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인 아카이브
정현준
b.1986
연극/연출·연기
@hyunjune.jung
2025 서울연극창작센터 오픈랩씨어터 <멜라닌>
2020 온라인미디어 예술활동 지원사업 ‘ART MUST GO ON’
2018-2020 청년예술지원 서울청년예술단
연극·뮤지컬·창극 그리고 새로운 형식의 공연을 만들어가는 연출가이자 배우·제작자로 활동하는 정현준입니다. 연극 형식을 기반으로 작업해왔지만, 음악·무용·영상·퍼포먼스 등 다양한 예술 언어를 융합하며 공연을 확장하고 있습니다. 이야기와 메시지가 분명하다면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은 자유로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형식이 작품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이 형식을 선택하도록 만드는 작업 방식을 지향합니다.
아내와 함께 2014년에 극단 ‘실한’을 만들었고, 2017년 들어 본격적으로 창작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이때 단원을 모으고, 공연 레퍼토리를 만들고, 지속적으로 작품을 무대에 올리기 시작했거든요. 작품을 만들어가면서 극단의 성격도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 그 시기가 제 삶에서도 큰 변화가 있던 때였습니다. 결혼하고 아이가 태어나면서 분명 행복했지만, 동시에 처음 느껴보는 종류의 외로움과 고립감과 같은 감정이 찾아왔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있어도 외로울 수 있구나’, ‘소외감은 거창한 단어가 아니구나, 일상의 아주 작은 순간에도 찾아오는 감정이구나’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극단 실한의 첫 기조를 이렇게 잡았습니다. “사회 속에서 소외되는 사람들의 이야기, 혹은 소외감을 느끼는 순간을 다루자”고요. 그리고 그 질문을 무대에서 풀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창작 활동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2014년 CJ크리에이티브마인즈 선정작인 연극 <아폴로 프로젝트>에 배우로 참여했을 때, 처음으로 ‘내가 하는 이 작업이 예술로 불릴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품에서 저는 경상도 소년 역할을 맡았습니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경상도 소년 세 명과 전라도에서 잠시 이사 온 한 소녀가 친구가 되지만, 지역감정과 편견 속에서 소녀는 결국 다시 광주로 돌아가게 됩니다. 세 소년은 친구를 찾아 광주로 달려가지만, 그때 마주한 도시는 5.18 민주화운동의 한가운데에 있었습니다. 소년들은 혼란 속에서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나는 친구를 만나러 온 것뿐인데, 왜 눈앞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왜 사람들은 이렇게 울고, 외치고, 싸우고, 죽어가고 있을까?” 공연을 마쳤을 때, 저는 무대에서 이전과는 다른 감각을 느꼈습니다. 그전까지 박수는 ‘오늘도 잘 해냈다’는 확인처럼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그날 받은 박수는 개인을 향한 박수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작품이 품은 질문과 감정, 그리고 그 시대를 살아낸 사람들을 향한 박수처럼 느껴진 것이죠. 관객과 작품과 세상의 어느 한 연결고리의 이음새를 맡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이런 게 예술 아닐까?’ 하는 고민이 시작됐고요.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1인극 <Mad베젠꼬>(2021)
2022년 대한민국 신진연출가전 경연작 <파경>과 오는 11월 서울연극창작센터에서 공연할 <멜라닌>을 대표작으로 삼고 싶습니다. 연출가로서 첫 작품인 <파경>은 전쟁 속에서 살아가는 한 여성 ‘숙희’의 시선을 따라가는 이야기로, 국가적 폭력이라는 거대한 현실 앞에서 개인이 겪는 내면의 전쟁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작품을 만들며 저는 제 한계를 정면으로 마주해야 했습니다. 협업 과정에서 드러나는 어려움, 선택의 결과가 가져오는 책임, 끝내 조율되지 않는 마음의 문제들. 그 안에서 제가 잃은 것도 많았지만, 그만큼 배운 것도 명확했습니다. 그래서 <파경>은 결과물 이상의 의미를 남겼습니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 그리고 연출을 계속해야 할 이유를 분명하게 만들어 준 작품입니다.
<멜라닌>은 제29회 한겨레문학상을 받은 하승민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국인 아버지와 베트남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파란 피부를 가진 ‘재일’을 중심으로 타자화, 차별, 내면화된 감정을 다루는 연극입니다. 저는 이 작품을 통해 설명보다는 감각을, 사건보다는 관계에 중심을 두고, 해답보다는 질문을 남기는 공연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연출 방식 역시 음악·공간·배우의 움직임·색채 등 무대 언어를 확장해 감정의 층위를 시청각적으로 구현하고자 실험하고 있습니다. <멜라닌>은 리얼리즘과 추상성을 결합한 작업이며, 관객이 인물의 삶을 이해하려 하기보다 곁에 서서 함께 감각하도록 초대하는 공연입니다. <파경>이 과거의 저를 돌아보게 한 작업이라면, <멜라닌>은 앞으로의 작업 방향을 더 분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공동창작 방식과 융합적 무대 언어를 실험하면서 공연이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감정의 공간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습니다.
저는 사회 전반에 드러나는 인간의 집단 움직임에서 영감받습니다. 쉽게 말하면 ‘사람들은 지금 무엇에 열광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단순히 유행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왜 사람들이 그 현상에 주목하고 참여하는지, 그 안에서 어떤 욕망과 감정 구조가 작동하는지 탐구합니다. 최근 제가 흥미롭게 관찰하는 현상은 ‘달리기’ 열풍입니다. 사람들이 달리는 이유는 다양합니다. 하지만 서로 다른 이유가 하나의 거대한 흐름으로 모이는 과정이 흥미로웠고, 저는 거기에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열풍은 언제, 어떤 이유로 식게 될까? 그 이후에는 무엇이 사람들을 움직이게 될까?’ 하고 말이죠. 그리고 저도 직접 달려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회적 현상을 관찰하고 그 이면을 질문하는 일, 그리고 직접 몸으로 부딪히며 인간 내면의 감정 구조를 탐구하는 일. 저는 이 두 가지가 예술가에게 꼭 필요한 감각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상을 통해 인간을 이해하고, 그 이해를 자신만의 언어로 설득하는 일이 예술 창작의 영역이라 생각합니다.
넷플릭스에서 방영 중인 영국 드라마 <소년의 시간>을 인상 깊게 봤습니다. 현실의 무게를 정면으로 견디는 작품으로, 원테이크 방식과 인물의 심리 묘사, 서사의 밀도가 매우 뛰어나 많은 자극을 받았습니다. 특히 등장인물이 매우 섬세하고 입체적으로 표현돼, 단역마저 서사의 질감을 풍부하게 채워주는 연기 설계 방식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사건이 아니라 사람을 중심에 두는 연출이 무엇인지 다시 돌아보게 한 작품입니다.
저는 그동안 소외와 결핍과 같은 감정에 관심을 두고 공연을 만들어왔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보면, 여럿이 함께 살고 있지만, 서로를 돌보지 못한 채 외롭게 밀려나는 마음들이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말은 넘치지만 진심 어린 이해는 부족하고, 연결돼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서로를 밀어내는 모습도 자주 마주하게 됩니다. 이런 현실을 보며 자연스럽게 질문하게 됩니다. ‘예술이 이런 마음을 그대로 방치해도 괜찮을까?’ 그래서 요즘 저는 공연을 통해 소외를 넘어선, 서로가 회복하는 시간을 갖게 하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공연에도 위트와 여백, 사람을 숨 쉬게 하는 온기가 필요하다고 믿습니다.
정리 나혜린 서울문화재단 홍보마케팅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