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 메뉴로 바로가기 본문으로 바로가기
서울문화재단

문화+서울 seoul foundation for arts and culture

검색 창
  • 인스타그램

서울시 동대문구 청계천로 517

Tel 02-3290-7000

Fax 02-6008-7347

문화+서울

  • 지난호 보기
  • 검색창 열기
  • 메뉴 열기

ASSOCIATED

8월호

박형진의 시간과 계절의
흔적을 담아내는 일

전시실 한쪽 벽을 가득 채운 무수한 색점들. 마치 나뭇잎 사이로 바람이 스치는 듯한 풍경이 문 앞에 펼쳐진다. 노랗고 푸르른 빛깔 사이로 따뜻한 기운이 감도는 화면 아래에 손 글씨로 다정하게 눌러쓴 나무들의 이름이 있다. 작가 박형진이 만들어낸 이 풍경은 자연의 재현이라기보다는 오랜 시간 대상을 바라보고 관찰하며 함께 보낸 시간의 기록이다.

멈춰 있는 도시의 땅에서 흘러가는 자연으로

박형진은 초기 작업에서 ‘담장 너머 주인이 있는 땅’을 주목했다. 종로구 송현동처럼 도시 한가운데에 개발되지 않은 채 방치된 땅이 작업의 주요 소재였다. 견고한 담장 너머 풀과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나 적막함이 감도는 공간은 작가에게 빠르게 변화하는 도심의 속도와 대조적으로 다가왔다.

“도심 한복판에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비어 있는 땅이 있다는 게 너무 신기했어요. 아무 기능도 하지 않고 있는 땅과 이를 둘러싼 자본의 흐름과 이해관계에 집중했던 시기죠.”

한편, 송현동 담장을 관찰하고 돌아가는 길에 여전히 지하철역 바닥에서 잠을 청하는 노숙인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작가는 도시 안의 불균형과 괴리에도 관심이 갔다. “누군가는 제 몸 하나 뉠 곳도 없는데 어떤 땅은 거대한 자본과 이해관계에 의해 도심 한복판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존재한다는 것이 낯설었어요.” 그는 이러한 구조적 모순 속에서 도시 공간을 바라보고, 그 이면을 풀어냈다. 그때는 지금처럼 색깔을 많이 사용하기보다는 장지의 스며드는 성질을 이용해 간과한 과거의 시간을 쌓아나가는 작업에 몰두했다. 그러던 2019년, 양주시립미술창작스튜디오 777레지던스로 작업실을 옮기면서 박형진에게 전환점이 찾아왔다.

처음에는 도시처럼 방치된 공간이나 땅을 찾으려고 부지런히 주변을 산책했지만 좀처럼 익숙한 소재를 발견하지 못했다. “5층 작은 방에서 지냈는데 그 방에 창문 하나가 나 있었어요. 산을 등지고 있어서 당장 무엇이라도 그리고 싶었고, 그 창을 통해 보이는 것들을 그려보자고 생각했죠. 마침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거예요. 1월부터 앙상한 나뭇가지를 그리기 시작했는데 3월에서 4월로 넘어가니까 새싹이 돋고 불과 일주일 사이에 그리던 나무의 형체가 완전히 사라지더라고요.” 그는 이 순간을 “기존에 장지의 스며드는 성질을 이용해 축적해가던 작업에서 시간의 흐름을 하나씩 펼쳐보는 방식으로 전환하게 된 계기”로 설명한다. 그렇게 나뭇가지에 돋아난 푸르른 새싹을 종이 위에 색점으로 찍어나가기 시작하며 시간의 연속성과 순환, 자연의 주기에 대한 인식은 점차 작가의 중심 관심사로 자리잡는다. “저는 한국화를 전공했는데요. 제게 나무를 그리는 일은 익숙하면서도 흥미로운 소재였거든요. 그런데 계절이 지나 그리던 대상이 사라지는 순간을 맞닥뜨린 거예요. 그렇게 하루가 일주일을 지나 한 달이 되고 결국 일 년이 되는 그 변화를 그려보고 싶었어요.”

