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연극 <엔드 월-저 벽 너머에는 뭐가 있을까?>
ⓒ대학로극장 쿼드·이강물
2,080명-2,223명-2,016명-2,098명. 2021년부터 2024년까지 산업재해로 사망한 연간 노동자 수다. 매년 2천 명이 넘는 사람이 일을 하다가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2025년 1분기, 고용노동부 통계에 따르면 542명이 노동 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8% 증가한 수치다. 아직 통계가 집계되지 않은 2025년 2~3분기에도 산재 사망사고는 연일 이어지고 있음을 우리는 그간의 뉴스를 통해 익히 알고 있다. 뉴스 보도 한 줄, 혹은 정부의 통계 수치로 표현되는 이들의 죽음은 우리에게 그저 타인의 일이자 무미건조한 숫자로 곧잘 다가오곤 한다. 그러나 그 숫자 뒤에는 세상에 단 한 명뿐이었던 사람의 이름이 있고, 그의 희로애락과 삶이 있으며, 그와의 이별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가족과 친구들이 있다.
2021년 4월 22일 평택항에서 23세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다. 개방형 컨테이너에서 화물 고정용 나뭇조각을 제거하는 작업을 하던 중, 지게차가 컨테이너의 왼쪽 끝 벽을 접으면서 발생한 충격으로 오른쪽 끝 벽이 갑자기 쓰러지면서 그 밑에 깔려 세상을 떠났다.
이 노동자의 이름은 이선호. 그가 당초 맡은 업무는 평택항의 동식물 검역 업무였지만, 그날 갑작스레 개방형 컨테이너에서 나뭇조각을 제거하는 업무를 지시받았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업무에 대한 작업 설명, 안전 교육은 물론 안전모 같은 기본 장비조차 지급받지 못한 채 위험천만한 현장에 무방비로 투입됐다. 이런 노동 현장에서 안전관리자 배치를 비롯한 온갖 관련 법규가 지켜질 리 없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실제 사건을 모티프로 하는 연극 <엔드 월End Wall-저 벽 너머에는 뭐가 있을까?>는 냉정한 보도 기사와 정부 통계표의 숫자 뒤 존재하는 ‘한 사람’에게 시선을 맞추고 그의 삶과 꿈을 따라간다. 9월 10일부터 28일까지 대학로극장 쿼드에서 초연되는 연극 <엔드 월>을 소개한다.
ⓒ대학로극장 쿼드·이강물
2021년 평택항, 그리고 2025년 여기
‘엔드 월End Wall’은 우리말로 ‘끝 벽’이다. 여섯 면이 모두 벽으로 막힌 표준형 컨테이너에 들어가지 않는 대형 화물을 운송할 목적으로 윗부분(지붕)과 정면, 후면의 벽이 뚫린 개방형 구조로 만들어진 특수 컨테이너를 개방형 컨테이너 혹은 FR 컨테이너Flat Rack Container라고 한다. 그리고 이 개방형 컨테이너의 오른쪽·왼쪽에 붙어 있는 벽을 끝 벽이라고 부른다. 양쪽 끝 벽을 바닥 쪽으로 접어 내리면 납작해지기 때문에 위로 높게 쌓아 효율적으로 보관할 수 있어 항만 곳곳에 아주 높이 쌓여 있다. 이 컨테이너들이 가로막고 있어 노동자들은 항만에서 바다를 만나기 어렵다. 컨테이너 1개의 무게는 규격별로 약 3톤에서 6톤, 끝 벽 1개의 무게는 무려 300킬로그램에 달한다.
연극은 ‘아성’이라는 이름의 23세 일용직 노동자가 300킬로그램 무게의 왼쪽 끝 벽에 깔려 숨이 멎으면서 시작된다.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자리에서 시간이 멈춘 아성은 자신이 왜 죽었는지 천천히 묻기 시작한다. 그리고 답을 찾아 기억을 반추하던 그 앞에, 숨이 멎은 뒤에야 죽음의 이유를 찾게 된 또 다른 청년 노동자 ‘무명無名’이 나타난다. 1분 전, 10분 전, 16분 전. 아성과 무명은 시간을 거슬러 오늘 하루 일어난 일을 되짚으며, 아성이 죽은 이유와 더불어 노동의 시간 속에 가려져 미처 깨닫지 못했던 각자의 꿈과 마주하게 된다.
