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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호

밀라노 라 스칼라,
국제성과 민족성 사이에서

최근 밀라노 라 스칼라의 차기 음악감독으로 정명훈이 선임돼 화제다. 세계 최고의 오페라극장 중 하나인 이곳 역사상 첫 아시아인 음악감독이자, 비이탈리아인으로는 다니엘 바렌보임 이후 두 번째다. 임기는 2026년 말부터 2030년 2월까지. 이탈리아 매체가 다음 지휘자로 이미 다니엘레 가티Daniele Gatti를 확정적으로 묘사했을 만큼 부임이 유력한 상황에서 발표된 깜짝 뉴스였다.

한편 이번 발표에 앞서 라 스칼라에는 또 다른 화제가 있었다. 20년 만에 이탈리아인 극장장이 임명된 일이다. 오는 8월 임기를 시작할 새 극장장은 북이탈리아 파르마 출신의 포르투나토 오르톰비나Fortunato Ortombina. 베네치아 라 페니체 극장 전 극장장이자 나폴리 산 카를로 극장과 토리노 극장 등에서 실무를 한 정통 이탈리아파다.

이탈리아인이 이탈리아 극장의 장이 되는 것이 왜 이슈일까? 여기엔 ‘20년’이라는 숫자가 중요하다. 라 스칼라는 2005년부터 프랑스인 스테판 리스너Stephane Lissner, 오스트리아인 알렉산더 페레이라Alexander Pereira, 프랑스인 도미니크 마이어Dominique Meyer 등 세 명의 외국인 극장장이 연달아 부임했다. 이곳에 견줄 만한 극장인 파리 오페라·빈 슈타츠오퍼·뉴욕 메트 오페라 등을 놓고 볼 때, 이처럼 외국인에게 연속으로 자리를 내준 극장은 없다. (물론 한 사람이 오래 재임한 경우는 있다.) 또 이탈리아 국립 오페라극장 대부분 자국민이 극장장을 맡고 있다는 사실에 견주어봐도 라 스칼라의 지난 20년은 상당히 개방적이다. 급격히 세계화되는 오페라계에서, 유럽의 여러 오페라극장장을 거친 외국인 감독은 다국적 파트너십이나 공동 제작, 메세나를 유치하는 데 유리하고,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 데 이점이 있다는 것을 라 스칼라는 잘 알고 있다.

2005년 라 스칼라에 외국인 극장장 시대가 열린 데는 또 다른 배경이 있다. 당시 라 스칼라는 큰 분열을 겪고 있었다. 음악감독 리카르도 무티Riccardo Muti(1986~2005년 재임)와 극장장 카를로 폰타나Carlo Fontana(1990~2005년 재임)의 갈등 때문이다. 결국 두 사람 모두 사임하는 최악의 사태를 맞게 되자, 이를 환기하려 극장은 역사상 처음으로 외국인 극장장을 모셔온다. 혼란을 타개할 강한 리더십과 위기 관리 능력을 국적보다 우선한 것이다. 이때 부임한 스테판 리스너는 엑상프로방스 페스티벌 예술감독 시절 개혁을 통해 축제의 명성을 국제적으로 끌어올린 점을 높이 인정받았다. 리스너는 라 스칼라를 재통합하고, 이탈리아 작품에 집중된 레퍼토리를 다국적·현대화했다. 이후 인사는 취리히 오페라하우스·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예술감독을 지낸 페레이라, 빈 슈타츠오퍼·파리 샹젤리제 극장장 등을 지낸 마이어로 이어졌다.

라 스칼라 차기 음악감독으로 임명된 지휘자 정명훈 ⓒBrescia e Amisano/Teatro alla Scalat

갑작스런 멜로니 정부의 70세 상한법

이번에 선임된 오르톰비나는 전임 극장장들처럼 국제적인 이력을 가진 인물은 아니지만, 이탈리아 오페라계의 주요 인사인 데다 라 페니체에서 라 스칼라로 옮기는 흐름도 설득력 있다. 이슈가 된 것은, 신임 과정에서정치적 외압이 작용했느냐다.

