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hereal Breath>, 2023, 튈, 실크, 약 25㎡ 가변 설치
저는 청력 상실의 과정을 겪으며 소리를 몸으로 감각하는 경험에서 출발한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침묵의 세계에는 무엇이 있을까? 암흑이 삼켜버린 고요함만 남은 세계에서는 무엇이 태어날까? 청각이 사라진 자리를 대신하는 감각으로 세계와 마주하며 저는 존재를 확인해나갑니다. 제게 작업은 세계로부터 끊이지 않고 던져지는 소리를 손끝의 촉감으로 전환해 연주하는 과정입니다. 작품을 통해 알아들을 수 없는 세계를 피부로 감각하는 언어로 새롭게 구조화하고자 합니다. 명확하고 확신에 찬 언어에 앞서는, 손안에서 떨리며 몸으로 전해지는, 몸으로 들을 수 있는 순간을 전하고 싶습니다.
미술을 좋아해서 전공으로 택하긴 했지만 제가 익힌 기술로 무엇을 표현할지 항상 막막함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스물다섯 살 어느 날 갑자기 청력을 잃고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면서 나만의 가치를 많이 고민한 것 같습니다. 후천적으로 장애가 생기는 과정에서 제 몸이 습관화해온 세계를 감각하는 방식이나 제 존재 자체에 관한 생각이 계속해서 변했는데, 그것을 이야기하고 싶다는 욕망이 강하게 끓어올랐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작품으로 풀어내며 뉴욕에서 대학원에 진학했고 졸업 후 2012년 그곳에서 여러 전시에 참여하면서 예술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뉴욕에서 유학하던 시절, 미술관에 정말 많이 다녔습니다. 좋아하는 작품을 만나면 그 작품 하나를 거의 한 시간 동안 본 적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작가와 함께 있는 것 같고, 현실의 시간은 잠시 멈춘 듯합니다. 작품에 대한 애호를 넘어서 작가에 대한 존경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이것을 할 거야!’, ‘나는 이걸 좋아하고 이건 정말 중요해!’라고 말하는 용기에 대한 존경입니다. 그런 작품을 만나 작가로부터 삶을 배우고, 제 인식을 바꾸고, 저 또한 ‘나의 길을 걸어가겠다’는 의지가 생깁니다. 어떤 작품을 만드는지에 앞서 그런 예술적인 삶의 태도를 결심하고 그 삶을 살아가겠다는 용기를 가지게 될 때 스스로 예술가라고 느낍니다.
5월에 마친 개인전 《손끝의 소리》에 전시한 <Ethereal Breath>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청력을 상실한 뒤 가까운 사람들이 제 귀에 대고 말하는 경험이 잦아졌습니다. 귀 가까이에서 속삭이는 순간, 볼에 닿는 소리는 동시에 피부에 스치는 입김과 그것의 온도로 기억됩니다. <Ethereal Breath>는 얇고 가벼운 튈tulle을 수겹으로 겹친, ‘사사삭’ 속삭이는 듯한 소리로 제 몸에 닿는 촉각적 경험을 재현한 공간입니다. 얇은 튈이 겹쳐지며 수채 물감처럼 퍼지는 무지개 색상의 공간은 소리가 제게 닿는 순간 미세하게 변화하는 감각의 경험을 보여줍니다. 공간에 들어온 관객은 이곳을 거닐며 튈이 몸에 스치며 소곤소곤 그들의 피부에 속삭이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Eleleu>, 2023, 면, 털실, 200×100×7cm
작업을 시작할 때면 항상 제 몸의 경험으로부터 출발하려고 노력합니다. 작업실에 들어서는 순간 ‘앉고 싶다’, ‘눕고 싶다’고 느끼면 그 몸의 자세로부터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찾아나갑니다. 제 몸이 부드럽고 포근한 느낌을 원하면 그런 재료를 두고 몸이 원하는 감각으로 변화시켜봅니다.
겹치거나 포개면서 점점 군더더기를 빼고 제가 처음 원한 감각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런 창작 과정을 거치기에 직관에 무뎌지지 않고 항상 ‘직감gut feeling’이라고 할 수 있는 감각을 깨우기 위해 노력하는 편입니다. 최근에는 실비아 플라스Sylvia Plath·클라리스 리스펙토르Clarice Lispector·엘렌 식수Hèlène Cixous와 같은 여성 작가의 글을 읽으면서 이런 몸으로부터의 언어를 예민하게 관찰하는 데 자극을 받고 있습니다.
클로디 윈징게르Claudie Hunzinger의 소설 『내 식탁 위의 개Un chien à ma table』를 읽은 후에는 이 책을 만난 것이 너무 감사하고, 두고두고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인공은 노년의 여성 소설가로 곧 사라져 버릴, 언젠가 사라져 버릴 것들을 마주하며 글로 기록되어야만 하는 것은 무엇인지, 여성 작가로서 무엇을 낳아야 하는지를 고뇌합니다. 글을 읽으며 저는 작가와 함께 살아 있는 듯한 경험을 했습니다. 내 몸이 끊임없이 외부에 닿은 채 무언가를 감각합니다. 그 과정에서 나와 세계의 경계가 어떻게 흐려지고 어떻게 ‘우리’가 확장하고 계속해서 무엇을 낳을 수 있는지를 강렬하게 느낄 수 있는 책입니다.
<도란도란>, 2024, 패브릭, 폴리솜, 약 25㎡ 가변 설치
오는 9월, ‘인사1010’에서 《자기의 한 끄트머리-손》이라는 제목의 개인전을 앞두고 있습니다. 제가 만든 청각적 점자와 같은 ‘버블-셀bubble-cell’ 형태 위에 다양한 색상의 털실을 겹치고 엮어나가는 작품을 선보일 예정입니다. 저의 손끝에서 털실 한 줄 한 줄을 풀어 버블-셀 위를 더듬거리고 채울 때 저의 끄트머리는 세계와 이어지고 확장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다시 관객의 경험과 이어지고 소리처럼 퍼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작업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10월에는 연남동의 신생 공간 ‘전시장’에서 개인전이 있습니다. 1.8평 정도의 작은 방, 정적의 세계에서 촉각적인 경험을 할 수 있게 펼쳐볼 계획입니다. 공간에 솜을 채운 섬유를 겹쳐나가면 내 몸이 공간에 닿을 때 나는 모든 소리가 스며들며 조용해집니다. 그런 고요와 달리 천을 겹치는 행위가 만들어낸 형태는 마치 소리가 울리는 것처럼 공간에 퍼져나가게 되지요. 관객이 방 안에 들어와 그들의 몸을 통해 고요함 속의 다채로움을 느껴보기를 바랍니다.
정리 [문화+서울] 편집위원 전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