실제로 발생한 산업재해 사망 사고를 다루는 연극 <엔드 월>이 가진 특별한 점은, 비극적 사건의 경위를 파헤치거나 재연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삶과 죽음, 노동과 꿈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시詩적인 시선으로 관조하는 데 있다. 당연히 있어야 할 것들이 없어져버린 자리, 인간이 보편적으로 가져야 할 가치가 사라져버린 ‘빈자리’가 시의 은유로 표현되며, 우리가 가지고 있어야 함에도 잃어버린 것들은 무엇인지를 스스로 질문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소재에 접근하는 태도의 고유함, 품위 있는 언어, 세련된 극 구성과 인물 배치, 디테일을 조화롭게 갖춘 수작”이라는 호평을 받으며 158 대 1의 높은 경쟁률을 뚫고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제2회 서울희곡상을 거머쥔 이 작품은, 작가이자 연출가인 하수민이 직접 쓰고 연출해 완성도를 높이고 의미와 메시지를 확장했다.
건축과 무대미술을 전공해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미술팀장, <알포인트> 미술감독 경력이 있는 하수민 작·연출가의 탁월한 공간 연출은 관객이 그의 작품을 기대하는 요소 중 하나일 것이다. <엔드 월>의 공간은 노동·신체의 공간과 사유의 공간, 두 가지로 나뉜다. 관객은 극장에 들어서자마자 무대 위에 놓인 거대한 개방형 컨테이너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이 장치는 인물의 존재 방식과 공간 사이의 상징적 긴장을 시각적으로 구현한다. 또한 노동과 신체의 공간인 항만을 채우는 굉음, 그리고 숨이 멎은 두 인물인 아성과 무명이 존재하는 사유의 공간을 채우는 정적靜寂을 극적으로 대비시키며 무대에 더욱 몰입하게 만든다. 인간의 신체에 집중해 등장인물에 생생한 움직임을 부여하고, 형식적 측면에서도 작품의 시적인 감각을 느낄 수 있다. <엔드 월>에는 무대 디자이너 남경식, 조명 디자이너 최보윤, 음악·음향 디자이너 지미 세르, 안무가 이세승이 참여하며, 마광현·홍철희·손성호·장재호·김영선·심민섭·황규환·이창현·이경우·엄태호·윤희지 등 배우 11명이 출연한다.
ⓒ무대디자이너 남경식
노동자의 안전을 위해 지켜야만 하는 법은 많지만, 자본은 그 법을 요리조리 피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산업재해 사고의 원인을 알아가다보면 단순히 안전 불감증이라고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우리가 미처 인지하지 못하지만 사회를 폭넓게 장악하고 있는 병폐를 발견하게 된다. 사람의 목숨을 돈보다 하찮게 여기는 사고방식. 우리 사회는 당연히 가져야 할 가치를 언제부터 잃어버리게 됐을까.
다시 찾을 수 있을까. 한 사람의 죽음은 이렇게 사회 전체가 응답해야 하는 질문이 되고, <엔드 월>은 그 질문을 고요하지만 날카롭게, 시적이지만 분명하게 던진다. 작품의 부제인 ‘저 벽 너머에는 뭐가 있을까?’ 역시 결국은 작품이 우리에게 건네는 질문이다. 저 너머를 보지 못하게 만드는 우리 각자의 ‘벽’은 무엇이고, 우리는 그 벽 너머에 무엇이 있기를 바라고 있을까.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재하기 위해 지녀야 할 어떤 가치를 우리는 잊은 채 지내고 있을까. 올 9월, 관객은 무대 위에서 아성의 죽음을 마주한 후 계속해서 이 질문들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막을 수 있었던 수많은 참사를 겪어내며 우리에게는 아로새겨진 감각이 있다. 우리는 다행히 살아남아 있을 뿐이라는 것.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무미건조한 숫자 뒤에 실재했던 사람들을 연극을 통해 기억하고 연대하는 일에 동참해주시기를, 그리고 극장을 떠난 뒤에도 오래도록 질문하고 답을 찾아 주시기를 바라며 마지막으로 작·연출가 하수민이 관객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붙인다.
“저는 이 연극을 ‘땀나는 시詩’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땀이 난다는 것, 삶을 살아낸다는 것이 얼마나 멋진 시가 될 수 있는지 같이 경험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엔드 월>의 마지막 장면처럼, 벽 너머에서는 우리가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저는 연극하는 행위를 통해 관객과 함께한다고 생각합니다. <엔드 월>에서 함께함이란, 동시대의 사건을 함께 기억하고 이를 통해 질문하는 것입니다. 이 기억과 질문이 다가올 미래를 새롭게 상상하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글 최영한 서울문화재단 공연기획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