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리니스트 이지윤의 악보 밖 세계
대책 없이 멋진 음악가들이 있다. 무대에 서는 순간부터 묘한 에너지를 발산하는 이들. 연주 시작 전부터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고, 무대가 끝난 후에도 오랫동안 잊히지 않는다. 바이올리니스트 이지윤은 필자에게 그런 음악가였다. 그의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2015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파이널리스트에 올랐을 때였다. 이듬해인 2016년에는 카를 닐센 콩쿠르에서 1위를 차지하며 더욱 주목받았다. 그리고 1년 후, 독일의 명문 악단인 베를린 슈타츠카펠레Staatskapelle Berlin의 악장으로 임명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소문만 무성하던 그의 무대를 제대로 감상한 것은 2020년, 금호아트홀 상주음악가로 선정된 이후였다. ‘칼단발’에 청색 실크 슈트를 입고 무대에 선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지윤은 날카로운 보잉 테크닉과 깔끔한 음색으로 독보적인 연주를 들려줬고, 그 순간부터 필자의 마음속에 범접할 수 없는 오라aura를 지닌 연주자로 남았다.
그를 떠올리면 또 한 편의 영화가 생각이 난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참가하는 젊은 바이올리니스트의 8일간 여정을 다룬 영화 <파이널리스트Imposed Piece>2019다. 감독 브레히트 판후나커르Brecht Vanhoenacker는 2015년 콩쿠르를 밀착 취재했고, 당시 이지윤도 파이널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콩쿠르의 우승자는 따로 있었지만, 판후나커르 감독은 유독 이지윤에게 시선을 두었다. 영화의 마지막에는 마음을 울리는 이지윤의 진솔한 인터뷰도 담겼다.
“감독님과 저는 파이널리스트 12명 중에서도 유독 코드가 잘 맞았던 것 같아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대화가 잘 이어졌고, 그래서인지 저를 특별히 관심 있게 지켜봐 주셨어요. 마지막 인터뷰는 콩쿠르가 끝난 지 10개월 정도 지난 후에 따로 녹음했는데, 감독님이 직접 제가 사는 베를린으로 오셔서 영화를 보여주셨죠. 그때의 감정이 새록새록 떠올라서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이후에도 영화를 두세 번 더 봤어요. 한국 개봉 당시에도 영화관에서 당시의 심정이 고스란히 떠올라 울컥하더라고요. 지금은 삶의 형태가 많이 바뀌었지만, 언젠가 그때가 문득 생각나면 또 한 번 보게 될 것 같아요.”
악보에 몰두한, 부단히 기본기를 다듬어온 시간
어린 시절, 이지윤은 피아니스트인 어머니 덕분에 자연스럽게 음악과 함께 성장했다. 어머니는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모두 배우게 했지만, 활동적인 성격의 이지윤에게는 바이올린이 잘 맞았다. 그는 “한 곳에 앉아 연주해야 하는 피아노보다는, 이 방 저 방을 걸어 다니며 연습할 수 있는 바이올린이 더 맘에 들었다”고 회상한다. 그는 예원학교 재학 중이던 15세 나이에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사 과정에 영재로 입학해 김남윤·김정현 교수를 사사했다. 그때까지 스스로 특별한 재능을 느끼지 못했던 이지윤은 한예종에 들어가면서 재능을 깨달았다. 특히 실내악 수업에서 모두가 똑같이 악보를 읽기 시작해도, 자신이 곡을 익히는 속도가 유독 빠르다는 걸 알아차린 것. 그리고 20세 나이에 독일행 비행기에 올랐다.
“실은 미국이 더 친근한 느낌이 있었어요. 어머니도 미국에서 공부하셨고요. 독일은 언어와 문화가 낯설지만, 미지의 세계에 대한 강렬한 호기심이 들더라고요. 그리고 제가 배우고 싶었던 콜랴 블라허Kolja Blacher 선생님도 독일에 계셨죠.”
그가 독일을 유학지로 선택한 것은 콜랴 블라허의 영향이 컸다. 우연히 블라허가 연주하는 베토벤 ‘로망스’ 영상을 봤는데, 소리부터 해석까지 모두 그간 상상해온 이상적인 연주라 인상에 남았다고 한다. 이후 블라허가 한스 아이슬러 음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사실을 알고 바로 입학 오디션을 위해 비행기표를 끊었다. 그는 아직도 블라허와의 첫 레슨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90분의 레슨을 위해 총 6곡을 준비했지만, 그는 그 시간 동안 바흐 소나타 단 세 마디만 연주하고 나왔다.