<호두나무 August to September>, 2024, 캔버스 위에 연필, 아크릴물감, 180×145cm

<초록 창문 시간, July>, 2019, 모눈종이에 채색, 53.7×78.5cm, 양주시립미술창작스튜디오 전시 전경

시간을 바라보는 방식의 전환

최근 박형진은 논문을 쓰면서 자기 작업을 관통하는 주제를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제가 얻은 모티프를 시간성이라는 매개를 통해 이야기하고 싶어요. 제가 생각하고 말하고자 하는 것들을 시간성을 통해 드러낸다고 해야 할까요? 표현 방식 자체가 시간성에 닿아 있는 것 같아요.”

팬데믹 시기를 거치며 시간에 대한 인식은 더욱 명확해졌다. 작가는 당시에 인간 활동이 멈춘 도시에서 자연의 변화를 주목했다. “불안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날이 계속되던 시기였어요. 그림을 지속하기도 쉽지 않아서 그냥 동그라미를 그리고 색칠하고 다시 지우는 작업을 반복했어요.” 하지만 겨울이 지나고 마주한 봄의 풍경은 예상치 못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인간은 답답했지만, 바깥의 자연은 너무 맑은 빛을 내고 있더라고요. 그런 걸 보면서 ‘그래, 우리가 힘들어도 너희라도 즐거웠다면 다행이다’ 싶은 마음이 들었어요.”

같은 시기 개인적으로는 가족의 상실도 겪었다. 할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산을 내려오던 길, 나무 위에서 마주한 까치와 까마귀는 작가에게 자연과 인간, 이념과 감정, 낙관과 불안을 이분화하지 않고 바라보게 했다. “우리는 까치는 길조, 까마귀는 흉조처럼 규정해두고 살잖아요. 하지만 그 둘이 나무 위에서 아무렇지 않게 함께 있는 모습을 보면서 결국 제가 말하고 싶었던 게 바로 이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경험은 그가 생각하는 ‘함께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믿음으로 이어진다. “자연이든 인간이든, 이념이 다르든 우리는 그럼에도 함께해야 하는 것 아닐까?”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시간

계절의 변화를 따라가며 시간의 흐름을 관찰하는 데 집중한 시기에는 작업실 창밖 풍경이 박형진에게 중요한 대상이었다. “매일매일 관찰할 수 있다는 특수성이 컸어요. 그때는 그 대상이 꼭 창밖이어야만 했죠.” 이렇게 반복되는 관찰과 기록 속에서 시간의 축적이 자연스럽게 색의 변화로 이어졌고, 이를 회화적으로 풀어냈다. 최근에는 오랜 시간 마주하고 마음속에 간직한 대상을 화면에 담아내고 있다. 응봉산 개나리를 그린 작품이 대표적인 예다. “그 개나리는 거의 10년 넘게 해마다 마주친 대상이에요. 일하러 가는 길에 늘 보던 풍경인데 그걸 보면 ‘아, 봄이 왔구나’라는 걸 알 수 있죠. 저한테는 봄을 알려주는 신호 같은 존재예요.” 언젠가 꼭 그릴 거라고 마음먹었던 이 대상의 유난히 맑고 또렷한 노란색은 오랜 관찰과 기다림 끝에 마침내 작업으로 완성됐다.

최근 몰두하고 있는 호두나무 작업은 훨씬 더 감정적이고 복합적이다. “본가 옆집에 오래된 호두나무 한 그루가 있거든요. 그런데 재개발 계획이 발표되면서 사람들이 떠나기 시작했어요. 이웃이 이사를 가고, 그해 여름에는 벌레가 호두나무 이파리를 갉아 먹어 앙상한 모습이었는데, 유난히 열매가 많이 열렸어요.” 이후 날이 차가워져 벌레가 떠나고 다시 봄이 온 듯 새싹이 돋는 모습을 보면서 작가는 선형적 시간에서 균열을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아래에서 위로’ 그림을 그리며 시간이 흐르는 새로운 방향을 모색했다. 이러한 작업은 단지 형상만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본질과 시간을 파고드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사소한 걸 볼 때도 ‘이건 왜 이렇지?’라는 생각을 많이 하면서 관찰해요. 그 나무와 시간을 보내면서 대상을 더 깊이 이해하는 것이 제가 대상을 알아가는 방법이에요.” 이렇듯 오랜 시간 대상을 지켜보며 시간의 변화를 기록하는 과정에 대상을 향한 작가의 깊은 애정과 관심이 드러난다.

