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을 매체로 조형 작업을 하는 작가 채민정입니다. 유기적인 형태와 겹겹의 색을 통해 내면의 생각과 감정을 시각화하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디자인과에서 공부했지만, 손으로 재료를 다루는 데서 더 큰 즐거움을 느꼈습니다. 그러다 흙이 가진 고유한 느낌이 제 감정과 잘 맞는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이후 자연스럽게 공예의 길로 옮겨갔고, 그때부터 지금의 조형 작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흙을 다루는 과정이 즐거워 작업을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흙을 만지는 그 순간이 단순한 행위를 넘어 제 생각과 감정의 흐름을 만들어가는 과정임을 깨달았습니다. 작업하는 동안 내면에서 일어나는 작은 변화, 생각의 엉킴과 풀림, 감정의 결을 관찰하게 되었고, 그것은 곧 저 자신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 되기도 합니다. 그때부터 제게 작업이란 단순한 결과물이 아닌, 제 존재와 사고를 표현하고 탐구하는 도구가 됐으며, 자연스럽게 자신을 예술가로 생각하게 됐습니다.
제 작업은 내면의 사고와 감정을 유기적 형태로 시각화하는 작업입니다. 주로 점토를 사용해 꼬이고 엉킨 식물 형태를 만들고, 형태의 구조와 색채를 통해 생각과 감정을 표현합니다. 표면에는 여러 겹의 색을 쌓아 생각의 깊이와 움직임을 강조하며, 형태와 색이 상호작용 하도록 구성합니다. 최근에는 이러한 개별 조형을 공간 안에서 서로 연결해 배치하며, ‘정원’처럼 형태와 색, 공간이 어우러지는 설치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복잡한 사고와 감정을 시각적 언어로 풀어내는, 유기적이고 다층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작업하다보면 스스로의 신념이 흔들릴 때가 있어요. ‘이게 맞나?’ 싶은 순간이 분명히 존재하는데, 오히려 그런 시기에 관람객이 제 작업을 보며 진심으로 좋아해주고,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얹어 이야기해줄 때 가장 큰 힘을 얻습니다. 제가 미처 확신하지 못한 지점을 관람객들이 먼저 알아봐주는 그 부분이요. 작업은 결국 혼자 해야 하는 것이지만, 그 의미를 완성해주는 건 관람객이라는 사실을 매번 실감하게 됩니다.
영감은 대부분 제 안에서 비롯합니다. 일상의 생각, 감정의 결, 시간의 흐름 같은 제가 직접 겪는 내면의 변화가 작업의 출발점이 됩니다. 그 출발점을 시작으로 구체적인 드로잉으로 이어지고 형태가 시작됩니다. 형태가 만들어지고 색이 쌓이면서 복잡한 감정과 사고가 시각적으로 표현되는데, 과정 그 자체가 제 내면과 사고를 탐구하는 하나의 사유적 기록이 됩니다. 이렇게 제 작품은 외부 세계가 아닌, 제 내면의 세계를 탐색하고 표현하는 과정에서 완성됩니다.
곧 있을 SPE 전시 《시간쌓기》를 준비하면서 ‘시간이 쌓인다는 건 어떤 경험일까?’를 고민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다른 재료를 다루는 작가와 작업을 공유하고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 많았는데, 서로의 재료를 통해 시간의 결을 비교해보는 일이 저에게 큰 영감을 주었어요. 관람객들께 자신의 ‘시간 쌓임’을 되돌아보고, 그것이 또 다른 이의 시간과 만나 새로운 쌓임을 만든다는 점을 느껴보는 순간이 됐으면 합니다.
신당창작아케이드에서의 일 년은 제게 큰 전환점이었습니다. 작업 환경이 안정되면서 더 깊이 있고, 자신 있게 작업에 몰입할 수 있었고, 동시에 다양한 작가들과의 관계에서 새로운 배움을 얻었습니다. 서로의 방식과 고민을 나누며 ‘작업을 지속한다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던 시간이기도 하고요. 혼자서는 절대 얻을 수 없는 자극과 호흡이 있었습니다. 온전히 작업에 집중할 수 있는 공간도 소중하지만, 이곳은 공간보다 사람이 더 큰 자원이 되는 곳이라는 걸 느꼈어요.
일본 기후현 현대도예미술관에서 본 이토 케이지Keiji Ito의 전시가 인상 깊었습니다. 그는 흙으로 삶과 사회를 향한 시선을 표현하는 작가입니다. 이 전시에서 작가만의 고유한 형태와 침묵이 만들어내는 고요한 전시 공간 속에서, 작가의 삶의 태도와 창작 행위가 일치하는 지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도 그러한 창작과 삶의 태도가 더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 상태에 다가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당창작아케이드 입주 기간 정리한 작업 방향을 기반으로 새로운 시리즈를 이어갈 계획입니다. 현재 탐구하고 있는 ‘생각정원의 구조’를 더 깊게 확장하고자 합니다. 다시 안정적인 작업 환경이 이어진다면 집중도 높은 작업을 보여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무엇보다 지금 만들어 놓은 리듬을 유지하며 작업을 지속하는 것이 가장 큰 목표입니다. 또 앞으로는 기존 작업의 틀을 넘어, 크기와 형태의 다양성을 시도하며 조형 작업을 발전시켜나가고 싶습니다. 거대한 작업을 통해 공간과 상호작용하고, 작은 작업을 통해 섬세한 감정을 드러내며, 재료와 형태의 가능성을 깊이 탐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계획입니다.
정리 나혜린 서울문화재단 홍보마케팅팀
채민정 작가의 작품이 궁금하다면
12월 10일까지 | 서울중앙시장 지하 SASS갤러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