“충격의 도가니였죠. 한국 교육에서는 접할 수 없는 신선한 충격이었어요. 블라허 선생님이 제게 질문을 많이 하셨어요. 보통 레슨에서는 제가 질문하는 쪽이었는데, 독일에서는 제가 질문을 받는 경우가 많았죠. 또, 선생님과 관련된 에피소드가 생각납니다. 2013년 오이스트라흐 콩쿠르에서 우승한 다음 날이었어요. 레슨을 갔는데 선생님께서 축하의 말도 없이 스케일부터 들어보자고 하시더라고요. 성격이 어떤 분인지 알 것 같지 않나요? 정말 철저하고 엄격한 분이세요. ‘기본’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초심’을 잊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6년 내내 강조하셨습니다.”
오는 12월, 서울문화예술교육센터 서초에서 이지윤의 마스터클래스를 만날 수 있다. 그는 현재 모교인 한스 아이슬러 음대에서도 제자를 양성하고 있다. 이지윤은 지금 꿈을 키우고 있는 학생들을 보면 어릴 적 자신이 떠오른다고 말한다. 압박감에 시달리며 무대를 좇던 20대 초반의 위태로운 나날이.
“한국에서는 경쟁이 치열하다보니 괜한 압박을 많이 받으며 연주하는 것 같아요.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학생들도 많이 봤고요.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어린 나이인 저 자신에게 그런 압박을 준 게 미안하기도 해요. 독일은 확실히 그런 게 덜하죠. 하지만 제가 만난 유럽 친구들을 보면, 약간 한국적인 정신(?)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긴 해요. 완벽함을 추구하는 게 부족하긴 하죠. 그래서 한국적인 교육과 유럽적인 시스템이 섞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결국 한국에선 모든 것이 밸런스의 문제니까요.”
악장으로서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과 의견을 나누는 이지윤
악보에 담기지 않은 이야기를 발견하는 순간
그가 닐센 콩쿠르에서 승전보를 전할 때, 필자는 그가 단연 솔리스트의 길을 걸을 것으로 예상했다. 당시 주요 콩쿠르에 입상하면 보통 독주자로 경력을 쌓는 것이 정석이니까. 그런데 이지윤은 곧이어 오케스트라 입단 소식을 들려줘 꽤 놀란 기억이 난다. 그는 콩쿠르에 열심히 출전한 이유에 대해 “유럽 무대에서의 무대 기회를 얻기 위해서였다”고 솔직하게 밝혔다.
“콩쿠르는 초등학생 때부터 매년 몇 번씩 나간 것 같아요. 물론 그때는 제 의사로 참가한 건 아니고, 부모님이나 선생님의 권유가 있었죠. 20대에 들어서면서 욕심이 생기고 제 의지로 출전하기 시작했어요. 여성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유럽 무대에서 발돋움하려면 콩쿠르가 그 방법의 하나라고 생각했죠. 요즘은 본인을 홍보할 수 있는 매체가 예전보다 많이 생겼지만, 제가 한창 콩쿠르에 나갈 때는 입상해서 매거진에 소식이 크게 실리지 않으면 이슈 되기가 힘들었어요.”
심경에 변화가 생긴 것은 2015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참가했을 때였다. 그 시기에 학생 신분으로 베르비에 페스티벌 같은 큰 음악제에 참여할 기회가 많았고, 그곳에서 동경하던 연주자들을 많이 만났다. 그러나 그들의 모습은 그동안 상상해온 솔리스트와 많이 달라 당혹스러웠던 것.
“페스티벌에서 만난 일류 연주자들은 제가 상상한 모습과 아주 달랐어요. 해외를 돌아다니며 활동하느라 집에 간 지 너무 오래됐고, 가족들을 본 지도 한참 됐다고 하더군요. 외로운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성공한 독주자도 사실은 힘든 싸움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으면서 생각이 많이 바뀌게 됐습니다. 우연히 오케스트라 오디션 공고를 접하게 되면서 베를린 슈타츠카펠레에 입단하게 됐는데요. 개인적으로 제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저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걸 좋아하고, 안정감 있는 환경이 중요하니까요. 원하는 걸 얻은 셈이죠.”
450여 년 역사를 자랑하는 베를린 슈타츠카펠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오케스트라 중 하나로, 베를린 슈타츠오퍼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들은 오페라를 포함해 통상적으로 1년에 약 200회 이상 공연을 진행한다. 1992년부터 2023년까지 상임지휘자로 함께한 다니엘 바렌보임Daniel Barenboim은 베를린 슈타츠카펠레를 세계 최정상의 악단으로 성장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지윤은 바렌보임의 눈에 띄어 이 유서 깊은 오케스트라의 ‘동양인 최초’, ‘여성 최초’, ‘역대 최연소’라는 타이틀을 달고 종신 악장에 임명됐다.
“바렌보임에 관한 이야기라면 끝도 없이 계속할 수 있어요.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건, 오디션이 끝난 후 저에게 따로 얘기하자고 하신 거예요. 사무실로 가는 길에 제 악기를 들어 주시기도 했죠. 그와 처음 가까이에 앉아서 일대일로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 눈빛이 잊히지 않아요. 바렌보임의 눈동자가 파란색인데, 그 눈빛은 마치 10대 소년 같았어요. 아이가 관심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 반짝이는 그런 느낌이었죠.”
