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 뭐라 해도 AI 시대다. AI 기술이 발전하고 AI가 10명치 일을 혼자 해치워서가 아니다. 일반 소비자가 하루에도 몇 번씩 AI 서비스에 접속해 과제와 업무를 같이 하고 사주를 보고 상담받고 자신의 일상을 시시콜콜 이야기하는 친구로 삼는 시대가 됐기 때문이다.
AI 대중화의 서막이 올랐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많은 사람이 ‘AI에게 내 자리를 뺏기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을 느낀다. 이 불안감 속에서 인간은 AI가 대체할 수 없는 ‘나만의 일’, ‘나만의 것’, ‘나의 고유성’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인간의 노력은 AI의 노력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작다. AI는 거의 모든 레퍼런스를 검토해 자기 것으로 만든다. 지치지도 않고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반면 한 개인이 참고할 수 있는 레퍼런스에는 한계가 있다. 인간은 나라는 한계 속에서, 나의 경험이라는 한 줌에서, 내 몸뚱이라는 부족함으로, 내가 느낄 수 있는, 내가 생각해낼 수 있는 콩알만 한 내 것을 만들고 있다.
지금의 러닝·마라톤 열풍이 여기에 해당된다. 40대에 마라톤을 시작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 보자. 평생 달려본 적도, 운동을 해 본 적도 없지만 신발을 사고 양말을 사고 운동복을 사서 코칭을 받는다. 처음으로 5킬로미터 마라톤에 도전해서 완주하고 메달을 따고 다음에는 10킬로미터 마라톤에 도전할 꿈을 꾼다. 그러다 무릎이 나가서 병원을 다닐지라도, 그럴지라도 내 몸으로 느끼는 성취감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고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나의 것이 된다. AI가 대신해줄 수 없는 인간의 실체성이다.
인간이 자신의 실체성을 느낄 수 있는 취미와 여가 활동이 주목받고 있다. 자기 손과 발을 움직여 결과를 만들어내는 아날로그 취미, 예컨대 뜨개와 필사가 뜨고, 현장감을 느낄 수 있는 대규모 잔치, 대표적으로 야구장, 축제, 박람회가 부상한다. 인간이 마치 AI에게 “너는 몸이 없지? 나는 몸이 있어 직접 느낄 수 있어”라고 항변하는 듯하다.
AI에 의지하면서도 두려워하고 그러면서도 AI와 다른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고유함에 천착하는 것이 바로 문화의 본질이다. 인간은 부족하지만 나를 뛰어넘는 그 무언가를 만들고자 한다. 문화 향유자도 마찬가지다.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라는 이유가 전부라면 ‘문화’라고 이름 붙인 것을 굳이 찾을 필요가 없다. 지금의 나보다 조금 더 나아지고자 하는, 나아진다 한들 여전히 완벽하지 않지만, 그래도 조금은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문화를 찾게 만든다.
AI 시대, 문화는 오래된 자신의 고유한 속성으로 인간 공동체에 기여한다. 사람들을 한곳으로 모으고, 그곳에서 현장감과 연대감, 몰입감과 카타르시스를 통해 사람들을 위로하고 살아갈 힘을 주는 역할이 어느 때보다 절실히 요구된다. AR과 VR 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인간이 자기 발로 직접 찾아가는 박물관·미술관·극장과 축제 현장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기술 발전이 충분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반가사유상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보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 현장에 가서 현판에 써 있는 것처럼 두루 헤아리며, 깊은 생각에 잠기는 시간을 갖고 싶은 것이다. 공간과 시간은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한계이자 특권이다. 문화는 공간과 시간의 한계 속에 서 있고, 그 한계 때문에 더욱 빛이 난다.
AI의 대중화 서막, 사람들의 불안감과 피로감이 증가하는 동시에 안정감을 찾는 행동 역시 증가하고 있다. AI와 디지털에 자리를 모두 내주지 않으려는 듯 아날로그가 부상하고 있다. 문화는 어느 때보다 인간 공동체에 전할 수 있는 가치가 높다. 문화의 속성인 현장감과 연대감, 몰입감이 인간의 참여를 끌어내고 위로를 선사한다. 문화는 몸을 가진 인간의 실체성을 독려하고 두려움을 덜어줄 수 있다. 그리고 또한 잊지 말아야 할 것! AI의 속도와 용량에 비하면 부족하기 짝이 없는 인간에 의해 문화는 만들어지고, 그러한 인간에게 수용될 때 힘을 얻을 수 있다.
글 박현영 생활변화관측소 소장·대표 | 일러스트 slowrecip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