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인 아카이브
정아롱
시각예술/서양화
b.1981
@arong.c
금천예술공장 15기 입주작가
<숲 속의 오필리아와 유니콘(Ophelia and a Unicorn in the Woods)>, 2016, oil on canvas, 130×162cm
예술 작품에는 마술적인 힘이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여러 방식으로 회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예술의 기원을 보면 신비로 가득했던 세계와 인간을 연결해주는 마술적 도구로서 출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에게 과학적 지식이 점점 쌓이고 계몽으로 인해 이성과 합리성을 추구하게 되면서 미술도 점차 마술성으로부터 분리되고 멀어지는 방향으로 전진해왔습니다. 그에 대한 아쉬움이 늘 있어서, 오늘날 예술이 본래 가지고 있던 힘의 위치를 되찾고 그 마술성을 복원시켜주고자 하는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캔버스에 유화로 그림을 그리는 것뿐만 아니라 서양화의 고전 기법인 에그 템페라egg tempera, 실버 포인트 드로잉silver point drawing 그리고 도자 위에 청화로 그리는 작업도 하고 있습니다. 신화나 전설, 종교, 문학 등 여러 영역에서 모티프를 차용해 이미지를 만들고 신비롭고 환상적인 세계를 담아 보여줍니다.
연필을 손에 쥘 수 있게 된 아주 어린 나이 때부터 늘 그림을 그린 기억이 있습니다. 제법 잘 그리기도 한 것 같고, 그저 혼자 조용히 앉아 그림 그리는 행위를 즐긴 것 같습니다. 또 어린 시절을 이탈리아나 영국·스웨덴·러시아 등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보냈는데 그곳의 문화유산을 많이 접하면서 성장했고 훗날 자연스레 미술 쪽으로 진로를 정하게 되었습니다. 학교 다닐 때도 실기실 안에서 조용히 그림만 그리면서 지냈는데요. 대학원 시절 우연히 강의 나오신 선생님이 제 작업을 추천해주셨고, 2005년 인사미술공간에서 열린 전시 《열》에 참여하면서 일종의 미술계 데뷔를 하게 되었습니다.
좋은 예술가가 되고 싶다는 하나의 지향점을 두고 많은 시간을 작업실에서 홀로 고립된 채 제가 벌여 놓은 작업과 씨름하며 보냅니다. 이렇게 혼자 창작에 몰두하면서 보내는 시간 속에서는 특별히 스스로를 예술가라고 느끼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제가 예술가인지, 제 작업이 예술 작품인지 많은 의문을 품습니다. 하지만 작품이 완성된 후 그것을 작업실 바깥으로 가지고 나와 전시·비평·판매 등 과정을 거칠 때, 또는 현재 입주해 있는 금천예술공장과 같은 아티스트 레지던시에 들어와 여러 비평가·큐레이터·작가들과 교류하면서 ‘작가’라는 타이틀을 업고 창작 활동을 할 때, 이렇게 미술계의 시스템 안에서 움직이고 있을 때 좀 더 확실히 스스로를 예술가로 자각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숲길과 유니콘(Woodpaths and Unicorn)>, 2016, oil on canvas, 91×91cm
최근에는 에그 템페라와 실버 포인트 드로잉이라는 서양의 고전 기법을 활용한 작업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에그 템페라는 안료를 달걀 노른자와 섞어 그리는 방식이고, 실버 포인트 드로잉은 은필銀筆로 드로잉을 하는 것입니다. 둘 다 유화 또는 아크릴릭 물감을 이용한 회화 작업이나 연필을 이용하는 드로잉에 비하면 매우 복잡하고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에그 템페라의 경우 그림의 지지대를 직접 제작해 전통 방식으로 만든 젯소Gesso를 수십 번 칠하고 사포로 갈아 표면을 단단하고 곱게 만듭니다. 그다음 달걀 노른자와 안료를 섞어 아주 가느다란 붓으로 매우 많은 선을 그으며 붓질을 해주고 색에 미세한 변화를 주면서 조심스럽게 렌더링rendering합니다. 실버 포인트 드로잉의 경우 종이 표면에 특수 처리를 해야 은과 같은 금속으로 그었을 때 선이 만들어집니다. 연필처럼 강하게 누르면 진한 선이 나오고 살짝 누르면 연한 선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톤과 굵기의 선이 그어지기 때문에 명암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끝없이 많은 선을 긋고 교차시키는 해칭hatching 작업을 합니다. 한번 그은 선은 지울 수 없으므로 선 하나하나에 신경을 많이 써야 합니다. 여러 면에서 현대의 회화 매체보다 불편하고 비효율적인 대신, 작업을 할 때 특별히 집중해야 하므로 ‘몰입’의 상태로 가기가 수월합니다. 이렇게 몰입의 상태에서 작업을 할 때 창작자로서의 내가 창조되어 가는 예술 작품과 접촉하고 둘의 시간과 세계가 교차하며 마술적 순간을 경험하게 됩니다. 현재는 이처럼 몰입을 통해 창작 과정에서 마술성이 발현된다고 믿으며 이러한 불편한 과거의 작업 방식을 택해 이어오고 있습니다.
지금은 네 살 아들을 키우고 있어 육아와 작업 외에는 시간을 내기 힘들어 문화생활을 가까이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현재 금천예술공장에 함께 입주해 있는 15기 작가들의 작업을 보면서 많은 자극을 받습니다. 제 작업은 과거로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기 위해 매우 수공적인 고대의 방식을 취하는데, 이곳에서는 회화와 조각 외에도 설치에서부터, 영상·공연·사운드아트 등 현대적인 매체와 다양한 영역을 넘나드는 작업을 보게 됩니다. 자신들이 선택한 매체 또는 주제와 관련해 마주한 한계와 고민을 듣고 그것을 또 작업을 통해 해결해가는 노력을 보면서 제 작업을 반성하고, 저 또한 어떻게 하면 고전과 현대를 잘 결합해 더 재미있는 작업을 보여줄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이곳 금천예술공장에 입주해 있는 한 해 동안 풀어야 할 과제가 될 것 같습니다.
올해 8월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에서 개인전을 엽니다. 지금 준비하고 있는 작품들은 원목을 조각해 그 위에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금박을 입혀 공예적인 느낌도 날 듯합니다. 더군다나 청화로 그린 도자 조형물도 있어서 언뜻 우리가 흔히 아는 회화 전시와 거리가 멀 겁니다. 방법이 어찌 되었든 모두 회화에 대한 제 생각에서 이어진 작업이고 예술의 마술적 힘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나아가 우리가 살아가는 삶과 우리가 속한 세계의 신비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지금 한창 작업 중이라 전시장에 어떻게 나올지 저도 궁금한데 회화와 예술, 우리의 삶과 세계에 대한 저의 믿음과 소망이 잘 나타났으면 하는 바람으로 열심히 준비하고 있습니다.
정리 [문화+서울] 편집위원 전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