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 메뉴로 바로가기 본문으로 바로가기
서울문화재단

문화+서울 seoul foundation for arts and culture

검색 창
  • 인스타그램

서울시 동대문구 청계천로 517

Tel 02-3290-7000

Fax 02-6008-7347

문화+서울

  • 지난호 보기
  • 검색창 열기
  • 메뉴 열기

ASSOCIATED

11월호

류세일, 배우는 천생 직업

“이상하다. 이상하다.”

연극제작집단 ‘공놀이클럽’의 유일한 배우 류세일은 연출가 겸 극작가 강훈구를 비롯한 극단 식구들과 최근 이 같은 말을 끊임없이 되뇌는 중이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좋아해주시는 분들이 많아서 서로 ‘전조가 이상하다. 망할 것 같다.
왜 우리 걸 다 좋아하지?’ 하는 얘기를 주고받았어요. 저희는 그동안 해오던 대로 하고 있거든요. 저희가 생각하는 좋은 연극을 하고 싶다는 생각도 여전하고요.”

공놀이클럽의 취향이 관객의 선호와 맞물린 대표적 작품이 <말린 고추와 복숭아향 립스틱>이다. 이 작품은 올해 제3회 서울예술상 심사위원 특별상 작품 부문, 제61회 백상예술대상 젊은연극상을 받았다.

서동민 작가의 데뷔작인 <말린 고추와 복숭아향 립스틱>은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한국 서민 가정이 장남의 퀴어 정체성과 직면하면서 균열되고 갈라지는 과정을 그린다. 우연이 아닌 필연으로 새끼줄을 꼰 작가의 필력도 대단하다. 류세일과 강훈구 연출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공놀이클럽은 여기에 전복과 유희성을 더해 재기 발랄한 리듬감을 부여하며 고유성을 획득했다. 트랜스젠더인 오빠 규빈, 집을 먼저 떠나려는 자신의 계획이 어긋날까 전전긍긍하며 오빠의 커밍아웃을 막으려는 동생 은빈, 그리고 보수적인 할머니와 엄마까지 네 캐릭터를 네 배우가 고정으로 맡지 않고 돌아가며 연기하는 메타성은 답이 아닌 질문을 만들어내며 서사를 풍성하게 빚어낸다.

2024년 8월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에서 초연하기 전까지 고민이 많았던 작품이다. 개막 직전에 역할을 돌아가면서 맡는 것으로 방식을 바꾸면서, 첫 공연 3일 전까지 대본을 외우지도 못했다. 과감하게 파격적인 설정을 만들긴 했지만, 정작 자신들도 공연 직전까지 ‘서사가 읽힐까’ 하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런데 기우였다. 개막 이후 객석에서 나온 반응 중 가장 많은 내용은 “이야기에 너무 공감했다”였다.

어른들이 하는 공놀이, 연극

극의 화룡점정은 류세일이 찍는다. 할머니 역을 맡아 남아 선호 사상을 설파하던 그는 막바지, 가족 앞에서 여성의 옷을 입고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류세일은 “기술적으로 변주를 줘야겠다는 생각은 안 했다”고 한다. 실제로 극 중 선보인 할머니 연기 톤은 자신의 조모에게서 많이 따왔다. 할머니와 같이 오래 살았기 때문에 자연스러웠다고. 듣고 자란 말에서 따온 애드리브가 대본화된 것도 많다. “제가 할머니가 아니라는 건 관객분들이 다 아는 사실이니, 메소드로 연기해서 할머니처럼 보여야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오히려 자유롭고 재미있게 연기하고자 했습니다.”

유희적이지만 가볍지는 않은 게 공놀이클럽의 특장점이다. 위트와 리듬감 사이에서 사회적으로 톺아봐야 할 지점들이 불쑥불쑥 떠오른다. 무엇보다 분명한 건 분명한 대로, 분명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지 않은 대로 그 불가피성을 설득하는 것이 좋은 연극의 특징 중 하나 아닌가. 함부로 가치 판단하는 데 우선순위를 두지 않은 공놀이클럽의 작법과 화법은, <말린 고추와 복숭아향 립스틱>처럼 관객이 직접 질문하고 답하게 만든다.

“저희는 분명 진지한 구석이 있고 철학적으로 생각하는 부분도 많지만, 재미 역시 정말 중요한 사람들이거든요. 평상시의 가치관과 성향이 작업 과정에서 물리적으로 옮겨지면서 억지로 떨어지기란 어렵죠.”

규빈을 해석하는 과정에선 캐릭터를 성소수자로 한정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규빈처럼 우리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모두 어떻게든 더 잘 살고 싶어 하잖아요. 그러니까 규빈이처럼 ‘내 식대로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은 다들 갖고 있는 거죠. 그래서 다른 인물과 차별점을 두지 않았습니다.”

