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인 아카이브
손현선
시각예술/회화·퍼포먼스
@sontomoi
2024 서울시민예술학교 @서울문화예술교육센터 용산
ⓒ스튜디오 오프비트
저는 시각예술가로서 ‘본다는 것’을 다시금 질문하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연결하는 데 집중하며 작업하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몸으로 감지되는 감각의 다양한 추상적 상태를 그려내는 회화 작업을 진행해왔습니다. 최근에는 회화를 수행하는 몸의 움직임을 다시 평면 위에 구체화해 나가는 것과 더불어 퍼포먼스라는 움직임으로 전시 안팎에서 다양한 만남의 순간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창작 활동을 처음 시작하고 발표하게 된 계기는 2015년 아르코 신진작가 워크숍이었습니다. 처음으로 학교 밖에서 만난 작가들과 교류하며 서로의 세계를 탐색하고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워크숍에서 만난 동료 박희자·최병석·서윤아 작가와는 우주당이라는 프로젝트 그룹을 결성해 인사미술공간에서 《COSMOS PARTY: 우리는 우주에 간다》2016라는 전시를 열었습니다. 당시에 만난 윤지영 작가와는 워크숍 이후에도 교류를 이어가며, 2017년 손현선·윤지영·장서영이 ‘아크로바틱 코스모스’라는 프로젝트 작가 그룹을 만들어 전시 활동을 함께하기도 했습니다.
아무와 만나지 않고 작업실에서 혼자 서성일 때 스스로 예술가임을 느낍니다. 작업실에서의 시간은 스스로 예술가임을 증명해야 하는 시간입니다. 이 가혹하고 너그러운 양면의 시간 속에서 한없이 모자람을 느끼기도 하고, 때론 작업이 품은 무한한 가능성을 온몸으로 탐지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누구에게도 침범받지 않는 작업실 안에서 도망칠 곳 없이 ‘아, 나는 예술가이구나’ 하고 혼자 느끼는 거죠. 저는 이 홀로의 시간을 긍정하며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회화를 수행하는 몸에 관심을 기울이며 다양한 물질의 감각을 만지고 움직이면서 작업해오고 있습니다. 저는 ‘시각’예술을 해오며 오래된 훈련과 교육의 축적으로 인해 눈과 손은 걷잡을 수 없이 비대해지고 나머지 신체 기관은 점점 퇴행하고 무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시각적 재현에 있어 자신의 한계를 느끼고 있기도 했고요. 이후 ‘하던 대로 안에서 더 잘’이 아니라 내가 살피지 않았던 몸의 연결을 돌보다보면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과 희망으로 다년간 자신의 몸에 관심 가지고 움직이며 그간의 몸을 탈학습unlearn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일종의 재활 속에서 저는 시각 외에 다른 감각과도 긴밀하게 접촉할 수 있었고, 물질과 관계하는 몸의 반경이 확장됨을 느꼈습니다. 이 과정을 통과해 나온 작품 중 하나가 <불, 안>2024입니다. 불이라는 매혹적인 대상을 이미지의 재현으로서가 아닌, 그림 그리는 몸과 물질의 접촉 감각에 집중하며 그린 그림입니다. 관찰과 재현이 아닌 행위로써 대상과의 거리를 밖이 아니라 안으로 전복하거나 없애며 붉은 안료를 손으로 만지고 더듬고 지우며 캔버스 화면에 접속하고 움직였습니다.
<불, 안>, 2024, 캔버스에 유채, 193.9×260.6cm, diptych
좋아하는 영감의 장소는 책과 사람, 예술 공간 그리고 그 사이를 이동하는 길 위입니다. 저는 작업이 잘 안 풀리면 책을 주문하곤 합니다. 책 사기, 책 읽기는 저보다 먼저 길을 걸은 선배, 선생님들의 작업을 남몰래 훔치듯 배우는 행복한 영감의 시간입니다. 종이책이라는 오래된 물질을 손에 쥐고 넘기며 우연히, 때론 필연적으로 배움과 깨달음의 언어를 만날 때 큰 설렘을 느낍니다. 때로는 사람을 찾습니다. 연결의 감각이 필요할 때, 혼자서는 할 수(살 수) 없음이 자명한 순간, 동료 예술가에게 만남을 청합니다. 그들과의 대화에서 저는 그 무엇보다 건강하게 기름진 영감의 양분을 얻습니다.
한편으로는 동시대 예술을 품은 공간에서 힘을 받기도 합니다. 예술 경험은 저에게 좋든 싫든 파장을 남깁니다. 저는 관객인 동시에 다른 창작자의 보이지 않는 동료로서 관람의 행위에서 동시대적 연결 감각을 더듬습니다. 분야를 막론하고 좋음을 경험했을 때, 저는 아주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에 돌아갑니다. 결국은 혼자의 시간으로 되돌아가지만 예술 경험과 함께 손잡고 돌아가는 길 위에서 재생의 감각을 느낍니다. 마지막으로 길은 이 영감의 발생지를 연결하고 소화하는 장소입니다. 길을 걷다보면 다양한 생명, 인간, 비인간, 사물 그리고 내 안의 생각 등을 만납니다. 내가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나를 보고 있다는 감각이 감지될 때 사진으로 기록하기도 합니다. 최근 제가 가장 좋아하는 길은 밤 숲길입니다. 적막한 밤 숲에서 가을이라는 계절이 들려주는 다양한 낙하의 소리와 움직임을 감지하며 시간의 신비를 느낍니다.
<투명-몸>, 2023, 투명 필름지에 젤 미디엄, 가변 크기, 로쿠스 솔루스 설치 전경 ⓒ스튜디오 오프비트
10월 12일 통의동클래식에서 열린 <음 몸 집>(연출·연주 김지연, 공동창작·출연 위성희·송명규)에 다녀왔습니다. 피아노 연주와 움직임이 만나는 공연으로, 저는 피아노 뒤, 그러니까 연주자 등 뒤에 앉았는데요. 김지연의 등을 투과하며 들려오는 첫 음의 뭉클함에 이어 두 무용수의 움직임이 음과 함께 포개지고 흩어지고 사라지는 시간의 호흡이 아름다웠습니다. 어린이 관객 두 명과 함께 공연을 본 것이 특히 좋았습니다. 이들의 자연스레 이완하고 움직이는 몸이 현장의 분위기를 생동하게 했거든요.
오는 11월, 자화상을 주제로 프라이머리 프랙티스Primary Practice에서 한성우 작가와의 2인전을 앞두고 있습니다. 전시를 준비하며 ‘현재의 나를 어떻게 마주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자 질문은, ‘대화’야 말로 마주하는 타인을 통해 내가 드러나고 느껴지는 형식이자 시간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대화라는 형식을 미술 안에서 실천하는 경험을 만들고자 지난 9월 워크숍을 진행했고, 총 여덟 분을 만나 ‘대화’했습니다. 이때의 경험을 발전시켜 <백투백: 대화>를 2025년 한 해 동안 전시이자 작품으로 발표할 계획입니다. 일시적인 이벤트가 아닌 지속 가능한 형태의 전시로 더 많은 분과 만나고 대화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라며 준비하고 있습니다.
정리 전민정 [문화+서울]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