현 이탈리아의 조르자 멜로니Giorgia Meloni 정부는 민족주의 노선을 표방한다. 정부는 지난 2023년 5월, 70세 이상은 이탈리아 국립 오페라극장장을 맡을 수 없다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급작스런 나이 제한에 걸린 이는 두 사람, 나폴리 산 카를로 극장장 스테판 리스너(현 72세, 라 스칼라에서 산 카를로로 이적)와 라 스칼라 극장장 도미니크 마이어(현 69세)였다. 리스너는 법에 따라 임기 도중 퇴출됐고, 나이 제한에 다다른 도미니크 마이어는 연장의 여지 없이 극장을 떠나게 됐다. 계약 종료에 수년 앞서 스카우트와 협상이 오가는 극장장 자리인 만큼, 이번 법 개정과 통보는 급진적이었다. 리스너는 산 카를로 극장을 상대로 소송을 걸어 승소, 복귀해 얼마전 계약대로 임기를 마쳤다. 마이어의 경우 라 스칼라 필 단원들이 직접 극장 측에 계약 연장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밀라노 시장이자 라 스칼라 이사회 의장 주세페 살라Giuseppe Sala와 전 문화부 장관인 제나로 산줄리아노Gennaro Sangiuliano는 후임으로 오르톰비나를 추천했다.

지난 3~4월 라 스칼라에서 공연한 <토스카>는 충실한 고전 연출, 장인 정신이 느껴지는 이탈리아 베리스모 오페라의 정수로 평가받았다
ⓒBrescia e Amisano/Teatro alla Scala

이탈리아 오페라의 정수를 지키려는 노력

이러한 연유로 오르톰비나 시대의 운영 방향은 특히 주목받고 있다. 라 스칼라는 현재 이탈리아 오페라 70퍼센트, 해외 작품 30퍼센트 정도의 비율로 공연을 올리고 있다. 이탈리아 오페라의 진수를 선보이는 극장이라는 타이틀 아래, 도미니크 마이어와 현 음악감독 리카르도 샤이Riccardo Chailly는 균형잡힌 고전·현대 작품을 엮어왔다. 다만 오르톰비나가 24/25 시즌 라 페니체 극장에서 꾸린 프로그램이 대부분 이탈리아 작품인 것으로 미뤄볼 때, 그동안 외국인 극장장들이 구축한 초국적 프로그램들은 다시 자국 중심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있다. 장단이 있는 행보다. 레지테아터 오페라가 범람하는 시대에 오페라의 원형을 고수하는 극장도 필요하며, 라 스칼라는 그 역할을 맡을 여력이 충분하다. 현장에서도 여타 유럽 오페라극장과는 다른 라 스칼라만의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정명훈은 오르톰비나가 라 페니체 극장장이던 시절부터 긍정적인 관계를 맺어왔다. 그는 정명훈을 두고 “역사상 가장 위대한 베르디 지휘자 중 한 사람”이라고까지 언급했을 정도. 라 스칼라와 관계 역시 그렇다. 정명훈은 1989년 라 스칼라에 데뷔한 이래 지금까지 꾸준히 지휘했다. 이곳 최초의 명예지휘자이자 음악감독 외에 최다 지휘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단원들의 강력한 지지도 받고 있다. 음악적으로 손색이 없으면서도 이번 선임의 민족주의 노선에 대한 우려를 해소하는 현명한 카드다. 만약 이 자리에 이탈리아 적통인 다니엘레 가티가 예외없이 임명됐다면 라 스칼라가 지난 20년간 이루고자 했던 국제화의 행보에선 한 발짝 멀어졌을지도 모른다. 이번 정명훈 신임은 라 스칼라의 개방성이 아직 살아 있음을 보여준다. 행정에는 국적이 있을지언정 음악에는 국적이 없다.

글 전윤혜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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