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문화정책 20년,
세계의 문화수도를 꿈꾸다
개구리는 올챙이 시절을 잊어야 한다
숙명여대 대강당은 연면적 3,754m2, 좌석 1,500석으로 한때 서울시 공연장 통계에서 늘 앞서던 시설이었다. 2001년 서울연구원에 입사할 당시 서울시 공연장 중 1천 석 이상 객석을 갖춘 공연장은 10곳,
그중 3개소는 대학에 있던 공연장이었다. 그러던 이 공연장이 2010년 태풍 ‘곤파스’로 천장이 파손되는 피해를 보고 철거됐다. 주요한 공연장이 사라진 것이다. 그러나 걱정하지 않았다. 그사이 공연장은 크게 늘어
2001년 10개에 불과하던 1천석 이상 공연장은 2024년 무려 34개로 늘었다. 3배 넘게 증가한 것이다.
지방자치가 실시되고 서울시가 자체적으로 문화정책을 실행한 지 30년, 서울의 문화환경은 많이 변했다. 대학 공연장에 의존하며 겨우 유지하던 시절에서 수많은 공공과 민간 공연장이 건립돼 다양한 콘텐츠를 쏟아내고 있다.
그뿐 아니다. 미술관을 포함한 전시 시설도 크게 늘어 2024년 현재 서울시에는 총 710개의 시설이 존재한다.
2001년 305개의 전시 시설이 있던 것을 감안하면, 말 그대로 상전벽해桑田碧海가 아닐 수 없다.
세상은 가끔 겸손의 말로 ‘개구리는 올챙이 시절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책은 다르다. 올챙이 시절을 기억하기보다 현재에 맞춰 앞으로 나갈 길을 설계해야 한다. 더구나 이전이 선진국을 따라 그 길을
가던 때라면 지금은 우리 스스로 길을 찾아가야 할 때다. 세계를 주름잡는 K-컬처의 도시답게 우리 스스로 우리의 길을 찾아 나가야 한다. 그렇다면 그 길은 무엇일까?
감사하게도 숙명여대 또한 최근 중요한 발표를 했다. 2025년 6월 16일 설립 120주년을 앞두고 기념사업회를 구성하고 대강당 신축을 첫 번째 과제로 선언한 것이다. 한때 서울시 통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던
대강당을 복원한다기에 반갑다. 그래서 숙명여대에도 말하고 싶다. 올챙이 시절을 잊고 지금 시대에 맞는 멋진 공연장을 지어달라고. 그리하여 한때 서울시 통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했던 것처럼 그렇게 우뚝 서달라고.
미래를 위한 꿈은 계속된다. 그럼 우린 어떤 꿈을 꾸며 나아가야 할까?
세계 일류 도시 서울을 꿈꾸다
서울시가 문화정책을 꿈꾼 건 1995년이었다. 밀레니엄을 맞아 서울시 정책 컨설팅 기관으로 설립된 서울시정개발연구원(현 서울연구원)은 「서울 도시문화발전 방안」이라는 보고서를 낸다. 이 보고서는 도시 문화유산의
계승과 발전, 서울 문화의 세계화, 시민문화 향수 기회 확대, 전문 문화예술 창작 역량 지원, 시민 주도의 자율적 문화 활동 함양 등 5대 방향을 중심으로 10대 과제를 제시한다. 지금 봐도 전혀 부족하지 않은
내용을 품고 있지만, 이 보고서는 계획으로 제도화되지 못하고 제안에 그치고 만다. 아직 문화정책을 본격화하기엔 문화에 대한 이해나 절박함이 부족한 때였다.
문화정책이 본격화한 것은 2002년 월드컵을 통해서다. 신명 나는 한 판의 놀이로 끝난 월드컵은 우리에게 문화가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웠고, 도시가 성장 일변도로 발전하기보다 놀 수 있는 광장과 거리, 다양한 콘텐츠가
있어야 한다는 걸 알게 해줬다. 이에 하이서울페스티벌을 개최하고, 서울광장과 청계광장·광화문광장 등을 조성하는 한편,
서울문화재단을 설립2004하고, 「비전 2015, 문화도시 서울」2005이라는 최초의 문화 계획을
수립하게 된다. 문화를 기반으로 도시가 발전하는 틀을 형성한 것이다.
이어 2008년에는 「창의 문화도시 서울」이라는 새로운 계획을 수립했다. ‘서울 컬쳐노믹스Seoul Culturenomics’라 알려진 이 계획은 점차 업그레이드된 도시 환경에 맞춰 도시의 창의성을 어떻게 높일
것인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예술인이 창작하기 위해서는 안정된 (창작) 공간이 필요하고, 새로운 영감을 받을 수 있는 지역 환경 조성이 중요하다. 이에 서울 곳곳에 창작공간을 조성하고, 여러 클럽이 밀집된 홍대
지역을 포함해, 문래동·성수동과 같은 여러 지역을 예술 자원 밀집 지역으로 분류하여 관리하기 시작한다.
‘창조도시creative city’라는 새로운 열풍에 맞서 서울 또한 창의성 제고를 위해 노력한 것이다.