<초록해설, Selfish Art-Viewer: 오늘의 감상>, 2021, 금천예술공장 전시 전경

바깥의 자연이 건네는 이야기

박형진의 작업은 작가 내면에서 외부로 향하기보다는 바깥의 대상이나 존재에서 시작된다. “제 마음에서 출발하는 작업보다는 외부에서 내부로 감정이 들어오는 경우가 많아요. 대상을 관찰하고 시간을 보내면서 외부의 무언가가 저에게 다가오고 그게 안으로 스며드는 식이에요.” 이렇게 깊은 교감과 감정을 담은 작품임에도 초기에는 모눈종이 위에 색점을 찍는 방식 탓에 일견 픽셀화된 이미지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작가는 이 작업이 단순히 형식적 실험으로 오해받는 것을 경계했다. “‘픽셀 회화’ 같은 명칭을 붙이려는 시도가 있었는데, 그게 오히려 대상을 향한 제 마음과 괴리감이 있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그는 작업에 동반되는 감정과 생각을 글로 남기기 시작했다. “색점을 찍을 때 제가 어떤 마음으로 이 색을 선택했는지를 같이 적어놓으면 이 작업을 보는 사람이 더 이해하기 쉬울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이 기록은 색상표처럼 역할을 하거나 감정을 덧댄 일기처럼 전시실에 개별 작품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박형진의 작품은 저마다 고유한 시간의 주기가 있다. 어떤 작업은 일 년 동안 계절의 흐름을 따라 만들고, 어떤 작업은 극히 짧은 시간에 시작되기도 한다. “개나리 작업은 꽃이 지기까지 20일밖에 없었어요. 짧은 기간 동안 그 노란색의 주기를 포착하려고 집중했죠. 반면 호두나무 작업은 상대적으로 긴 호흡으로 완성했어요. 관찰에 1년이 걸렸고 그림은 3년째 그리고 있어요. 지금도 계속 관찰 중이고요”라고 설명한다. 그렇게 박형진은 대상과 시간을 관찰하고 함께 살아가면서 ‘그리는 것’ 이상의 관계를 구축해간다.

하지만 대상이 예측할 수 있는 방향으로만 변화하지는 않는다. “시간이 항상 일정하게 흐르는 건 아니더라고요.” 인간의 개입으로 대상이 갑자기 사라지는 일도 자주 발생했다. “그리다보면 끝나버리는 순간들이 많았어요. 오동나무는 이파리가 너무 커서 관리가 어렵다는 이유로 베어버렸고, 텅 빈 벽까지도 그리게 됐죠. 은행나무도 그리기 시작하니 금방 베어지더라고요. 일종의 징크스처럼 ‘나무를 그리면 안 되는 걸까?’ 생각까지 들었어요”라는 말에서는 작가가 대상을 얼마나 큰 애정으로 들여다봤는지 드러난다. 그런 박형진은 언젠가 차곡차곡 그려온 은행나무를 하나의 전시로 모아보고 싶다는 꿈도 꾸고 있다. 올 하반기에는 호두나무의 마지막 장을 완성할 예정이다.

물론 관람객과 만나는 전시 준비에도 한창이다. “현재 전남도립미술관에서 열리는 단체전에서 오동나무 작업을 선보이고 있어요. 8월에는 갤러리 플래닛에서의 3인전, 9월에는 소마미술관 단체전을 앞두고 있고요.” 앞으로 박형진이 어떤 풍경을 바라보고 또 그 시간을 화면에 어떻게 쌓아나갈지 궁금하다.

백아영 미술 저널리스트 | 사진 Studio Kenn

위로 가기

문화+서울

서울시 동대문구 청계천로 517
Tel 02-3290-7000
Fax 02-6008-73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