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기울기를 기울일 때
서울장애예술창작센터 입주작가 전시
김진주, <마로니에 식물-열매가 되기 전에…(백목련)>, 2023
박유석, <교차>, 2024
《기울기 기울이기》는 서울장애예술창작센터 14기 입주작가 6팀의 예술 세계를 조명하는 전시로, 김은정·김진주·이기언(라움콘)·박유석·윤하균·허겸 작가의 작품 30여 점으로 구성된다. 서울문화재단과 예술의전당이 주관하고, 효성이 후원한다.
이번 전시의 차별점은 ‘모두를 위한 전시’다. 쉬운 해설, 수어, 오디오 가이드, 점자와 스크린 리더 등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방안 외에도 색약자를 위한 보정 안경, 저시력자를 위한 촉감 감상 도구, 어린이 및 발달장애인을 위한 쉬운 도슨트 등을 추가해 다양한 관람객이 조금 더 편하게 접근할 수 있는 친절한 전시를 준비했다.
장애 유무에 상관없이 우리는 모두 각자가 느끼는 불편함을 가지고 산다. 개개인이 가진 기울기를 주제로 전시를 기획한 문유진 큐레이터의 기획 의도를 소개한다.
라움콘, <환영>, 2024
윤하균, <괴물>, 2022
“세상의 모든 존재가 갖고 있는 고유한 기울기,
때로는 완만하게 때로는 가파르게, 누군가는 곧게
누군가는 둥글게 움직이며 서로 만나고 관계하는
기울기들 앞에서, 우리는 기울기라는 공통의
감각을 경험하게 됩니다. 여섯 작가는 자신만의
기울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다른 이들의 기울기와 만나고, 자신의
기울기에 다른 기울기를 더합니다. 이렇게 주어진
기울기를 기울이는 행위는 변화를 만들어 냅니다.”
‘기울기’라는 개념이 어렵게 느껴질 수 있지만,
각자가 가진 기울기를 생각해보자. 예를 들어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 30대 여성은 너무 어릴 수
있고, 다른 누군가의 기준에서는 나이가 많을 수도
있다. 아이들조차 키가 작아서 혹은 너무 커서
탈 수 없는 놀이 기구가 있다. 기준은 매번 달라질
수 있는 것이며, 그에 따라 각자의 기울기가
생긴다. 평균이라는 것에서 조금 달라지면
‘기울기’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기울기’는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허겸, <서울 no.9-Before sunset>, 2024
김은정, <Ethereal Breath (Shashah)>, 2024
작가와 작품을 알고 전시를 관람하면 깊은 이해를
통한 새로운 자극을 받을 수 있다. 지난 6개월간
워크숍으로 보완한 작가 노트와 비평가의 글도
전시실에 제공된다. 이번 전시에 참여하는 작가
소개와 작가 노트를 짧게 살펴보자.
❶ 김은정은 귓가에 속삭이는 소리의 다정함을 얇은 튤이 둘러싸인 공간으로 풀어낸다. 공간 안에서 움직일 때 겹겹이 스치며 만들어지는 소리는 우리의 피부로 전해진다. 시각과 촉각으로 감상할 수 있는 작품을 선보인다. “아스라이 사라진 순간들을 내 앞에 되살려낸다. 가벼운 천을 들고 공간을 휘감는다. 내 몸을 감싸며 퍼져나가던 손끝의 간지러움이 한 번 두 번 공간에 멈춘다. 가볍게 나를 스치던 순간은 켜켜이 겹치고 겹치며 부풀어 오른다. 흰빛의 숨결과 노란색 스치-움, 살굿빛 속삭임, 분홍 휩싸임……. 어느 순간 천장과 벽과 바닥은 사라진다. 공간은 뿌옇게 공기의 움직임으로 둘러싸인다. 당신이 내쉬었던 숨결로 가득 찬다.” (김은정 작가 노트 발췌)
❷ 김진주는 존재감이 미약한 들풀에 집중한다. 가느다란 단색의 선 드로잉은 식물도감처럼 정확하고 섬세하다. 오랜 시간 관찰한 드로잉은 식물의 생태 변화와 함께 존재 이유를 보여준다. “강인한 생명력을 가진 ‘잡초’라 불리는 풀들은 이 지구에서 생각보다 많은 일을 하는 것에 반해 존재감이 너무 미약하다. 땅에 납작하게 퍼져 있어 마구 밟고 다니면서도 (우리는) 자신의 발이 풀 위에 있는지 의식도 하지 않는다. 이렇게 땅을 지탱해주고 있는데, 우리(사람들)는 그 존재를 무시한다. 그러나 당신이 무심코 밟은 구둣발 밑의 풀(잡초)은 시련을 견디며 여상히 자라고 존재한다.” (김진주 작가 노트 발췌)