2000년대 중후반에 불어닥친 국제금융위기와 더불어 신자유주의 흐름은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뒤에 불어온 경향이 ‘욜로You Only Live Once, YOLO’, ‘소확행’ 등과 같은 개인의 행복과
삶의 가치를 중시하는 것이다. 서울시 역시 도시환경은 개선되고, 예술인을 위한 창작 환경 또한 상당 부분 개선됐으나, 시민의 삶의 질은 여전히 낮았다. 이에 시민 개개인의 행복을 목표로 「비전 2030, 문화시민도시
서울」2016을 수립하게 된다. 기존 문화 계획이 도시 환경 개선에 주력했다면, 이제는 시민 행복을 기준으로 재설계한 것이다.
한편, 서울시는 2016년 「비전 2030, 서울예술인 플랜」을 수립했다. 곤궁해진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한 최고은 작가의 5주기를 기려, 창작지원을 넘어 예술인의 삶과 생활 여건을 개선하는 게 계획의
목적이었다. 이에 예술인 또한 동등한 시민으로서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권리를 누리도록 생활 환경을 개선하고, 일자리와 창작 환경을 갖추도록 노력하는 새로운 정책을 추진하게 된다.
2020년 이후 서울시가 주력한 것은 문화를 통한 ‘동행’과 서울의 ‘매력’을 높이는 것이었다. 시민 누구도 소외되지 않은 채 예술을 즐기고 새로운 문화를 느끼도록 하며, 도시 곳곳에 새로운 상징과 문화시설을
건립하여 서울의 매력을 높인다는 게 주요한 정책 방향이었다.
이에 ‘청년문화패스’를 발급하고, 예술교육시스템을 강화하는 한편, ‘서울 아이Seoul Eye’와 같은 새로운 상징물을 기획하고
노들섬을 ‘글로벌 예술섬’으로 조성하는 계획과 여의도에 세계적 수준의 클래식 음악홀 제2세종문화회관을 조성하는 등
도시의 매력을 높이는 계획을 발표하게 된다.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2005년 최초의 문화 계획인 「비전 2015, 문화도시 서울」을 수립할 때 내세운 목표는 ‘문화로 행복한, 세계일류도시 서울’이었다. 도시 환경이 열악한 만큼 이대로 둬서는 세계 도시가 될 수 없다는 생각에 도시
환경을 개선해 세계 일류 도시로 나아가겠다는 게 당시 계획의 목표였다.
20년이 지난 지금 서울은 세계 일류 도시가 되었다. 2008년 세계디자인수도로 선정됐고, K-팝, K-드라마, K-무비, K-아트, K-푸드 등 ‘K’로 대별되는 문화가 형성되는 도시가 됐다. 실제 세계 주요
도시를 대상으로 도시 경쟁력을 조사하는 일본 모리재단의 발표에 따르면, 2024년 서울은 세계 48개 도시 중 6위를 차지한다. 어느 면으로 보나 서울은 이제 세계의 도시다.
그러나 세계로 나가는 것과 달리, 세계의 문화가 융합해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고 있는 도시로 역할하고 있느냐를 살펴보면 아직 확신 있게 답할 근거는 없다. 서울은 분명 K-컬처의 세계에 다양한 문화를 분출하는
도시지만, 동시대 예술이나 문화를 선도하는 도시가 아니다. 여전히 우리 것을 중심으로 우리의 것을 내보내는 데 익숙할 뿐, 세계와 호흡하며 세계의 문화를 선도하는 도시가 되고 있지는 못하다. 이에 앞으로 서울이
나가야 할 길을 묻는다면 그것은 단연코 세계 문화의 중심지로서, 세계 문화를 선도하는 ‘세계 문화의 수도’가 돼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새롭게 시작한 이재명 정부 또한 이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글로벌 소프트파워 5대 강국을 목표로 한 ‘문화강국’을 내세우고 있는 이재명 정부는 ‘5극 3특’이라는 새로운 국토균형발전 목표를 내세우고 서울 및
수도권을 경제·문화 중심지로 만들겠다고 선언하고 있다. 참고로 ‘5극 3특’이란 전국을 광역도를 중심으로 한 5개의 초광역 경제권을 만들고, 3개의 특별자치도로 재편해 지역별 자생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서울은 이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문화 중심지로 발전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우리 문화를 발산하는 것이 아닌, 세계 문화를 융합하는 새로운 창조성과 다양성을 만드는 것이다.
세계 도시 또한 마찬가지다. 전통적인 문화 산업을 바탕으로 세계 문화수도를 추구하는 뉴욕은
영화와 TV, 극장과 뮤지컬, 디지털 게임 등 세계 수준의 문화 산업을 중심으로 도시를 새롭게 성장시키겠다는 도시 재건
프로젝트 「Renew, Rebuild, Reinvent: A Blueprint for NYC’s Economic Recovery」2022를 설계해 실행하고 있다.
런던 또한 마찬가지다. 2004년 세계 문화수도를 선언한 런던은 2018년 모든 시민을 창조적 시민으로 육성하는
「모두를 위한 문화Culture for All Londoners」를 발표하고 도심 지역을 문화창조 산업단지로 조성하는
「런던 플랜」을 수립해 창조산업 육성에 나서고 있다.
