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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호

축제를 새로 정의할 수 있다면,
에든버러 페스티벌

중세 고딕 건물의 축축한 진회색 외벽 위로 손바닥만 한 크기의 전단이 덕지덕지 붙어 있다. 좁고 굽이진 에든버러의 골목을 오르내리면서 도시 곳곳에서 일순간 태어났다가 사라지는 극장들을 찾아 분주하게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의 뒷모습은 순례자처럼도 보인다. 소란한 거리를 메운 인파, 광장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악기를 꺼내 드는 연주자들, 자리를 구할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박스오피스 앞으로 몰려드는 들뜬 낯의 관객들. 여름의 에든버러가 자랑하는 여느 광경이다.

매해 4백만 명 넘는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이 도시에서는 공연예술을 중심으로 하는 축제뿐 아니라 시각예술 축제·도서 축제·영화 축제, 대규모의 군악대 행사가 8월 한 달간 계속된다. 이 들썩이는 여름의 출발은 에든버러 페스티벌Edinburgh International Festival, EIF로, 올해는 ‘우리가 찾는 진실The Truth We Seek’이라는 주제 아래 손꼽힌 공연들을 선보였다. 한편 공인된 주류의 바깥, 이른바 ‘변방’에서부터만 길어낼 수 있는 이야기들을 탐색하는 에든버러 프린지Edinburgh Festival Fringe에서는 하나의 테마로 엮인 선정작을 소개하는 국제 축제와 달리 거리극과 스탠드업 코미디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장르를 기꺼이 포괄한다.

올해 에든버러의 공연을 가로지르는 주목할 만한 흐름이 있다면, 2023년 10월 이후로 걷잡을 수 없이 가속화된 이스라엘 정부의 팔레스타인인 집단 학살에 규탄의 목소리를 높이려는 연극적 실천들일 것이다. 극장에서 무엇보다 극장 바깥을 상상해야 할 필요성을, 또 연극이라는 공동의 시공간을 연대의 기회로 전환할 가능성을 논의하기 위해 분투하는 에든버러의 오늘을 살펴보자.

고딕 건물이 눈에 띄는 축제 기간 에든버러의 풍경

축제, 너무도 정치적인

축제의 시작을 앞둔 7월 말, 두 편의 프린지 공연이 연달아 취소되는 일이 있었다. 레이철 크리거Rachel Creeger와 필립 사이먼Philip Simon은 모두 유대계 코미디언으로, 영국에 거주하는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을 말하는 1인극을 선보일 예정이었다. 극장 측에서는 이들의 종교·문화적 정체성은 결코 공연 취소의 사유가 아니며, 두 사람이 그간 밝혀온 의견에 따른 결정이라고 설명했다. “팔레스타인에서 계속되는 인도주의적 위기를 다루는 공연자들의 견해가 이스라엘 현 정부의 정책과 활동에 대한 우리 극장의 입장과는 대단히 충돌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에 크리거와 사이먼은 자신들의 공연이 ‘정치와는 무관하다’는 점을 들어 유감을 표하고, 공연 취소가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영국의 반유대주의 흐름을 보여준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에든버러 페스티벌이 ‘정치적’이지 않은 적은 없었다. 2012년에는 이스라엘 정부가 후원한 바체바 댄스 컴퍼니의 공연을 반대하는 시위대가 극장으로 들이닥치는 일이 있었고, 올해도 스코틀랜드의 총리 존 스위니John Swinney가 참석하는 공연에 군사기업 지원을 규탄하는 활동가들이 기습적으로 입장하기도 했다.

