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호한 지휘자’ 에버 6의
국립국악관현악단 데뷔기
시작은 ‘지휘자가 꼭 있어야 할까?’
하는 조금은 발칙한 발상이었습니다. 국악기로
편성된, 관현악 장르를 다루는 단체라는
국립국악관현악단의 특성 때문에 지휘자 찾기가
항상 어려운 일이거든요. 지휘자가 바뀔 때마다
단원들이 겪는 어려움이 가장 컸고, 그것은
공연의 완성도로 이어지기 때문에 프로듀서의
입장에서도 항상 고민인 부분이죠. 그래서 정말
해 보기로 했습니다. 공연의 제목인 <부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존재를 없앰으로써 이 존재가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이번 기회에 재발견해보고자
했어요. 공연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은 ‘결국은
사람’이었습니다.
공연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전제가 필요합니다. AI 기술과 로봇공학은 서로
다른 영역의 기술이고, 공연은 AI가 아니라
로봇공학 기술을 활용한 것이라는 점이죠. 가장
먼저, 로봇 지휘자를 위해 여러 기업과 연구소에
접촉을 시도했습니다. 국내 최초로 휴머노이드
로봇을 개발했다고 알려진 카이스트의 ‘휴보’
연구진을 비롯해 네이버랩스, 현대자동차 등등…
그리고 한국생산기술연구원과 연이 닿았습니다.
2009년 <엄마와 함께하는 국악보따리>를
통해 국립국악관현악단과 함께한 경험이 있는
분들이었어요. 이때 로봇 ‘에버’가 소리꾼으로
무대에 출연했죠.
2021년 하반기에 기획을 시작해
한국생산기술연구원과 아이디어를 발전시키기
시작했고, 본격적인 개발에 착수해 2023년 6월
무대에 서기까지 8~9개월가량 소요된 것 같아요.
처음 기대한 것과 가장 큰 차이가 발생한 지점은
로봇 지휘자인 에버 6가 스스로 듣고 판단하는
것이 불가하다는 점이었어요. 에버 6가 구현하는
동작(모션)은 사전에 입력된 정보에서만 출력할
수 있죠. 지난해 지휘자 프로젝트로 인연을 맺은
정예지 지휘자의 동작을 모션 캡처하고, 박자마다
최적화하는 과정을 거쳐 ‘에버 6’가 완성됐습니다.
로봇의 지휘 기술이 얼마나 완성도 있게 구현될지
걱정이 있었기에, 이를 보완할 공연 요소를
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엔 로봇과 사람의 모습을 극명하게
대비시켜서 지휘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예술
영역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반증하고 싶었습니다.
로봇 지휘자를 세우지만, 오히려 로봇이 대신할
수 없는 사람만의 영역이 무엇인지 탐구했죠.
그런데 이번 프로젝트에 함께한 최수열 지휘자가
이런 제안을 하시더군요. ‘그보다는 로봇과 사람이
협업하는 모습을 비추는 건’ 어떠냐고요. 공연의
주제는 대립에서 출발했지만 우리는 협업하고
상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라는 걸
보여주면 좋겠다는 거죠. 한국생산기술연구원
박사들도 ‘로봇이란 인간을 넘어서기 위한 존재가
아니라 결국은 사람을 도와주기 위해 수반되는
존재’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이번 공연의 2부에
로봇과 사람 지휘자가 함께 지휘하는 곡(손일훈
작곡 음악적 유희 시리즈 ‘감’)을 배치한 것은
그러한 의도였습니다.
실제 로봇의 지휘 실력은 어떠했을까요?
개개인의 평가가 다르겠지만, 그야말로 ‘참
기계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장점도
있습니다. 정확한 박자, 일정한 속도, 오류 없는
움직임, 감정의 동요가 없는 일관성, 그야말로
‘단호한 지휘자’죠. 로봇 지휘자가 박자를 정확히
제시할 것이라는 믿음은 확실합니다. 하지만
연주자가 실수하거나 변수가 생겼을 때 로봇
지휘자는 그 상황을 해결해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렇기에 오히려 연주자들에게는 스스로를 믿고
집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였어요. 로봇
지휘자에겐 리더의 능력이 없으니까요. 또 로봇과
소통이 불가하니 단원들끼리 서로 더 맞추고,
더 많이 연구하고, 악보도 한 번 더 보게 되더군요.
한 분은 “쟤(에버 6)를 따라가느라 우리가 오히려
더 맞추게 되더라”고 하시더군요. 사람 연주자의
연습과 발전을 돕는 역할은 확실히 한 것 같습니다.
국립국악관현악단 관현악시리즈 IV <부재> 중 지휘자 최수열과 에버 6가 음악적 유희 시리즈 ‘감’(작곡 손일훈)을 함께 지휘하는 모습
<부재>는 초기 단계부터 최수열 지휘자와
깊이 있는 논의를 거쳐 완성해나갔습니다.
로봇과 사람 지휘자가 함께하는 시도를 위해
손일훈 작곡가에게 신작을 위촉했고, 그렇게
완성된 음악적 유희 시리즈 ‘감’이 오선보가 없는
즉흥 음악이었던 것도 또한 파격이었죠. 무대
위에서 선율과 리듬을 어떻게 선택해 표현할지는
전적으로 연주자에 주어진 부분이었고, 사운드를
어떻게 조합할지는 사람 지휘자에게 달렸으며,
그 와중에 규칙성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는 것은
로봇 지휘자의 역할이었고요. 이 곡이야말로
<부재> 공연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를 잘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연주자와 교감하는
최수열 지휘자의 표정과 시종일관 무표정으로
정확한 박자를 주는 로봇의 모습을 비교해보는
재미가 관객에게도 생생하게 전달됐을 것이고요.
이번 공연이 끝난 뒤, 생각하지도
못한 많은 공연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당분간은 로봇과 함께하는 공연을 다시 기획할
계획이 없습니다. 로봇공학이 대중이 기대하는,
더 높은 기술 수준에 다다르지 않는 이상은요.
오히려 우리는 이 공연을 통해 기획이 부재할
수밖에 없는 국악관현악의 태생적 한계를 어느
정도 돌파했다고 자평합니다. 듣는 음악으로서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것을 넘어서, 예술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관객에게 질문을
던졌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전달됐다는 것이
가장 큰 성과 아닐까요? 무엇보다 이 도전과 기발한
기획을 실제 무대에까지 담아낼 수 있었던 것은,
끊임없이 새로운 음악에 도전하고 연주 실력을
꾸준히 발전시킨 국립국악관현악단 모두의 노력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 순서로 들려준,
사람과 사람이 함께할 때만 만들어 낼 수 있는
감동적인 연주는 하루 이틀 맞춘 호흡으로 나올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글 김태희 [문화+서울] 편집팀
사진 제공 국립극장