❸ Q레이터(이기언)은 결코 정복할 수 없는 산을 주제로 <환영>이라는 작품을 선보인다. 산악 팀의 일원이었던 작가의 아버지를 인터뷰한 영상과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언어로 해석한 산을 빚어 올린다. “정복하기엔 너무 힘들다. 관찰하는 법, 그래 그거다.” (라움콘 작가 노트 발췌)
❹ 박유석은 시간의 흐름과 감정의 변화를 빛과 소리로 표현한다. 안정감과 불안함의 대비를 통해 변화의 역동성을 드러낸다. 분열과 확장을 거듭하는 세포의 움직임과 같은 미디어는 또 다른 감각을 일깨우게 한다. “밖을 나서는 길에 문득 맑은 하늘과 내리쬐는 햇살에 알 수 없는 전율을 느낀다. 마치 나를 이끄는 듯한 손짓, 머리 위에서 관망하는 시선, 떨어져 나간 객체가 주변과 다시 융화되는 연결감, 언젠가부터 안과 밖을 나누던 경계는 이내 허물어지고 거대한 흐름 안으로 녹아든다. 자연의 일부로서 존재를 느끼는 것은 우리가 끊임없이 변화하고 순환하는 자연의 법칙 속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과정이다. 생명과 죽음, 성장과 쇠퇴라는 자연의 순환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일시성과 동시에 영속성을 이해하게 된다.” (박유석 작가 노트 발췌)
❺ 윤하균은 괴물을 무서운 존재가 아닌 흐릿하고 아름다운 형체로 표현했다. 연한 먹을 켜켜이 쌓아서 드러난 덩어리와 같은 괴물은 작가의 상상력 속에서 새로운 수호신이 된다. “새롭고 재밌는 것을 하고 싶어서 광목에 수묵으로 괴물을 그려보았다. 물론 먹을 연하게 풀어서 광목에 켜켜이 쌓아 올리는 작업은 시간이 아주 오래 걸린다. 나는 괴물에게서 아름다움을 느꼈다. 데몬은 중세 시대에 들어와 악마의 의미로 변했는데, 어원은 원래 사람들을 지켜주는 정령, 수호신에 가깝다. 나의 괴물은 최대한 힘이 세고 날카롭고 무서우면서도 아름다우면 좋겠다. 이겨야 하니까. 이긴다는 의미는 불행을 막아낸다는 것이고, 잘못된 질서와 싸워서 이긴다는 것이다.” (윤하균 작가 노트 발췌)
❻ 허겸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서울의 풍경을 단순화하고 건물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한다. 도시 풍경 속에서 그는 모든 것을 분명히 알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위안을 느낀다. “나는 건물들을 블록처럼 쌓고 서로 이어 붙이듯 붓으로 경계선을 다시 칠해 희미하게 만든다. 작업 과정 중에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원경을 찍은 사진을 사용하는데, 지나치게 선명한 사진을 실제 내 눈이 보는 수준으로 맞추기 위해 해상도 등을 조정하고 이 이미지를 참조해 그림을 그린다. 이러한 과정에서 풍경은 더 멀어지고 모호해진다. 내가 알고 있다고, 명확하게 보인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은 다시 알 수 없게 되고, 늘 어디에 서 있어야 할지 모르는 나에게는 그 모호함과 거리감이 나쁘지만은 않다.” (허겸 작가 노트 발췌)
이번 전시는 관람객의 이해를 돕고자 매주 토요일 11시 쉬운 도슨트가 준비된다. 가벼운 마음으로 전시실에 들러 여섯 작가의 기울기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의 기울기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통해 고정되지 않는 감각을 경험해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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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기 기울이기 Art of tilting》
9월 26일부터 10월 15일까지, 매주 월요일 휴관
오전 10시~오후 7시(오후 6시 입장 마감)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제7전시실
글 이화정 서울문화재단 서울장애예술창작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