읽을 수 있지만, 물리적으로 ‘쓸 수 없는’ 글자라고 느꼈어요. <글자 쓰는 기계>는 ‘서체를 어떻게 다시 물리적으로 쓸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서 출발했습니다. 보도니 서체를 선택한 이유는 명확해요. 수학적으로 계산된 구조인 데다가 세리프serif(글자 획의 끝이 돌출된 형태) 서체임에도 각 획의 형태가 일정해 해체와 복제가 용이했기 때문입니다. 작업은 보도니 서체를 구성하는 요소를 해체해 26가지 형태소로 정리하고, 여기에 규칙과 코드를 부여해 26개의 맵을 구성했는데요. 코드에 따라 기계를 수동으로 움직이면 중앙에 있는 펜이 마치 스스로 글자를 쓰는 것처럼 작동하도록 했습니다.
<정육면체를 만드는 방법>, 2025, 단채널 영상, 컬러, 사운드, 1시간 42분
<100줄의 실을 위한 합사기>2022를 예로 들면, 실을 합사하기 위해 바퀴를 돌리는 행위는 매우 단순합니다. 그런데 똑같은 동작을 수천 번 반복하다보면, 아주 미세한 차이나 새로운 문제에 직면하게 돼요. 물리적 한계일 때도 있고, 스스로 생겨난 의식이나 의심이 표면에 떠오르기도 하죠. 그런 상태를 감지하고, 조정하거나 그대로 두는 모든 과정이 저에게는 ‘사적인 형식’으로 남습니다. 그렇게 반복의 시간이 축적되면서 제가 어떤 경로 위에 서 있는지, 다음으로 무엇을 고민하게 될지를 깨닫는 것 같습니다.
전시는 언제나 고민의 대상이에요. 하나의 작업이 끝나면 다음 작업으로 넘어가는 방식이 아닌 까닭이죠. <글자 쓰는 기계>에서 시작해 지금까지의 작업이 하나의 세계관을 추가하고 확장하는 중입니다. 그래서 결과물이 전시의 형태로 보인다 해도 어디까지나 과정의 일부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요. 그런 감각은 전시 형식에도 그대로 반영됐는데요. 대표적으로 도구만을 보여주는 《네 가지 도구》(2023, 김희수 아트센터), 결과물과 실패의 과정을 함께 보여준 《글리치필릭》(2024, 수림큐브), 도구 없이 결과물과 생각의 단편을 펼쳐 보인 《내용없음》(2025, WWNN) 등이 있습니다.
‘온점을 찍지 않으려는 시도’가 적합한 표현이에요. OCI 미술관에서 열린 전시 《Liminal Phase: 4장과 5장 사이》2022 이후 작업 안에서 ‘도구를 어디에 위치시켜야 하는지’ 계속 고민했어요. 전시실 안에서 도구가 결과물과 비슷한 무게로 보이거나, 때로는 하나의 작품처럼 인식되는 상황이 모순처럼 다가왔거든요. 제 작업실에서 도구는 어디까지나 도구로만 사용됩니다. 도구 위에 짧은 노트를 적기도 하고, 때가 묻거나 커피가 흘러 흔적이 남기도 하죠. 그런데 전시장에 놓이는 순간, 그런 사용감이 지워진 채 작품처럼 격상되는 태도를 저 스스로 취해온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어요. ‘도구는 도구일 뿐이다’라는 말을 되뇌다보니 네덜란드에 남겨둔 두 작품이 떠올랐습니다. 초기 작품처럼 느껴져 쉽게 버리지도, 공간적인 이유로 한국으로 옮기지도 못한 채 남겨두었던 두 도구를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폐기하기로 했습니다. 결정을 내리기까지 거의 2년이나 걸렸어요. 해체된 나무들은 책장으로 부활했습니다. 도구들이 작품처럼 보이는 게 불편했던 건 그 장면이 작업에 온점을 찍는 행위처럼 보여서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도구의 폐기’는 도구의 시간이 완성된 작품의 시간과는 다르게 흐른다는 사실을 스스로 받아들이며, 전시에 놓인 것들이 여전히 과정 중에 있음을 드러내기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해방감이요! 비로소 도구를 도구로 직면하게 됐거든요. 이후 도구를 전시할 때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용감이 있는 상태 그대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네 가지 도구》를 잇는 전시예요. 《네 가지 도구》에서 공개한 새로운 도구를 이용해 결과물을 완성하는 것이 초기 구성이었어요. 하지만 도구를 만드는 일과, 그것으로 결과물에 이르는 일 사이에 예상보다 길고 반복되는 실패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전시 직전 정육면체 하나와 원통 하나를 겨우 완성할 수 있었죠. 작업이 지연될수록 실패의 부산물들을 모았습니다. 결국 애초의 기획은 무산됐고, 전시 자체가 예기치 못한 오류의 연속이라는 점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글리치는 시스템을 멈추게 하지는 않지만, 결과물의 밀도를 바꾸는 미세한 차이예요. 아무리 완벽하게 통제해도 어김없이 조금씩 튀어나오는 어긋남 같은 것들이죠. 반면 버그는 작업이 실제로 중단되는 대목을 가리킵니다. 전시에서는 이 둘을 구분해 배치했는데요. 실패를 미화하기보다는 어떤 오류가 작업을 앞으로 밀어주고, 어디에서 멈춰서는지를 짚어보고 싶었습니다. 저에게 완벽함은 기계가 찍어내듯 균질한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복 속에서 필연적으로 생기는 미세한 차이와 통제 불가능한 무작위성까지 포함하는 상태입니다. 예컨대 <글자 쓰는 기계>를 통해 글자를 써낼 때 긴 시간을 들여도 동일한 형태의 글자는 단 하나도 나오지 않았어요. 반복할수록 차이는 더 분명해졌고요. 그런 의미에서 글리치는 제거해야 할 결함이 아닌, 작업이 도달할 수 있는 밀도를 성립하는 조건처럼 남습니다. 제 작업의 사적인 형식 역시 글리치와 버그가 축적되는 과정에서 형성돼왔다고 생각합니다.