베를린도 1997년부터 창조성을 도시의 기반으로 만들려 「미래 프로젝트Projekt Zunkunft (Project Future)」를 추진하고, 도시 내 거주하는 다양한 이민자를 중심으로 젊고
창의력 있는 인구를 유입하여 도시의 다양성을 높이는 ‘다양성 예술 문화Diversity Arts Culture’ 프로그램을 실행하고 있다. 창의력과 다양성, 이에 기반한 산업 창출이 세계 문화도시를 만들기 위한
주요한 전략인 것이다.
K-컬처 도시로서 서울은 성장의 기반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시민의 창의성과 보편적인 예술 발전, 다양성을 포용하는 문화 형성 등은 여전히 낮은 게 현실이다. 이에 강점을 강화하고, 주요한 약점을 보완하는 새로운
정책을 설계해 세계의 문화가 흐르는 중심 도시로서 서울을 만드는 새로운 계획을 수립할 필요가 있다. 이에 다음과 같은 정책 설계가 필요하다.
우선, 문화의 다양성을 높이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단일 민족으로 구성된 우리 문화의 특성에 따라 서울 또한 낯선 인구를 도외시하는 문화를 갖고 있다. 2024년 시민을 대상으로 조사한 ‘서울서베이’의 결과를
보면, 외국인에 대한 신뢰도는 3.09점(10점 만점)으로 낮다. 이웃에 대한 신뢰도도 4.82점, 우리는 가족(8.61점)이나 친구(7.08점)를 제외하고는 믿지 않는 게 현실이다. 이에 다양한 문화가 소통하기
위한 기본 여건으로 서울은 서로 다른 문화를 수용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다른 어떤 것보다 다른 문화를 포용하는 기반이 형성되지 않는 한, 서울은 세계 문화의 중심지로서 서로 다른 문화가 융합하는 도시로 발전할 수
없다.
둘째, 예술의 창의성을 높이기 위한 노력 또한 필요하다. 서울을 포함한 우리나라 예술은 극적으로 발전해 2023년 공연예술 시장 규모는 1조 4천억 원, 시각예술 시장 또한 6,900억 원을 넘었다. 그런데 예술인의
삶은 크게 개선되지 않은 게 현실이다. 2023년 예술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예술인 가구의 총 소득은 평균 4,590만 원이다. 같은 해 우리나라 가구당 평균 소득이 6,762만 원인 점을 고려하면, 예술인의 삶은
여전히 고달프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여건에선 새로운 예술을 기대하기 어렵다. 새로운 창작과 실험을 위한 도전도 기대하기 어렵다. 이에 예술인이 성장하고 도전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야 한다. 특히 세계의 작가들이
서울에 와 활동하고, 우리의 작가들이 세계에 나가 교류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단지 지원이 아니라, 성장을 통해 새로운 예술을 창출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게 무엇보다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시민의 창의성을 제고하는 것이다. 2025년 서울문화재단이 발표한 ‘2024 서울시민 문화향유 실태조사’에 따르면 시민의 예술 관람율은 76.1%에 달했다. 확실히 예술 관람률은 높아졌다.
그러나 서로 다른 문화, 다른 가치를 체험하는 것은 여전히 낮다. 자기와는 다른 계층, 다른 문화권에 있는 문화를 체험하는 것은 낯설다. 이에 다양한 교육과 체험을 통해 서로 다른 문화를 수용하고, 포용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문화는 같음이 아닌 다름에서 새로움을 창출한다. 그렇듯 다른 문화를 체험해 새로운 문화를 창조할 수 있도록 그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미 지속된 미래, 이제는 계속될 미래를 꿈꿀 때
세계 문화수도는 단지 꿈이 아니다. 우리의 현실이다. 우리는 지금도 K-컬처라는 명성에 세계를 주도하는 문화를 갖고 있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세계를 융합하는 문화를 만들지 못하는 한, 세계 문화수도는 꿈이 될 수
있다. 손에 잡힌 ‘허영’으로 잠시 꾸는 꿈이 될 수 있단 얘기다.
기반을 마련하는 게 중요하다. ‘개방감’과 ‘포용성’, 이를 바탕으로 한 ‘다양성’과 ‘창조성’이 형성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야만 세계의 문화를 융합하는 도시로, 세계의 문화를 선도하며 새로운 문화를 낳는 도시로
나갈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기본을 바로 세워야 한다. 예술의 창의성을 높이고, 세계 문화를 포용하며, 다양한 예술인과 시민이 세계와 교류하며 활동할 수 있는 도시의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 지금은 세계와의 교류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점이다.
세계의 문화수도 서울, 그 꿈은 분명 가까이 다가와 있다. 이미 K-컬처로는 세계적이다. 이 힘이 세계 문화를 포용하며 새로운 문화를 창출할 수 있도록, 이제 서울은 세계 문화를 융합하는 세계 문화수도로 나가야
한다. 그것이 지난 20년이 말하는 미래일 것이다. 새로운 20년을 만들어갈 서울을 기대한다.
글 라도삼 서울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일러스트 slowrecip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