베를린 슈타츠카펠레는 보통 오전 10시 반에 리허설을 시작한다. 극장에서 15분 거리에 거주하는 이지윤은 아침에 일찍 출근해 보잉 체크를 하고 연습에 임한다. 낮에는 모교인 한스 아이슬러 음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시간을 보내고, 저녁에는 다시 공연을 위해 극장으로 향한다. 개인 시간이 생기면 연습실에서 자신과 악기, 둘만의 시간에 오롯이 몰두한다.
“오케스트라 악장이 다른 사람의 소리를 더 많이 들어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리더십에 있어서는 악장과 솔리스트가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해요. 제가 오케스트라 악장으로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가 25세였는데, 솔리스트 커리어를 그만둔다고 생각하니 아쉬움이 컸어요. 그래서 더 욕심이 나더라고요. 시간을 쪼개서 독주 공연에도 시간을 할애하고 있어요. 오케스트라를 하다가 개인 연습 시간이 생기면 즐기면서 하는 편입니다. 저는 여전히 달려가는 중이죠.”
지금은 악단과 독주자 생활을 병행하며 그토록 원하던 안락한 삶을 보내고 있지만, 그에게도 직장에서 생존을 위해 고심하던 시절이 있었다.
“나라마다 일하는 방식이 다르잖아요. 예를 들어, 악단 내에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해결하는 방식 같은 것들이요. 제가 나이가 어리다보니 대립이나 갈등이 있을 때 어떻게 빨리 처리해야 하는지를 많이 고민했죠. 음악적으로는 크게 이질감을 느낀 적은 없어요. 단원들이 모두 너무 좋은 분들이어서 처음부터 많이 도와주셨고요. 제가 여성이고 어리다고 해서 차별받는 느낌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 부분에서는 오히려 (직장을) 편하게 다닌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지난 3월 피에타리 잉키넨 지휘 KBS교향악단과 호흡을 맞춘 교향악축제 무대 ⓒ예술의전당
나만의 음색 찾기, 그리고 그 소리를 전하기
얼마 전, 이지윤이 자신이 몸담은 베를린 슈타츠카펠레에서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하는 영상을 우연히 보았다. 그 사이 그의 연주는 많이 변해 있었다. 악장으로 다년간 일해온 덕분일까. 오케스트라에 스며드는 소리가 온화했고, 완벽한 조화를 추구하는 노련함이 도드라졌다.
“독일적인 사운드는 무게감이 있는 소리예요. 쉽게 설명하자면, 두껍고 어두운 소리가 나는 거죠. 날아가는 소리가 아니라, 남아 있는 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화려함보다는 차분함이죠. 베를린 슈타츠카펠레는 450년의 역사를 쌓아왔잖아요. 우리는 항상 이러한 소리를 내려고 했다고 단원들이 저에게 많이 이야기해줬어요.”
이지윤은 악장으로 근무하면서도 꾸준히 한국을 찾고 있다. 지난 6월에는 예술의전당 IBK챔버홀에서 4년 만에 국내 리사이틀을 열었다. 당시 그는 바그너와 슈만·브람스·R.슈트라우스 등 독일 정통 레퍼토리로 무대를 꾸몄다. 현지에서 그가 쌓아온 시간을 가늠할 수 있는 자리였다.
“독일 오페라극장에서 일하면서 소리에 관한 연구를 더 많이 하게 됐습니다. 이번 리사이틀에서는 독일에서 가장 많이 연주해보고, 제일 편하게 느끼는 작곡가들을 모아서 선보였어요. 오페라극장에서 특히 성악가들의 노래를 들으면서 깨달은 게 많습니다. 그곳에서 <토스카>나 <마술피리> 같은 고전적인 레퍼토리는 거의 매년 반복하거든요. 악보를 안 보고 연주할 수 있을 정도로 전부 외우고 있죠. 늘 다른 가수들과 함께하는데, 모두 다른 색깔을 내요. 개별 가수가 루바토Rubato를 어떻게 하는지, 끝 처리를 어떻게 하는지, 어떻게 드라마틱한 효과를 내는지 등을 관찰하죠. 그리곤 이런 것들을 제 연주에도 반영하려고 해요.”
소리에 관한 자신만의 해답을 찾은 그는 이번 마스터클래스에서는 학생들에게 “테크닉뿐만 아니라 악보에 쓰여 있지 않은 것을 읽는 방법을 알려주고 싶다”고 힘주어 말했다.
“어린 친구들은 대부분 악보 위에 써진 음표만 잘 지키며 연주하는데, 사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써 있지 않은 걸 보는 것입니다. 그걸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싶어요. 저 역시 한국에서 공부할 때 그런 걸 배우고 싶었거든요.”
글 장혜선 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제공 마스트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