없다고 봐요. 대상을 대상으로만 바라본다고 해도 시선에는 어떤 방향성과 태도가 스며들기 마련이니까요. 제가 말하는 형식은 철학적 순수성에 도달하려는 개념이 아닙니다. 과정과 선택이 축적되며 끝내 지워지지 않는 개인의 흔적을 가리킵니다. 즉 ‘사적인’이라는 전제를 벗어날 수 없는 상태, 곧 ‘이수지’라는 주체가 개입된 형식인 셈이지요. 저는 이것이 드러나도록 의도적으로 시간을 늘리고, 반복이라는 조건을 부여해 반응을 포착합니다. 앞서 언급한 영상 작업 <정육면체를 만드는 방법>2025에도 같은 태도를 적용했어요. 저의 작업 태도에서 파생한 세 캐릭터, 통제적인 ‘룰러>Ruler’, 자유로운 ‘씽커Thinker’, 오류를 상징하는 ‘글리치Glitch’를 부여받은 퍼포머들에게 헌책 더미만을 주고, ‘텍스트를 읽지 말고 물질로 다뤄달라’는 최소한의 지침만 제시했습니다. 사전 구성 없이 이어진 수행 속에서 각자의 방식-책을 찢거나, 세우거나, 밟거나, 눕거나 등-이 형태로 나타났고, 저는 그 형식이 따로 설명을 요구하는 틀이 아니라 작업이 담고 있는 내용으로만 읽히기를 바랐습니다.
‘과정’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는 풀리지 않는 과제예요. 축적된 시간이 너무 길어 한 번에 전달하기 어렵고, 무엇부터 말해야 하는지도 쉽게 정해지지 않았거든요. 저는 미술이 이해보다 감상에 맞닿은 매체라고 봅니다. 관객이 작품 앞에 머무르거나, 전작을 찾아보거나, 텍스트를 참고하는 등의 의지를 가지고 다가와야 만날 수 있는 지점이 있어서죠. 감상은 정답을 요구하지 않고, 각자가 도달한 만큼만 가져갈 수 있도록 허락하는 태도예요. 그럼에도 작업이 완전히 닫힌 채로 남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어디까지가 적절한 설명인지를 가늠하는 시도를 하고 있어요. 《내용없음》에서는 도구 대신 비평가를 작업실로 여러 차례 초대해 관찰하게 했고, 이를 건조하게 기록한 문장을 결과물 옆에 배치했습니다. 이는 관객이 직접 과정을 보지 않더라도 그 시간을 상상할 수 있게 하는 데 의의가 있습니다.
그동안 과정을 먼저 만들고, 결과를 만들어내는 흐름을 반복해왔습니다. 그래서 2024년부터 2025년까지는 자연스럽게 결과 쪽으로 시선이 이동한 시기였어요. 형식이 정말로 내용이 될 수 있는지를 끝까지 확인해보고 싶었습니다. 지금은 다시 새로운 장치와 규칙을 구상하는 단계에 들어와 있기에 관심도 과정 쪽으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전자는 통제적인 룰러의 태도에 닿아 있고, 후자는 유연한 씽커의 시간에 기울어 있습니다. 앞으로도 물리적 형식을 다루는 작업과, 그로부터 파생한 이야기들을 다양한 매체로 풀어내는 작업을 병행하고자 해요.
글 박이현 럭셔리 매거진 피처 디렉터 | 사진 Studio Ken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