혹자는 연극이 마이너한 장르라 성소수자 얘기를 더 잘 다룬다고 판단한다. 비슷한 성격의 도구라 그 발화의 힘이 더 강력해진다는 것이다. 세상엔 함부로 판단할 수 없는 불가피함이 있는데, 그럼에도 그 맥락에 놓인 진실을 보존하는 최후의 보루 역할을 연극이 할 수 있다고 믿는 이들도 상당수다.

류세일은 하지만 “연극이 좋아서 연극을 할 뿐이고, 현재 제 표현의 수단이나 방법일 뿐이지 ‘마이너리티를 대표해서 분투하겠다’는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공놀이클럽은 연극계 조기축구회 모임이 아니냐는 오해도 종종 받는다. 강훈구 연출은 회장, 류세일 배우는 전무이사를 맡고 있어 생각보다 큰 조직이 아니냐는 물음도 나온다. 두 사람이 모든 걸 다하니 이것 역시 유희적 표현이다. 두 사람은 2017년 한 행사에서 처음 만났다. 호흡과 성향이 잘 맞는다는 걸 깨달았고, 2018년 서촌공간 서로에서 <소년소녀 진화론>을 올린 뒤 다른 제작진들과 도원결의 식으로 극단을 만들었다.

극단 이름은 “공놀이에는 무엇이 필요한가, 왜 필요한가”로 끝나는 이근화 시인의 시 ‘공놀이’에서 따왔다. 강훈구 연출은 “연극은 ‘어른들이 하는 공놀이’ 같다”고 말해왔다. 류세일은 “연극은 시간, 사람, 마음 등 필요한 것들이 매우 많은데, 그것과 공놀이랑 비슷하다고 강 연출이 얘기하더라고요”라고 특기했다. 즉 사회의 작은 압축판이 공놀이이자 연극인 셈이다.

그동안 <폰팔이>2019, <망할극장>2020, <마더퍼커 오이디푸스>2021, <로켓 캔디>2022 등을 선보인 공놀이클럽에게 또 다른 전환점을 만들어준 연극은 <이상한어린이연극-오감도>다. 지난해 말 제61회 동아연극상에서 새개념연극상을 받은 이 작품은, 어린이극으로는 이례적으로 시인 이상의 대표작 ‘오감도’를 재해석했다. 아동극에 대한 편견을 깨뜨렸다는 호평을 들었다. 류세일은 사실 이 작품을 올리기 전 강훈구 연출에 “쉬고 싶다”는 얘기를 했다고 털어놨다. 이전까지 작품에 연달아 출연하다 보니 당시엔 역할을 맡고 싶지 않았다는 게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대신 류세일은 연극에 참여하는 아이들의 보모 역할을 자청했다. “다른 작품에서는 배우로서 연기적 고민을 더 많이 했다면, <오감도>에선 극단 구성원으로서 더 고민했다.” 그렇게 연기의 구심력은 단단히 하고, 극단의 원심력은 넓혔다.

연극의 ‘위대한 장점’

사실 10대 때만 해도 류세일은 연기에 관심이 없었다. 뮤지션이 되고 싶어서 밴드부에서 기타를 잡았다. 하지만 성인이 된 이후엔 현실을 생각해야 했다. 일본 취업까지도 알아보던 그는 한동안 방황하기도 했다. 그러다 영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One Flew Over The Cuckoo’s Nest>1975(감독 밀로시 포만Miloš Forman)에서 잭 니컬슨Jack Nicholson이 맡은 랜들 맥 머피가 류세일의 인생을 뒤흔들어 놨다.

극 중 맥 머피는 형무소의 강제 노동을 피하기 위해 정신병자로 위장해 정신병원에 들어간다. 하지만 터무니없는 병원의 권위와 광기를 접한 뒤 그는 도전적으로 반항하기 시작한다. “당시 억압된 상황 속에서도 주눅들지 않고 주체적으로 움직이고 행동하던 맥 머피에 쾌감을 느꼈어요. 그때 저는 그러지 못했거든요. 동시에 ‘연기를 하면 나도 저런 사람이 돼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번쩍 떠올랐죠.”