8월 14일부터 17일까지 공연된 <커팅 더 타이트로프>의 한 장면

더 나은 미래를 기대하며

작년 런던에서의 초연을 거쳐 올해 페스티벌에 초청된 연극 <커팅 더 타이트로프Cutting the Tightrope>(연출 크레시다 브라운Cressida Brown·커스티 휴즐리Kirsty Housley)는 가자 지구 집단학살에 대한 예술가의 입장 표명을 구조적으로 검열하는 영국 정부의 문화 정책, 나아가 연극계를 비롯한 영국 사회 곳곳에 여전한 인종주의·제국주의적 태도를 직접적 논의의 주제로 삼는다. 전쟁범죄를 경험한 극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를 ‘민감한 주제’라며 거절하는 예술감독, 팔레스타인 국기를 상징하는 수박이 무대 위에 오르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극장 관계자와 같은 인물들을 그리는 짧은 희곡이 이어지는 가운데, 무대 뒤편으로는 영국 정부 기관들이 시행한 크고 작은 검열의 증거와 영국의 원조로 이스라엘 군대가 벌이는 폭격과 살해를 상징하는 숫자가 영사된다. 연극은 오늘날 영국 사회가 동조하고, 공모하며, 조장하는 폭력과 검열, 정치적 무관심과 제노포비아의 현실을 논하는 자리로 관객들을 깊숙이 초청한다.

한편, 올해 처음으로 발족한 단체 ‘웰컴 투 더 프린지, 팔레스타인Welcome to the Fringe, Palestine’에서는 스코틀랜드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예술인이 팔레스타인인 예술가들을 에든버러 프린지로 초대하고, 그들 고유의 역사와 이야기를 청해 듣는 시간을 마련했다. 이스라엘군과 정착민의 폭력적 추방이 벌어지기 전 서안지구가 간직한 풍경을 회상하는 1인극, 1948년 나크바의 참혹한 광경을 담은 인형극, 팔레스타인계 극작가 달리아 타하Dalia Taha의 신작 ‘망고가 먹고 싶어서Craving Mangoes’에서부터 팔레스타인 민중가요 디제잉과 아랍어 힙합 공연, 민속춤 답케Dabke를 나눠 추는 워크숍까지 형식과 장르를 막론하는 공연 20편이 나흘간 무대에 올랐다. 이로써 에든버러 페스티벌을 공동의 시간으로 점유하기를 기꺼이 요청한 것이다.

에든버러를 기반으로 한 스코틀랜드의 지역 극장이 마련한 연대의 장도 눈에 띄었다. 트래버스 극장Traverse Theatre에서는 배우이자 활동가인 칼리드 압달라Khalid Abdalla의 1인극 <노웨어Nowhere>를 선보였다. 이집트인 부모님을 따라 미국으로, 스코틀랜드로, 아일랜드로, 런던과 카이로로 옮겨 다니며 다중의 정체성을 입게 된 압달라는 서구 제국의 시선으로 그려진 아프리카 국경을 넘나들며 벌어진 고통의 역사를 자신의 삶 속에서, 그리고 가자의 해변에 늘어진 피해자들의 시신에서 발견한다.

한편 서머홀Summerhall에서 선보인 <밸푸어 레퍼레이션Balfour Reparations>은 1917년 스코틀랜드의 아서 제임스 경이 실시한 밸푸어 선언의 시오니즘적 정책이 팔레스타인인 집단 학살에 미친 영향을 되돌아보고, 2025년 정부에서 보상을 제공하기로 약속했다는 가상의 미래를 그린다. 보상위원회의 일원으로 초청된 관객들은 팔레스타인 출신의 무용가가 객석으로 건네는 마이크를 직접 받아 들고 영국이 실천할 수 있는 다방면의 보상과 반성을, 그로써 견인할 더 나은 미래를 구체적인 언어로 상상하고 서로에게 공유하면서 시민의 책임을 나눠 갖게 된다.

그러니 지금 에든버러에서는 평화 없이는 정의도 없다는 긴급하고 중대한 요청이, 무엇보다도 극장에서부터 확인되고 있다. 우리가 딛고 선 세계를 비추고 연대를 길어오는 시공간, 올해 에든버러의 무대가 정의하는 축제의 마땅한 의미다.

김현지 드라마터그 | 사진 Edinburgh International Festiv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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