이후 연기학원에 등록한 류세일은 하지만 ‘연기가 운명이 아닌가 보다’ 생각하며 궁지에 몰린다. 원하는 대학의 입학시험에 거듭 떨어져 결국 군대에 가게 된 것이다. 전역을 하고 한 대학의 뮤지컬과에 들어갔지만 그곳 시스템과 맞지 않았다. 결국 자퇴하고 한량처럼 살아가던 어느 날, 알고 지내던 형의 전화 한 통이 구원의 신호가 됐다. 객원 배우로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생들과 작업할 기회가 생긴 것. 이후 연극인들로부터 믿음을 얻게 된 류세일은 거듭 러브콜을 받았고, 서울프린지페스티벌, 거리예술마켓, 안산국제거리극축제 등에 연달아 함께하면서 차차 이름을 알리게 됐다.

그렇게 배우가 천생 직업임을 깨달았다. “배우는 저라는 인간이랑 잘 맞아요. 수행해야 하는 것들, 해야 하는 것들이 많은데, 저는 그래야 하거든요. 또 매력적인 사람이 돼야 하니까, 절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 같기도 하죠. 연기를 하지 않았으면, 지금보다 훨씬 더 후진 인간으로 살지 않았을까요.”

그 가운데 연극은 빼놓을 수 없는 작업이 됐다. 극단 치악무대의 연극 <XXL레오타드 안나수이 손거울> 같은 좋은 작품도 연달아 만났다. 물론 뮤지컬 <앨리스 스튜디오>, 영화 <이어지는 땅> 같은 연극 외의 작업도 했다. 간혹 어떤 이들은 연극을 자신의 연기 인생에서 거쳐 가야 할 단계로 여기기도 하지만, 류세일에게 이 장르는 지금도 앞으로도 중심이다.

“전 연극이 마이너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히려 ‘위대한 장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연극, 연기를 제대로 배우고 시작한 사람이 아니잖아요. 좋아서, 잘하고 싶고, 잘해보려고 한 건데 한 관객분이 저희 연극을 보시고 ‘좋은 문학을 하나 읽고 가는 거 같다’는 말씀을 해주셨을 때 머리가 띵하더라고요. 좋아서 한 것일 뿐인데 어떤 사람에게 영향을 줄 수도 있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 하게 된 거예요. 이후에 연극을 더 귀하게 여기게 됐어요.”

공놀이클럽 <말린 고추와 복숭아향 립스틱> ⓒ이지웅

영화로 연기의 맛을 처음 느낀 그인데, 오히려 지금은 연극 작업을 주력으로 삼고 있다. 류세일은 ‘연극의 가장 큰 매력은 에너지’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보통 연극 작업을 하면, 평균적으로 두 달 정도 프로덕션 사람들과 같이 해요. 그 기간 매일 만나 작품, 인물에 대해 얘기하고 방향성을 논의하면서 응축시킨 에너지를, 몇 주의 시간 동안 한마음으로 ‘빵’ 터트리는 건 대단한 매력이 있죠. 영화는 연극에 비해 호흡이 좀 긴 편이죠. 즉 영화가 마라톤 같다면, 연극은 단거리 달리기처럼 심장이 터지는 느낌이에요. 진짜 ‘팍’ 하고 뛰는 것 같은…….”

류세일은 점차 활동 반경을 넓히고 있다. 최근 개봉한 조희영 감독의 영화 <다른 것으로 알려질 뿐이지>에 출연했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여는 낭독공연 ‘봄 작가, 겨울 무대’의 하나로 11월 공연하는 김다솔 작가의 <참외가 데굴데굴 굴러가면>에도 출연한다.

배우로서도 점점 인정받고, 극단도 자리를 잡아가는 중이니 이런 주목도가 부담스럽지는 않을까. 류세일과 강훈구 연출이 변하지 않아도, 이들을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은 변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류세일은 전혀 흔들림이 없다.

“전 늘 ‘안 돼’라는 말을 듣고 살았어요. 거기에 대한 반감이 커요. 저희가 상을 받고 싶어 했던 건 아니었어요. 다만 이방인처럼 살아왔는데, 상을 받는 순간 뭔가 제도권 안에 포함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잇따라 상을 받은 것이 더 기뻤어요.”

동시에 상을 받는다는 건 안팎으로 냉정한 시각을 견뎌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고 수용했다. “상 받은 것에 연연하지 않고 앞으로도 저희의 감각대로 저희가 하고 싶은 거 재미있게 하면서 관객들과 만났으면 좋겠어요. 작품을 우선해야 하지, 시선이나 명예가 먼저 부담감으로 다가오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럼에도 저희가 망할 수 있는 순간이 올 수 있거든요. 늘 잘할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저도 극단도 망하는 것이 두렵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정말 연극을 즐기는 사람이 되고 싶거든요.”

이재훈 뉴시스 기자 | 사진 STUDIO OFF-BEAT

위로 가기

문화+서울

서울시 동대문구 청계천로 517
Tel 02-3290-7000
Fax 02-6008-73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